‘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찾아서
일시 : 2023. 11. 15.(수)
장소 : 국립 4・19민주묘지(서울 강북구 수유동)
이번 호부터 새롭게 시작된 연대기관 대담 [대한민국 민족민주운동의 백두대간을 찾아서] 코너 첫 번째 손님으로 재단법인 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조성구 사무총장을 모셨다.

문) 총장님 반갑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에게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조성구입니다. 저희 재단법인은 순수한 NGO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나라 4대 민족·민주운동 (동학농민혁명, 3·1만세운동, 4・19민주혁명, 5·18민주화운동) 중에서 아직까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지 않은3·1운동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는 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 기념재단의 사무총장직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조성구 사무총장
문) 네, 총장님. 작년에 제주에서 개최되었던 ‘한국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관리기관협의회’ 워크숍에서 뵙고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2017년 4・19혁명기록물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함께 문화재청의 심사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후 기록물 등재기관인 유네스코에서 자체적인 체제정비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5년이 경과한 후인 지난 5월 24일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마침내 4・19혁명기록물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최종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습니다. 작년에 개최된 워크숍 때만해도 아직 최종적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결정되지 않아 4・19혁명기록물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하루빨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어 두 기관이 함께 만세를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로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먼저 4・19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축하드리며, 등재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오신 총장님의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예, 말씀하신 대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과 저희 재단에서 준비하여 함께 제출되었던 4・19혁명기록물이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4・19혁명에 직접 참여하셨던 분들과 4・19국립묘지에 안장되신 영령들에게 혁명에 참여하셨던 몇 분이이라도 살아계실 때 등재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드렸던 것을 지킬 수 있어서 감개무량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계승 세대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올곧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뿌듯함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문) 우리 재단에서는 2015년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만열)을 구성하여 8년 동안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난 5월 최종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동안 등재를 추진해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4・19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등재를 위해 활동해온 내력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사단법인‘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201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설립하게 된 배경은 2011년‘5·18민주화운동’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는데, 당시 이를 주도한 김영진 국회의원(5선·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43개국 위원장)이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본산인 4・19혁명 등재를 독립적으로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뜻을 4・19혁명 관련 인사들에게 제안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2011년도에 4・19혁명 유네스코 등재 설명회를 관련 단체장, 각 당 원내대표, 사회단체 주요 인사들과 설명회를 거처 2013년에 4・19혁명 유네스코 등재 준비위원회 발기인 대회 개최하였습니다. 이후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4・19혁명 기념도서관을 방문하여 관련 책, 영상, 사진, 일기 등 자료수집에 나섰습니다. 2015년도에는 학술 심포지엄을 여러 차례 개최하였고, 2017년도에 문화재청으로부터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국내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절차대로라면 2021년도에 등재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유네스코 내부의 체제정비 등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조금 늦어져 2023년에 최종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11년부터 4・19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하면서 여러 난관을 거쳐 2023년에 최종 등재되었으니까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네요.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이라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4・19혁명 정신이 인정받아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재단에서 참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여겨져 동지애가 느껴집니다.(웃음)

문) 등재가 확정된 이후 우리 재단에서는 기록물이 지닌 한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세계사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고, 등재된 기록물(총 185종 13,132면)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이 온라인 등으로 관련 자료를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아카이브 등을 구비한 ‘동학농민혁명기록관’ 건립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4・19혁명 관련 단체나 기관에서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따른 후속 사업을 준비하고 있을 터인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예, 우선 많은 사람이 역사적 유산을 찾아보고 활용할 수 있고, 또한 올바른 보존과 관리를 위한 아카이브 구축을 우선사업으로 정해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4・19혁명 정신을 계승해나갈 세대에 대한 교육을 위한 세부사업을 구상하고 이를 추진해나가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병행하여 등재된 4・19혁명기록물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국내·외 학술대회 등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시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894년 정월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일어선 동학농민군은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황룡전투 등을 거쳐 4월 27일(양력 5. 31.) 전라감영 소재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정부는 전주성의 ‘반란군’을 진압해달라고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1883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텐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보냅니다. 이렇듯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치정세가 격동하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 측에 전주성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였고, 동학농민군은 근대적인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이른바 전주화약을 체결합니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비워주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 측에 철병(撤兵)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철병하기는커녕 일본군은 1894년 7월 23일(음 6. 21.) 야밤에 경복궁을 무단점령하여 국왕을 인질로 잡고 국정을 농단하는 폭거를 자행합니다. 상황이 급변하자 이를 주시하던 동학농민군은 반일항전의 기치를 들고 다시 일어났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2차 동학농민혁명이라고 칭합니다. 경복궁을 무단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부대를 맞아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무기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만민평등 세상을 추구하였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마감되었으나 그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대한제국시기 항일의병으로,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으로, 해방이후에는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우리나라 근현대 민족민주운동의 수원지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4・19혁명의 역사적 의미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사무총장의 생각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 인권의 효시임에 틀림없지요. 나아가 나라의 주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당한 권력에 맞선 상징적인 혁명입니다. 그 정신이 3·1운동과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외신에서도 칭찬한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한민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잘 아시겠지만 4・19혁명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고등학생들의‘저항 시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저항 시위가 시민들의 저항으로 확산된 것은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버려진 김주열 군의 시체가 인양되면서 2차 마산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4월 19일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는 고려대 학생 시위였습니다. 4월 18일 3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고려대 시위가 있었고, 시위 후 귀교하는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습격하여 다음 날인 4・19 때 시위가 크게 폭발하였습니다. 4월 19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과 일부 고등학생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대적으로 벌어진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저항 시위는 4월 26일‘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단의 시위로까지 확장되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하였습니다. 이렇게 민주정부(제2공화국)가 탄생된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된 민주 정부 하에서 부정선거 관련자 및 발포 책임자에 대한 재판, 과거청산, 그리고 4・19혁명 수습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4・19혁명기록물로 등재시켰던 것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4・19혁명 기념사업회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재단에서는 특별법에 명시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자료관 건립 및 운영, 자료조사 및 학술연구사업, 유적지 정비사업 등을 중심으로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4・19혁명 기념사업회에서는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기념사업을 추진하는지 궁금합니다.
