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기봉진의 증손 기경도
일시 : 2024. 4. 18.(목) 14:00 ~
장소 : 광주광역시 서구 기경도 님 댁

 
이번 호의 유족 인터뷰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기봉진(奇鳳鎭 1860~1895) 님의 증손 기경도(奇坰度) 선생님을 모셨다. 참여자 기봉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곡성군에 거주하면서 동학에 들어가 1892년 봄 수백 호에 달하는 동학 조직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봉준 장군이 9월 10일경(음력) 삼례(三禮)로 나아가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척왜(斥倭) 2차 봉기를 단행했을 때 조재영(趙在英), 오정선(吳正善) 등과 참여하였다. 이후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고향 인근으로 숨어들었다가 체포되어 참수형(斬首刑)을 당하였다.
문) 이번 호의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기봉진 님의 증손 기경도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기경도입니다. 저는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살다가 1960년대 중반에 이사해서 지금까지 광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20년 5월 11일 정읍 황토현에서 제126주년 동학농혁명기념식이 열렸을 때 저의 증조부님 얘기가 영상으로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했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나 유족회의 회의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근년(近年)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문) 네, 유족회 회원분들이 대체로 연로(年老)하셔서 걱정입니다. 선생님 고향이 행주기씨(幸州奇氏) 집성촌인 곡성군 죽곡면 반송리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증조부님도 그곳에서 사셨죠?
답) 네, 반송리는 우리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곳입니다. 현재 주소는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반송길입니다. 지금은 우리 일가들이 도시로 이사를 나가기도 하고, 타성(他姓) 사람들이 이사를 와서 살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반송리에는 행주기씨만 살았습니다. 저도 그곳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년상(三年喪)을 모신 후에 광주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어요.
문) 선생님께서 태어난 해가 1948년이죠? 열일곱 살 때였으면 1965년, 아버님 삼년상을 모신 후 이주(移住)했다면 1968년도에 광주로 나오셨겠네요?
답) 계산을 안 해봐서 정확한 연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그럴 거예요. 광주로 나온 지 50년이 훌쩍 지났으니까요.
문) 선생님, 본관(本貫)이 행주(幸州)면 조선시대 때 아주 명문가(名文家)네요? 조선중기(朝鮮中期)에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성리학의 대가(大家)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그리고 조선후기(朝鮮後期) 순창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활동한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이분들과 같은 집안이네요?
답) 네, 제가 어렸을 적부터 집안 어르신들께 고봉 선생님과 노사 선생님 두 분은 대단한 분들이라는 얘기를 아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고봉 선생님은 퇴계 이황 선생님의 제자인데 스승님과 무려 10년간 편지로 성리학의 핵심 논쟁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사 선생님은 19세기 서양 오랑캐와 왜적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 아주 훌륭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문) 네, 맞습니다. 우리나라 천원 권 지폐 인물화의 주인공인 퇴계 선생님의 제자인 고봉 기대승 선생님은 대단한 성리학자죠. 또한, 성리학의 한 학파를 이룬 노사 기정진 선생님도 성리학의 큰 산이지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증조부님 출생 연도가 동학이 창도(唱導)된 1860년이니 노사 선생님과 증조부님 두 분이 살아계실 때 만남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 들은 얘기는 없는지요?
답) 있지요. 있다마다요. 아버지께서 제게 “너의 증조부께서 장성에 계신 노사 선생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증조부님과 집안의 동생이 함께 노사 선생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증조부님이랑 같이 배웠던 그 동생이 나중에 노사 선생님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의병장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문) 네, 그렇군요. 증조부께서 노사 선생님과 연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학자 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 선생은 『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라는 저서에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동학사상(東學思想), 개화사상(開化思想)을 19세기 조선의 3대 사회사상으로 듭니다. 19세기 조선은 대내외적 상황이 복잡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증조부님의 가계와 그 내력을 보면 동학사상보다는 위정척사사상 쪽에 더 가까운데 동학사상을 수용하셨기 때문에 여쭤본 것입니다.
