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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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 17호
임실, 장수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임실, 장수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원촌전투지



  지천리 봉기터


  임실지역은 1889년 경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실지역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최봉성과 그의 아들 최승우를 시작으로 여타 주요 인물들이 입도하였으며,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례집회와 동학농민혁명 발발 당시 교도가 급증하였다. 임실현감 민충식이 동학에 입도하여 농민군에 협조하였던 것 또한 많은 주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임실의 동학농민군은 백산대회가 개최될 무렵 호응하여 봉기하였는데, 이를 이끈 대접주가 임실지역에서 가장 먼저 동학에 입도하였던 최봉성이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연로하여 그의 아들과 사위에게 봉기를 주도하도록 했다. 임실지역의 농민군들은 남원의 농민군과 함께 남원성을 점령하는 등 남원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지천리는 1965년 섬진강 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주민들은 크게 멀지 않은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곳에 새로운 지천리 마을을 만들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비


  갑오동학혁명기념비는 임실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참여자 후손들이 1983년 건립한 것으로 을미삼일운동기념비, 무인멸왜운동기념비와 함께 3대 기념비로서 운암초등학교 앞 공터에 세워져 있다. 임실의 농민군은 백산대회 당시부터 봉기에 적극 참여한 이후 집강소 시기에 남원대도소를 세우고 전라좌도를 통합하였던 김개남 장군과 함께 행동했다. 김개남 장군은 7월 중순부터 임실 상여암에서 주둔하다 8월 중 남원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임실에서 남원까지 80리 길을 연이어 행군했던 동학농민군의 수가 7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원성을 근거지로 하여 재봉기한 김개남 장군이 일련의 병력을 이끌고 전주로 향하던 도중 임실에 당도하자 현감 민충식이 나와 맞이하였다. 민충식은 김개남 장군이 상여암에서 지낼 당시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고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군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개남 장군이 임실을 떠나 다시 전주로 향할 때도 민충식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고 한다.


  김개남 장군은 접주들에게 서로 협력하여 남원성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 중 임실의 접주인 최승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실의 농민군은 방아치와 관음치, 여원치 일대에서 벌어진 남원지역 최대의 격전에 참여하였으며, 운봉의 민보군이 남원성을 공격하였을 때도 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항쟁하였으나, 남원성이 민보군에게 점령당하고 관군과 민보군의 추격에 밀려나 기세가 한풀 꺽이고 말았다. 이후 임실지역의 지도자들은 순창의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은거하였다.


  6년 뒤 임실로 돌아온 지도자들은 동학의 재건에 성공하여 순창, 진안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과 그 제자들은 재건한 세력을 기반으로 동학교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중 김영원의 제자인 박준승이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 또한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3대 기념비는 이러한 임실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삼요정


  삼요정은 임실지역 동학농민혁명지도자였던 김영원이 후학의 양성을 위해 1883년 세운 학교다. 김영원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과거시험에 세 번이나 낙방하고 말았다. 낙방의 원인이 부정부패에 있다고 판단한 김영원은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인 시목동에 삼요정을 세워 후학 양성애 힘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3⋅1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한 박준승, 양한목 등이 있다.


  그는 임실에 동학이 전파되자 사회개혁의 뜻을 가지고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임실지역의 접주로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남원의 방아치 전투와 관음치, 여원치 일대의 격전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남원성 전투에서 운봉의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에게 패한 뒤 임실의 지도자들과 함께 순창의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6년간의 피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원은 최승우의 지원을 받아 전주에 창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삼화학교를 세우는 등 후세 교육에 많은 힘을 쏟았다.


  1919년 당시 3⋅1운동의 민족대표 후보자로 지목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자신의 문하생인 박준승과 양한묵을 추천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임실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고문과 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1919년 8월 26일 옥사하였다. 삼요정은 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으나 2002년 주민들과 임실군의 노력을 통해 복원되었으며, 삼요정복원기념비도 함께 세워졌다. 2008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삼요정을 지정현충시설로 선정하였고 도로변에 삼요정 안내석비도 설치했다.



  성밭 마을



좌) 성밭마을 경로당 우) 성밭마을 전경


  임실군 청웅면 향교리의 성밭 마을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처가와 외가가 있었던 곳이며, 장군이 한때 이곳에서 서당 훈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김개남 장군은 결혼한 첫 해 아내를 잃고 다음 해 성밭 마을의 이씨와 재혼하였다. 장군의 외가가 성밭 마을에 있었던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 장군의 단묘는 현재 정읍시 산외면에 있지만, 그 유해는 성밭 마을 뒤편의 산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에는 장군의 후손들이 유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두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을 실시하였으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허선 집 터



허선 집 터 원경


  허선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임실지역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오랜 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최시형은 2차 봉기 당시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농민군이 공주로 북상한 후 전라도로 거처로 삼아 이곳저곳에서 잠시 머물며 지내다 허선의 집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며 정황을 주시했다. 손병희는 북접농민군을 이끌고 우금티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전라도로 후퇴하였으며, 원평전투 마저 패배한 후 허선의 집에서 머물고 있던 최시형을 찾아갔다. 최시형과 합류한 손병희는 농민군을 다시 규합하여 영동 용산장터까지 북상하였다. 임실의 농민군 중 일부도 보은 북실까지 함께 행동하며 북실전투를 치르고 돌아왔다고 한다.


 

좌) 허선 집 터 근경 우) 삼요정과 삼요정 복원기념비


  원촌전투지


원촌전투지, 갑오동학혁명기념비


  장수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보은집회에 참여한 장수지역 교도의 수가 230명가량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1차 봉기 당시 장수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백산대회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적지 않은 수의 농민군이 장수지역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재봉기 당시 장수지역 농민군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는 황내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내문은 운봉의 박봉양이 가산을 지키기 위해 잠시 동학에 입도하였을 때 그를 받아들인 접주이기도 했다.


  집강소시기에 장수지역 역시 김개남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남원지역의 농민군들이 방아치와 관음치, 여원치 등지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농민군에게 패한 후 열흘 정도 지난 11월 26일, 황내문이 이끄는 농민군들은 후퇴하였던 남원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운봉을 공격하기 위해 원촌까지 진격해 있었다. 당시 남원성을 공격하기 위해 운봉 현감 이의경과 함께 출진해 있던 박봉양은 이의경에게 운봉으로 돌아가 성을 수비하도록 하고 자신은 민보군을 이끌고 농민군 주둔지 근처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11월 27일 새벽 박봉양 민보군의 기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고, 민보군이 접근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농민군은 급히 기습에 대처하였으나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장수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를 끝으로 장수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수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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