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2018년 7월 12일(목) 13:00
장소: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사무실
대담: 김창남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문) 이사장님 반갑습니다. 유난스러운 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이사장님의 소개와 함께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창남입니다. 우선 우리 장흥기념사업회가 정신선양사업을 활력 있게 잘 추진해야하는데 상당히 답보상태에 빠진 것 같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장흥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기념관 운영에 국비가 지원되지 못한 상태에서 전남 도비와 장흥 군비만으로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가 장흥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기 전에 전라남도 도의원 3선으로 도의회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도의원으로 활동하던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장흥지역의 농민단체 등과 연계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 활성화를 위한 기반구축에 나름대로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석대들전적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였고,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장흥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된 것은 언제였는지요? 장흥석대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우뚝 서 있는데, 기념탑을 92년에 준공했죠?
답) 1990년대 초부터 기념탑 건립사업을 추동하여 기념탑을 1992년도에 준공하였습니다. 이 일에 우리 장흥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과 장흥농민회, 농업경영인회 일부 회원들이 함께 힘을 모으면서 자연스럽게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임의단체로 창립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다가 2013년 4월 전라남도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승인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 창립 이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앞에서 매년 기념식을 추진해온 것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기념탑을 세운 후 장흥기념사업회에서 지속적으로 매년 기념식을 거행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 115주년이던 2009년도에는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주최로 전국 기념대회를 장흥 탐진강변에 특설무대를 설치하고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어쨌거나 기념식은 매년 지속적으로 펼쳐왔습니다만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그 위상을 제대로 알리는 것에는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힘을 모아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 역사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문화예술사업과 정신선양사업, 학술발표 및 편찬사업 등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역사지식과 그에 대한 깨달음을 청소년들에게 전승시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기념사업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차원에서 장흥기념사업회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답) 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선조들이 남긴 역사에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기억하게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현대사회가 워낙 급변하다보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일은 한시도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장흥기념사업회에서는 앞으로 전라남도교육청은 물론이고 시·군 교육지원청 등과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계절학기 등을 적극 활용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청소년들 스스로 발 딛고 있는 우리 지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다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해나갈 생각입니다.
문)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군과 관군은 토끼몰이식으로 동학농민군을 서남해안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지리산이나 대둔산 등지에서 소백산자락, 그리고 다시 태백산자락으로 숨어들면 장기전이 될 수도 있고, 북녘으로 올라가서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역으로 숨어들면 자칫 국제문제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일본군이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서남해안으로 동학농민군을 밀어붙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장흥은 3만여 명의 농민군이 모여 참전한 전투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답)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우리가 무엇을 놓쳤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장흥석대들전투는 장흥지역 농민군만의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장흥지역의 접주들도 많았고, 장흥지역 농민들도 상당부분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더하여 화순 이앙, 능주 쪽에서 내려온 농민군과 나주 쪽에서 내려온 농민군, 순천과 보성 쪽에서 밀려온 농민군 등이 합세하였습니다. 충청도나 경상도 등지로부터 우금치전투에 참전했다가 후퇴를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오를 이룬 동학농민군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석대들전투를 앞두고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은 이규태 부대가 나주 쪽에서 장흥으로 들어왔고, 이두황 부대는 순천과 보성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왔습니다. 일본군이 공주우금치에서 패전한 동학농민군을 철저하게 서남해안으로 몰아붙인 이유가 있었을 것임은 짐작했지만 그러한 전투전략이 있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그렇게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다 하고 농민군을 토벌했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도리어 그 일본군에 편제되어 동학농민군을 궤멸시키는데 힘을 보탰으니 참 안타깝기 짝이 없네요.
문) 네. 장흥석대들전투는 주력부대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사기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의기투합한 농민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이 치밀하게 계산하여 몰아붙인 전투인 것 같습니다. 장흥석대들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장흥석대들전투가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일반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은 공주우금치에서 전봉준 장군의 부대인 주력부대가 패배하면서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일본군의 신식무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큰 희생을 치루었지만 그 이후로도 전북 원평의 구미란전투, 그리고 지금의 정읍인 태인전투 등을 통해 재기를 위해 때마다 기회를 살리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봤을 때 장흥석대들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남해 바다를 등지고 말 그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펼친 격전이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석대들전투에서 또다시 일본군의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군이 처절하게 패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놓일 수 없다지만 장흥석대들에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게 패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로 들어가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 역사는 사뭇 달라져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문) 장흥부를 점령하기 위해 벌어졌던 장흥지역의 전투들과 그 밖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장흥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는 석대들전투가 가장 대규모 전투였지요. 석대들전투 이전에는 벽사역, 장령성, 강진성, 강진병영 등지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장흥지역의 전투 중에 특기할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다른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대체적으로 관의 수장인 군수나 부사가 다 도망을 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흥의 부사 박헌양은 아들과 같이 성을 지키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합니다. 부사나 그 장졸들의 태도가 여타 다른 지역과는 사뭇 달랐다는 점입니다. 당시 박헌양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방언 대접주와 동문수학했던 친구지간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기억에 남는 부분입니다. 이런 사정이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요. 지금도 한쪽에는 박헌양 장흥부사와 그 장졸들의 위패를 모시고 영면을 기리는 ‘영회당(永懷堂)’이라는 사당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동학농민군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습니다. 이처럼 장흥지역의 독특한 지역정서로 인하여 기념탑을 건립하고도 제막을 못하다가 1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제막식을 거행하게 된 배경이지요.
문) 저는 장흥지역이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여건에 대하여 사고의 전환을 기해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화합과 상생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1894년 당시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던 이방언 대접주와 장흥 지역사회의 한 축이었던 유림의 김한섭은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잖습니까? 이점을 흑백논리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을 현재화하여 화합과 상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념사업을 기획·추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우리 장흥기념사업회에서 그런 논의를 여러 번 했습니다. 우리 장흥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기념탑에서 기념제를 올리는데, 그 무렵인 매년 3월 영회당(永懷堂)에서 박헌양과 그 장졸들의 순절을 기리는 제를 올립니다. 아직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앞으로는 장흥기념사업회 회장인 제가 영회당 제사에 참여하여 잔도 올리고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갑오년 때는 서로 총칼을 겨누었던 지역의 유림세력이나 동학농민군이 각기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는 충(忠)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후대들은 서로 화합과 상생의 덕목을 찾아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문) 살아가면서 가치관, 세계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누구나 다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갑오년 당시에 서로가 반대편에서 적으로 대했다고 하여 후손들까지도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영희당 제사에 기념사업회 대표자가 참여하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 영회당 대표가 참석한다면 그 또한 뜻깊은 일일 것 같습니다.
답) 맞습니다. 처음에는 어렵더라도 영회당 제사 모실 때 참석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실천해나갈 생각입니다.
문) 장흥석대들전적지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는 것에 보이지 않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분들이 계실 텐데....
답) 석대들전적지를 국가사적으로 승격시키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신 분은 소설가 한승원 선생님과 박준영 전 전라남도지사님입니다. 한승원 선생님이 박준영 전 지사님께 동학농민혁명 당시 석대들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면서 국가사적으로 등재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이에 박준영 전 지사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가사적이 지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라남도와 장흥군 담당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업무를 추진하여 성사가 된 것입니다.
문)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임기가 2년입니다. 임기가 지났지만 다시 연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두고 싶은데 후임으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직을 맡고 있습니다. 장흥지역의 역사적 정체성 정립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인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업을 추진해나갈 생각입니다. 기념재단에서도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