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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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 33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겸호의 손자 이정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겸호의 손자 이정신



 

문)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제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집안 형님 중에 이동흠이라는 분이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등에서 활동하셨어요. 원칙적으로는 참여자 이자 겸자 호자 할아버지 직계후손인 큰집 손이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분이 너무나 등한시하는 바람에 작은집 손이 활동을 하신 것이지요. 저는 이동흠 형님 권유로 10여 년 전 함께 다니다가 동학농민혁명을 알게 된 것이고요.



 

문) 유족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신 내용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제가 장흥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맡은 것이 여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건립할 때부터니까 금년으로 벌써 6년째네요. 현재는 지난 해 문화체육관광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마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직을 맡고 있으면서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지역의 대접주로 활동하셨던 이방언 장군님의 증손자이신 이종찬 선생님께서 작년에 돌아가셨지요? 그분께서 살아생전에 장흥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은 물론이고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오래 맡아서 고생하셨는데, 고인이 되신 이종찬 회장님과 같은 집안인가요?


답) 그래요. 이종찬 회장님과는 같은 집안인데 촌수는 좀 멀지만 형님이 되시지요. 이종찬 회장님하고 몇 년간 어울려 다녔어요. 그러던 차에 언젠가 뜬금없이 저에게 ‘네가 내 뒤를 이어서 장흥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맡았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자격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유족회를 이끌고 나가겠어요. 못합니다.’라고 했더니 막무가내로 몇 월 며칠 어디로 나오라더군요. 약속한 날 그곳에 나갔더니 그 자리에 함께 나오신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님들께 ‘제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과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함께 맡고 있어서 이 동생한테 유족회 회장직을 넘기려고 합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러자 이사님들이 박수를 치는데... 공식화된 마당에 하는 수 없이 유족회 회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오게 되었어요. 돌아가신 그 양반에 비하면 저는 참 부족한 게 많아요. 그분이 유족회 회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이사직은 계속 맡으셨어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직이 임기만료가 되었을 때 김창남 현 이사장님한테 넘기셨는데, 그 무렵 건강이 무척 안 좋아지셨습니다.



 

문) 이종찬 회장님은 이방언 장군 후손이신데, 선생님 조부님께서는 이방언 장군님과 본관이 같은가요?


답) 본관이 인천 이가, 같은 집안이에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이방언 장군님과 같은 집안이라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한 건 전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때 신청한 분이 앞전에 말씀하신 이동흠 형님이신데, 직계 형님이십니까?


답)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의 동생, 그니까 숙부님의 아들인데 저랑은 항렬이 같은 사촌 형이에요. 이 겸자 호자 할아버지는 아들을 4명 두셨는데, 제일 위 백부님, 그 다음이 제 아버지이고, 아버지 아래 동생이 이동흠 씨 아버지이고, 네 번째 막내아들이 광주에 사시지요. 백부님께 아들 형제가 있는데 동학에는 무관심하셨어요. 그러니까 숙부님 아들 이동흠 씨가 유족회 모임에도 참여하고, 참여자 신청서도 제출하고 그랬지요. 이동흠 형님은 저와 같은 방계손이에요.



문) 이동흠 그 어르신도 지금 장흥에 살고 계시나요?


답) 아니에요. 작년에 작고하셨어요.



문) 저런, 그럼 작년에 장흥지역에서 이종찬, 이동흠 두 어른이 돌아가셨네요. 참여자 유족들 중 손(孫)이나 증손(曾孫)분들이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이에요.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아요.


답) 그래야지요.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까 우리 유족회 회원 모두가 고령이어서 유족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증손자, 고손자 되는 우리 자식들은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관심 가질 틈도 적고, 그럴 마음도 부족하여 더욱 걱정이에요.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하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제출하신 신청서를 보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석대들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부용산으로 피신했다는 내용이 있던데, 그 부용산은 어디에 있는 산인가요?


답) 장흥석대들에서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이 바로 부용산입니다. 동학농민군이 석대들전투에서 패배하여 한 부대는 부용산으로, 또 다른 한 부대는 천관산으로 몸을 피했다가 재기를 모색하려 했대요. 석대들에서 강진 방향에 서 있는 게 부용산이고 그 산을 넘어 우뚝 솟은 산이 천관산이에요. 부용산은 장흥과 강진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부용산은 명산이어서 옛날에 이곳 어른들은 ‘약다산’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문) 부용산으로 피신하게 된 얘기에 대하여 좀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조부님께서 석대들전투에 참전하기 전날 밤 화승총을 받았대요. 당시 동학농민군이 확보하고 있는 화승총이 많지 않아 전투에 참가하는 농민군 전체에게 지급한 것은 아니고 농민군 중에서 체격조건이 좋고 몸이 날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했대요. 좌우간 조부님께서 화승총을 받았는데, 총알이 나가는 사거리나 총의 성능이 일본군 자동소총과는 비교가 안 되었대요. 화승총은 기껏해야 논다랑이 건너편 정도, 그러니까 100미터도 채 안 될 뿐만이 아니라 한번 총을 손 후 매번 총구에 불을 붙여야 하니 자동소총을 들고 있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상대가 되었겠어요? 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석대들전투 때 논둑에 몸을 숨기고 엎드려서 화승총을 쏘면 총알이 고작 논배미 끄트머리에 떨어진대요. 사거리가 너무 짧다는 얘기예요. 아무튼 석대들전투 전날 밤 농민군 지도부가 어산에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어산 지역에서는 조부님 혼자 회의에 참여하셨다고 해요. 어산이라는 곳은 지금의 어산리(語山里)를 말하는데 행정구역상 어동(語東)과 어서(語西)로 나뉘어져 있어요. 조부님께서는 당시 어서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어산에서 회의를 한 후 다음날 새벽에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로 가서 전투에 참전하셨는데 거기서 일본군과 관군 등 연합부대에 크게 패배하여 바다 쪽으로 피신하던 중 부용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농민군들이 부용산이나 천관산, 남해바다 섬들로 숨어들었다고 해요. 하여간 석대들전투 후에도 부용산에서는 한동안 밤낮으로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해요. 왜놈들이 부용산까지 쫓아가서 농민군을 토벌한 것이죠.



