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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 33호
신동엽문학관 김형수 상임이사 인터뷰

신동엽문학관 김형수 상임이사 인터뷰


일 시: 2018년 8월 29일(수) 11:00

장 소: 신동엽문학관(충남 부여군 부여읍)

대 담: 김형수 | 신동엽문학관 상임이사



 

  이번 호 명사대담에서는 신동엽문학관 김형수 상임이사를 만났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문학평론가인 김형수 상임이사는 한국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하였고, 2015년부터 지금까지 충남 부여군에 자리한 신동엽문학관 상임이사를 맡아 신동엽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와 전시 등 다양한 사업들을 기획·추진하고 있다.


<경력> 한국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중앙대 문창과 겸임교수, 신동엽문학관 상임이사 등


<저술> 시집 : 『아침 이슬 두 말』(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빗방울에 대한 추억』(문학동네, 1995), 『가끔씩 쉬었다 간다는것』(푸른숱, 1991) 등

소설집 : 『조드』(자음과모음, 2012), 『이발소에 두고 온 시』(문학동네, 2003), 『나의 트로트 시대』(실천문학사, 1997) 등

평론집 :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아시아, 2015),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아시아, 2014), 『흩어진 중심』(자음과모음, 2010), 『옷자락의 그림자까지 그림자에 스민 숨결까지』(문학동네, 2008) 등

산문집 : 『바람이 지우고 남은 것들』(자음과모음, 2013), 『동요하는 배는 닻을 내려라』(살림터, 1992) 등.

평전 : 『문익환 평전』(다산책방, 2018), 『소태산 평전』(문학동네, 2016)



  신동엽 시인은 1930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전주사범과 단국대학교 사학과,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9년 「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하여 시집 『아사달』을 간행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 주제 시극(詩劇)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66)을 집필하여 상연(上演)하기도 했다. 특히, 1967년 발표한 시 「껍데기는 가라」와 장편서사시 「금강」은 동학농민혁명을 모티브로 한 시 작품의 대표적인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 반갑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은 한국작가회의로 개명(改名)하였지만 개명이전 한국민족문학작가회의 때 사무총장을 맡아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이곳 신동엽문학관 상임이사직을 맡고 계시는데, 먼저 상임이사님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문 시인, 오랜만이에요. 작가회의 모임이 아니라 신동엽문학관에서 이렇게 만나니까 또 새롭네요. 내 영혼의 조국이 백제예요.(웃음) 이제 몸에도 제법 부여 물이 스며든 것 같아요. 사실 젊음을 송두리째 5.18 물살에 쓸려 다닌 셈인데, 10년 전 작가회의 일을 끝낼 때 나의 젊음도, 또 공동체를 위한 당번 기간도 일단 끝냈다고 생각했네요. 그리고 좀 쉬었는지 어쨌는지, 하여튼 신동엽 시인에 매달린 건 5년째예요. 그 분의 짧고 강렬한 생애에 저희 세대가 빚을 졌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존경의 마음을 바치는 일로, 또 한편으로는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는 일로 여기고 있어요. 내년이 50주년이라 요즘에는 그 생각에 골똘해 있네요.



 