답) 네, 그렇지요. 조선시대 성리학의 명문가였던 우리 집안의 내력으로는 위정척사사상 쪽이 더 맞지요. 삿된 사상을 배척하여 정교(正敎)인 유교의 나라 조선을 지켜나간다는 위정척사사상과 동학사상은 배척되지요. 더욱이나 조선왕조가 동학을 오랫동안 금했잖아요? 그런데 저의 증조부께서는 1892년 봄에 이미 수백 호에 이르는 동학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의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 네, 증조부께서 가르침을 받은 노사 선생님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골자로 상소를 올립니다. 그 상소가 ‘병인의소(丙寅擬疏)’인데 위정척사사상의 본원(本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당시 동학사상, 위정척사사상, 개화사상이 서로 엇갈리는가 하면 서로 부합한 측면이 있습니다.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동학농민군의 기치가 위정척사파 혹은 개화파와 반대되거나 지향점이 같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동학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은 왕조 개혁에서는 서로 반대지만 외세 배척에서는 서로 뜻이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학사상과 개화사상은 외세 배척에는 반대지만 왕조 개혁에서는 서로 뜻이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얽힌 당시의 사회사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증조부께서 동학에 들어간 연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 맞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들은 얘기도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맥락과 같아요. 증조부께서는 동학사상을 가르쳤지만 1차 봉기 때는 일어서지 않았답니다.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증조부께서는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세상의 기본이고, 사람은 곧 나라의 근본이다. 그런데 탐학한 관리들이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을 못살게 한다. 이는 나라의 근본을 해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난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래서 1차 봉기 때 증조부님은 봉기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1894년 여름에 일본군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국왕을 인질로 잡고 국정을 농단하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갓을 벗어두고 죽창 들고 일어섰다고 합니다.

문) 네, 아버님께서 선생님께 해주신 말씀이 지극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된 것은 선생님 혹은 다른 유족께서 신청서를 제출한 것이 아니지요? 『부구례군교구사』, 『천도교남원군 종리원』 등에 “포덕 삼십이 년 임진 춘(春)에 곡성군 기봉진 씨의 전도로 허탁, 임양순, 임태순, 조경묵, 우공정 제씨가 선도되야 포덕이 수백 호에 달하였다.”라는 기록과 『천도교백년약사』(천도교중앙총부교사편찬위원회, 1981, 245쪽)에 “그리하여 전봉준은 (1894년) 9월… 일제히 봉기할 것을 호소하고 태인을 떠나 삼례(三禮)에 대도소(代都所)를 정하였는데… 이때 호남 각지에서 기포한 중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곡성의 조재영, 기봉진, 오정선…” 이런 기록들이 확인되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심의위원회에서 직권으로 등록을 한 것이지요?
답) 네, 맞습니다. 신청서를 내서 등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다는 분들이 찾아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습니다. 그분들이 조사할 때 하신 얘기에 따르면 증조부께서는 상당히 일찍 동학에 들어갔답니다. 그분들에게 제가 아버지께 들은 얘기를 많이 해줬습니다. 하여간 전문가들이 조사하러 왔을 때 여러 가지 들은 얘기를 자세하게 해주었어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증조부님이 참여자로 등록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문) 앞서 말씀드렸던 기록에 따르면 증조부께서 1892년(임진년) 봄에 곡성과 구례 등지에 수백 호에 이르는 동학 조직을 지도하셨다고 하는데, 증조부께서 언제, 어떤 경로로 동학에 들어가셨는지 들은 얘기는 없는지요?
답) 예, 그런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너의 증조부께서 남원에 가셨다가 어떤 도인을 만나 동학의 도를 받으셨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너의 증조부님은 곡성군 오리지, 승범리는 물론이고, 섬진강 건너 구례 등지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동학을 가르쳤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증조부님이 집에 계실 때는 많은 사람이 집으로 많이 찾아왔다고도 하셨어요.