답) 네, 우리 4・19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관 건립 부지선정을 위하여 서울시와 협의해나가면서 건립 장소 등을 물색하고 있습니다. 병행하여 계승 세대 교육을 위하여 전국의 각급 학교와 연계하여 우리 재단의 상임고문단을 중심으로 찾아가는 명사 초청강연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관련된 역사 현장을 탐방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역사 탐방은 해외에 거주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잘 모르는 해외교포 2·3세대들을 대상으로 모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득하게 하는 내용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위한 역사 현장 탐방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 『녹두꽃』 독자분들께 4・19혁명 발발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동학농민혁명이 농민 그러니까 그 당시로는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아래로부터 혁명이잖아요? 4・19혁명도 동학농민혁명과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은 한국이 1945년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15년, 냉전이 빚은 한국전쟁 종료 이후 7년밖에 지나지 않는 시점이어서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최빈국이자 분단국가였습니다. 이런 한국에서 아래로부터 혁명이 일어나 독재정권을 전복시켰습니다. 독재정권의 앞잡이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학생과 시민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시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는 제3세계에서 일어난 최초의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인 동시에 유럽의 68혁명, 미국의 반전운동, 일본의 안보투쟁(전공투) 등 1960년대를 휩쓴 세계적인 학생저항운동에 영향을 준 대단히 중요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문) 역사상으로 불의에 맞서 저항하고 정의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 이름 모를 수많은 분의 희생이 치러진 것은 비단 동학농민혁명뿐 아니라 4・19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관련 기록이 많이 있어야 되는데요. 대개는 많은 기록이 멸실되는 경우가 많아서 자료를 수집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20세기 한 세기 동안‘반란사건’으로 치부되면서 더욱이나 자료가 대부분 사라져버린 아픔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비하면 비교적 근년의 일이지만 4・19혁명 기록물도 수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요?
답) 네, 4・19혁명 관련 기록이 국가, 국회, 언론, 개인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이를 수집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4・19혁명 기록물은 1960년 2월 28일부터(2·28시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이른바 4・19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과 4・19혁명 성공 이후 수습 및 재판과정, 과거청산 과정에서 생산된 종합적인 기록물로서 시민혁명의 처음부터 끝까지 순차적인 기록을 그대로 보여주는 원본 기록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1960년 4월 19일 한국에서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시민혁명 자료입니다. 1960년 2·28 대구 학생시위부터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 그 원인, 전개과정, 그리고 혁명 이후 사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등 혁명의 전후 과정과 관련된 일체의 기록물인데 이 기록물이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재단에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문) 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귀한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무총장님께서 각별히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빠뜨린 사항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고맙습니다. 귀한 지면에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욱이나 이렇게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4・19혁명의 조부님? 증조부님?(웃음) 격인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대화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4・19혁명은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는, 열악한 정치적 환경에서 비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낸 값진 일이었어요. 이는 4・19혁명으로부터 66년 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 근·현대사 민주주의를 아이들에게 교육할 때 꼭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시작해서 3·1운동,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항쟁,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을 얘기해줍니다. 그 시발점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후대들이 제대로 알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기에 3·1운동이 이뤄졌고, 비폭력 4・19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우리의 아름답고 고귀한 역사를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리고 계승하는 데 한층 더 힘이 실리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일에는 우리나라 민족민주운동의 고조부님 격인 동학농민혁명, 그 정신 선양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기념재단과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관과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관지이자 소식지인 『녹두꽃』에서 민족민주운동 관련 기관대담 코너로 [대한민국 민족민주운동의 백두대간을 찾아서]를 신설한 것에 대해 깊은 감명과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코너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좌담회 등으로 발전해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문) 이것으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사무총장님 고맙습니다. 다음에 4・19혁명 기념식 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식 행사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