문) 우리 재단의 소식지 『녹두꽃』은 인쇄본과 웹진(e-Book)으로 제작되어 5천여 독자들께 배포됩니다. 이번 호를 받아보실 독자들께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신동엽문학관의 관련성에 대해 다소 의아해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1967년에 발표된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해에 발표된 장편서사시 「금강」이 동학농민혁명을 모티브로 창작된 문학작품으로는 한국 현대시단에서 대표적인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점에 대한 얘기를 시작으로 대담을 이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답) 네, 신동엽은 전주사범학교를 마친 후 단국대학교 사학과와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어요. 사학(史學)과 문학(文學)을 함께 전공한 셈인데, 사실 신동엽 정신이 캠퍼스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거예요. 한 인간의 정신이 직조되는 과정을 단순화하기는 아주 어렵지요. 특히 신동엽처럼 근대 문명과 등지는 궤적을 그렸던 정신을 제도적 틀로 해석하는 것은 좀 잘못일 수도 있어요. 제가 어떤 자리에서 신동엽에 의해 ‘역사의식’이라는 낱말이 사회과학 용어에서 문학 비평용어로 옮겨왔다는 표현을 했더니, 역사의식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 흔하게 사용되는 비평용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아마 저처럼 보는 게 맞을 거예요. 문학에는 모든 용어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미학적 틀로 자리 잡는 현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봐요. 한국의 민족문학 운동이랄까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운동 같은 또 다른 의지가 거기에 숨어 있는 건데, 신동엽에게서 중요한 점은 그가 우리의 토착사상으로서의 동학사상(東學思想)에 주목했다는 점이에요. 그가 말하는 역사의식에는 마르크스주의 등 근대 철학사조에 내재된 ‘역사발전’ 혹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따위와는 종자부터 다른 내용이 담겨 있잖아요. 「껍데기는 가라」 서사시 「금강」은 후천개벽의 눈으로 읽는 ‘동학의 뒷이야기’라고 봅니다.



 

문) 한국문단에서 최초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발표된 시 작품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직후인 1947년 「연간조선시집」에 발표된,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고부 두승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우리나라는 심각한 좌우대립과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으로 점철되면서 심각한 정치적 혼란기를 맞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하는 문학작품 창작·발표 또한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1966년부터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하는 신동엽 시인의 시 작품이 창작·발표되기 시작합니다. 이 무렵 신동엽 시인의 활동 등에 대해 얘기해주십시오.


답) 신동엽 시인은 1959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어요. 당시에 양주동 선생이 본심을 봤는데, 사실은 예심위원인 박봉우 시인이 떼를 쓰다시피 했다는 회고담이 있어요. 바로 이듬해에 일어난 4.19 때 삼총사가 하근찬, 박봉우, 신동엽인데, 이들을 제2차 전후세대라 불러도 됩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폐허 위에 서 있었던 작가세대 안에서 사회적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또 다른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 이루어진 거죠. 그 후에 등장하는, 소위 4.19 때 시위학생이었던 세대들은 서구 시민사회를 민주주의적 이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요. 하여튼 전후세대와 4.19세대 사이에 낀 일군의 저항문학 세대가 신동엽 세대인데, 아마 그가 동학을 시로 쓴 이유는 무엇보다 그 시대정신의 영향이 크겠지요. 가령, 조정래는 여순사건의 기억을 감춰두고 있다가 5.18을 보면서 『태백산맥』을 구체화시켰다고 술회합니다. 신동엽도 그랬을 거예요. 이미 1959년에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 의지를 그리고 있고, 또 1960년 메모에 동학에 관한 대작을 구상한 흔적이 있습니다.



문) 신동엽 시인의 동학농민혁명 장편서사시 「금강」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신은 4.19 때 형성된 사회적 비판의식이 5.18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습득해가는 우리 사회운동의 궤적과 조금 다른, 서구적 근대를 지향하기보다는 도리어 서구적 근대를 거부하면서 우리 민족 혹은 동양적 근대를 추구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강」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전경인사회(全耕人社會)에 대한 지향 등에서 서구적 근대 그 너머 온전한 근대를 추구하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신동엽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장편서사시 대작(大作)을 구상한 것에 특별한 근거가 있는지요?