문) 그러니까 전투에서 패배하여 피신한 농민군을 일본군과 관군이 쫓아다니면서 찾아내 살육을 감행한 것이지요?


답) 그렇지요. 일주일쯤 후에야 총소리가 멎고 조금 잠잠해졌다고 해요. 석대들전투 이후 당숙님들 생각에 동생인 조부님이 당연히 죽었을 것으로 여기고서 동생 시신을 찾아 짊어지고 내려오려고 바지게를 지고 부용산을 헤맸대요. 그런데 저만치에서 조부님이 화승총 한 자루를 손에 들고서 산을 내려오고 있더래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지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조부님이 그러시더래요. 왜놈들에게 밀려 부용산으로 들어간 후 토벌하러 온 왜놈들과 몇 날 며칠 밤낮으로 쫓고 쫓기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조부님이 부용산에 있는 절로 숨어들었고, 그 절간까지 토벌대가 들어왔지만 그곳 주지스님이 지혜롭게 대처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요.



문) 그러니까 조부님께서 석대들전투 이후에도 살아남으셨던 거네요? 그 이후 조부님께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돌아가셨는지요?


답) 84세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인데도 조부님이 돌아가신 걸 기억해요. 생전에 뵙기는 했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주위 사람들이 얘기해줘서 알았지 정작 조부님께는 들은 얘기가 없어요. 우리 숙부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부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항상 화승총을 고방의 찻그릇 뒤에다 숨겨놓았대요.



문) 석대들전투 때 조부님께서 사용하셨던 화승총을 말씀하신 건가요?


답) 그렇지요.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살림까지 모조리 싹 몰수를 당해버렸는데, 화승총은 어찌어찌 숨겨서 고방에다가 감춰두었다고 합니다. 조부님이 돌아가신 후 화승총 행방이 묘연했는데, 나중에 우리 형님이 이전에 살던 집을 헐고 다시 집을 지을 때 아래채 마루 밑에서 화승총이 나왔어요. 그런데 개머리판 이런 곳들은 썩어서 없어지고 총열만 남아 있었어요. 그 총열이 바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지금 전시되어 있는 그 화승총의 총열이지요.



문) 그렇군요. 전시된 화승총 총열에 대한 역사에 대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의해서 참여자와 그 유족 등록이 진행되다가 중단되었어요. 그래서 지난 연말에 다시 참여자와 유족을 등록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개정하여 그 후속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월부터는 다시 참여자와 유족 등록업무가 재개될 것 같습니다.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님을 맡고 계시니까 이런 저런 정보들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등록이 재개되면 등록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요?


답)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장흥지역에는 다수(多數) 있습니다. 그동안 쉬쉬하면서 얘기도 못하고 살았던 분들이 많죠. 제가 아는 분 중에 장흥군 안양면 면지(面誌) 기록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때 참전하셨다가 희생된 분이 있더라고요. 또 전남 여수에 살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의 증조부 님이 동학농민혁명 때 전사(戰死)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요. 아마도 부용산의 부용사라는 절에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족보의 기록을 근거로 예전에 참여자 및 유족 등록을 신청했는데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심의위원회가 다시 운영되면 자료를 보완해서 다시 신청한다고 하셨어요. 참여자 및 유족 등록이 재개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청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 등록업무가 재개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관련 근거들을 찾아서 신청할 수 있도록 주변에 많이 알리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답) 그래야지요. 어떤 학자들은 갑오년 전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희생된 분들이 3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현재 등록된 참여자와 그 유족은 턱없이 적지요. 1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탓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할 것 같습니다.



문)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맡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데 장흥지역 기념사업이나 유족회 활동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씀이나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전국동학농민혁유족회는 작년에 문체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았어요. 이제 법인으로 정식 등록이 되었으니까 자립으로 법인 운영을 해나갈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족회가 한 단계 발전을 한 것이니까 우리 유족회 회원 모두 더 노력을 해야겠지요.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중요시 여기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기념재단이나 전국의 기념사업단체와 유족회는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에요. 안타까운 것은 서로 형제처럼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서 오순도순 지내도 모자랄 판에 서로 헐뜯는 상황이 간혹 감지되어 참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내놓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유족회 내부적인 갈등이 꽤 많아요. 그럴 정신과 시간에 유족회 임원진이 스스로 힘을 모아 중앙부처를 찾아다니는 등 본질적인 것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문) 네, 회장님.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별히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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