답) 신동엽은 서울에 갓 상경해서 4.19를 겪었고, 공업화의 노정을 따르는 서구 근대문명의 광폭한 행보를 목격했어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처음부터 혁명적 열정을 노래하며 등장한 그가 노동운동이랄까 혹은 민중운동이랄까 하는 것의 산업 사회적 문제의식을 의도적으로 건너뛰고 있다는 점이에요. 데뷔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 나오는 “나는 원시(遠視) / 그래서 당신은 멀리 있어야 잘 생각난다.” 같은 표현들이 토착사상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어요. 어쩌면 그에게 4.19 정신의 ‘가지 않은 길’이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죠. 특히 근대인들의 시야가 좁은 ‘전문화의 동굴’에 갇혀 있다고 보았던 ‘탈근대론’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그걸 대작을 구상한 흔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작성년도가 불분명한 메모 때문인데, 1956년 가을에 『동경대전』 『대순전경』 『회천기』 『초적』 『전라산천』 『동학과 동학난』 『이용구전』 등의 자료조사를 착수하겠다는 메모, 또 1960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1962년 여름에 현지답사를 하겠다는 메모가 있는데 그 대상이 호남지방, 속리산 지방, 설악산 지방, 금강 연안지방이에요. 단편 서정시를 쓰면서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현지답사와 관련 기록들을 조사하려고 하지는 않죠.



 

문) 신동엽 시인은 동학농민혁명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를 비롯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적 형상화를 기한 작품을 많이 창작·발표하였습니다. 특히 신동엽 시인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주제 시 작품으로는 「껍데기는 가라」를 비롯하여 장편서사시 「금강」이 있고, 시극(詩劇)으로 국립극장에서 상연(上演)된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 세계 혹은 시 정신을 동학농민혁명과 연계하여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고구려를 비롯한 역사적 언술들은 토착사상의 무대를 염두에 두면서 은유적 대칭언어로서 자주 사용한 게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동엽 시인은 4.19 이전에 이미 후천개벽을 그리고 있고, 데뷔작에서부터 서구적 근대의 길에 문제제기를 하며, 원시반본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후천개벽의 전사(前史)를 백제 패망 이후의 미륵신앙의 시대로 보고, 이것이 수운(水雲)에 의해 하나의 토착적 사상으로 탄생하여 이후 증산 강일순의 시대, 소태산 박중빈의 시대를 거쳐 왔다고 보는데, 신동엽에게서는 강증산 시대의 정신이 엿보입니다. 시천주(侍天主)의 방향성을 원시반본으로 잡아가고 있는데, 저는 강증산의 원시반본 사상이 ‘천지공사’가 아닐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동엽의 시를 서양철학사의 눈으로 읽으면 매우 퇴행적인 경향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죽을병이 들었을 때 어린애 상태가 되어야 살 수 있다는 사상으로서 원시반본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해 보면 그는 인류가 근대문명을 따라가지 말고 되돌아서서 생명의 길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문) 신동엽 시인은 사학과 문학을 동시에 전공했을 뿐만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이 아주 지대했음을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을법한데...


답) 맞아요. 저는 이게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 신동엽은 등단도 하기 전에 이미 동학기행을 마쳤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생겼을 때 보행자들이 그와 함께 또 어떤 정신의 길을 걸을까 궁금했는데, 인간이 이렇게 길을 걷는 건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의 하나라고 봐요. 서적의 행간을 훑고 가는 것만으로 모든 학습이 완료될 턱이 없잖아요? 모든 지식에는 그것을 만들어낸 대지가 반드시 있는 법이지요. 신동엽의 동학순례는 「산에 언덕에」는 물론이고 한국전쟁을 노래한 「진달래 산천」 같은 시들에게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쳤어요. 이는 특히 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행적인데, 김남주 시인도 친구 이강과 둘이서 동학 진군로를 돌고 와서 최초 지하신문 「함성」지를 발간하고 문학의 길에 접어듭니다. 김진경, 이영진 등의 시인들도 동학 답사를 하고 와서 ‘5월시 동인’을 구성하지요. 신동엽은 동학기행을 통해서 역사의 육체를 보았던 게 틀림없어요.



문) 원래 신동엽 시인 부모님 고향이 부여가 아니라는 얘기가 있던데? 신동엽 시인의 부친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1894년 갑오년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뒤 부여로 숨어들었고, 그 후로 계속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어 신동엽 시인이 부여에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들었거나 알고 계신 내용이 있으신지요.


답) 예전 기록에 의하면 신동엽 시인의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혼자 경상도 쪽에서 부여 쪽으로 건너온 것으로 돼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어요. 나중에 신동엽 시인의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역사를 전해 듣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선 아드님인 신좌섭 교수의 시 한 구절을 읽어볼게요. “동학년 어느 날, 핏덩이로 어미 등에 업혀 부여에 숨어든 탓에 유난히 조상들을 그리워했던 할아버지.” 신동엽 시인이 죽기 전에 읽었던 책이 『대순전경』이었다는데, 어떤 말 못할 사연이 여기에 담겨 있는지 몰라요. 시를 더 읽어볼게요. “아들의 식민지 가난을 조상들을 대신해 미안해하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4대 독자 아들 젯밥을 남몰래 차례 상에 얹어야 했고, 덕분에 나는 열한 살부터 음복을 배웠어.”(신좌섭 「정월초하루」 일부) 알다시피 부여는 동학농민군이 슬쩍 피해간 곳이라 신동엽을 빼고는 동학농민혁명을 상상할 소재가 없어요. 다시 말하면 부여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숨어살기 좋은 동네인 셈이에요. 직선거리로 20킬로도 안 되는 곳에 우금치가 있는데 말이에요. 그렇다면 신동엽의 아버지는 우금치 전투에 참전한 동학농민군의 후예일 가능성이 매우 커요.



문) 21세기로 들어선 후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비상하게 높아졌습니다. 생계문제해결, 정보통신과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 등이 문화콘텐츠의 다양함과 활용성의 중요도를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현재화를 추구하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도 21세기 시대적 흐름에 맞는 문화콘텐츠 개발, 이를 활용하여 사업의 성과를 높이는 일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신동엽 시인의 장편서사시 「금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금강」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양되면서 「금강」을 원작으로 뮤지컬이 제작되기도 했고, 마당극으로 제작·공연되기도 했습니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동학농민혁명 대서사시 「금강」이 차지하는 위상과 신동엽 시인의 위상 등에 대해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신동엽의 서사시(敍事詩) 「금강」(錦江)을 문호근 감독이 가극(歌劇) 「금강」(錦江)으로 제작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공연을 하였지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문호근 감독은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지요. 세계사적으로 냉전이 해체되고 인터넷이 출현하던, 소위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말하던 시대에 일견 망각하기 쉬운 새로운 문명의 대안적 패러다임인 동학농민혁명 서사를 현대적 뮤지컬로 재현한 것은 문호근 감독의 꽤 각별한 업적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강물처럼 늘 새롭게 흐르고 있는 세월의 격랑 위에서 당대가 어떤 콘텐츠를 왜, 어떻게 재구축 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신동엽도 이런 측면을 심도 깊게 사유했고 예비했어요. 보세요. 4.19 직후 외래사조의 홍수 속에서 이렇게 노래해요. “백제, 예부터 이곳은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금강, 예부터 이곳은 썩고 대신에 정신을 남기는 곳.” 백제, 금강이 다 동학농민혁명의 서사로 다가가기 위한 좌절적 체험의 기호들인데, 감히 말하자면 디지털 세계에서는 ‘사라진 문명’이 언제나 ‘신화적 복원’의 거점이 됩니다. 저는 이를 모범적 사례라고 봐요.



문) 동학농민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살피는데 있어서 신동엽 시인을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농민군 공주우금치전투지 답사를 할 때 가능하면 1시간쯤을 할애하여 이곳 신동엽문학관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백마강 강변에 세워진 신동엽 시인의 시비를 찾곤 합니다. 대담을 통해 앞으로도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 추진에 있어서 신동엽의 문학정신과의 연계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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