문) 호남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크게 두 줄기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4월 동학을 창도하자 경주 용담으로 사람들이 찾아왔고, 이를 수상히 여겨 경주 관아에서 관원을 시켜 감시했습니다. 그러자 수운 선생은 1861년 가을에 배를 타고 전남 여수로 건너옵니다. 이어서 여수에서 승주(지금의 순천)와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해 12월 그믐날 남원 교룡산의 은적암으로 들어가서 동학의 주요 경전들을 집필합니다. 이 무렵 임실, 전주 등지에 동학이 전파됩니다. 둘째는 1884년 6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이 익산으로 내려와 금마의 사자암(獅子庵)에서 4개월을 머물면서 동학을 전파합니다. 이렇듯 남원에는 아주 이른 시기에 동학이 전파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증조부께서 남원에 가셨다가 도인을 만나 동학에 들어가신 것 같다.”라는 내용은 아주 일리가 있습니다. 혹여 어머니께서 증조부님이 대접주였다거나 뭐 그런 유사한 말씀은 안 하셨는지요?
답) 접주였는지 대접주였는지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그 대신 ‘동학장군’이었다고 얘기하셨어요. 곡성에서 섬진강 건너편 동북쪽으로 구례가 있고, 구례 위쪽이 남원이잖아요? 그리고 서북쪽에 옥과와 순창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고을에 돌아다니며 동학을 포교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문) 네, 증조부님께서는 대접주였던 것 같아요. 동학의 조직 체계를 살펴보면, 처음 접제(接制)가 마련된 때는 1862년 말이었습니다. 이때 접은 대체로 50호 내외였고, 이는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경상도와 강원도 산간으로 숨어 다니면서 포교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충청도와 전라도로 동학 교세가 확대된 1880년 중반에 1백 호 혹은 2백 호 이런 큰 조직들이 생기면서 포(包)라는 조직 체계가 생겨났습니다. 포의 지도자를 대접주(大接主)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아마도 증조부께서 대접주였던 것 같습니다. 참, 선생님께서 2018년 봄에 반송리 앞에 증조부님 기념비를 세우셨지요? 그 기념비를 건립하게 된 경위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저의 생질(甥姪), 그러니까 저의 둘째 누님 아들 심성식이라고 있어요.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광주교육연수원장까지 지냈어요. 그 조카가 동학농민혁명 특별법도 제정되었으니까 이제 증조부님은 반란군 아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일을 하신 분이다. 그러니 그분을 기리는 비라도 세워야 한다면서 곡성문화원 등에서 여러 자료를 가져왔어요. 그래서 2018년에 반송마을 앞에 ‘동학혁명 의병장 기봉진 장군 기념비’를 세웠지요. 사실 말이지 예전에는 집안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내놓고 말하지 못했어요. 그 반대였지요.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더욱이나 우리 집안에서는 증조부님 생전의 행적에 대해 감추려는 분위기가 강했으니까요. 그러다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가 기념일까지 제정되어 달력에도 나오고, 정부에서 매년 기념식까지 개최하니까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 동학혁명 의병장 기봉진 장군 기념비 앞에서 증손 기경도 외 가족들
문) 네, 너무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증조부께서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주력군과 함께 후퇴를 거듭하다가 11월 25일 원평 구미란 전투, 27일 태인 전투에서도 패하여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지요?
답)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증조부님을 스승님, 스승님 하면서 따랐던 제자가 은신처를 밀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답니다.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후 후퇴하면서도 계속 싸웠대요. 그렇게 해서 고향 쪽으로 내려왔는데, 집으로 곧장 들어오면 잡힐 게 뻔하니까 고향인 반송리로 들어오지 않고 오공면 승범리와 침곡리 사이 산자락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있었대요. 그곳은 눈앞에 오지리가 있고, 저 멀리 남원 들녘이 다 내려다보이는 경계하기 좋은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오지리에 사는 정 참봉이 그 집안사람 중에서 증조부님을 따르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기봉진의 은신처를 고발해라. 그럼 너는 동학에 가담한 죄를 덮을 수 있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제자가 증조부님 은신처를 밀고하여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스승님으로 모셨던 사람을 저 살자고 사지로 밀어넣다니… 밀고한 정 참봉 집안을 잘 알아요. 오지리 정 참봉 그러면 친일파로 아주 명이 난 집안이에요. 그 집안의 자손(子孫) 중에 정 아무개는 육군 대장, 국회 의장 등을 지냈지요.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나라와 겨레를 위해 애국자인 증조부님을 밀고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하여간 체포된 증조부님은 사흘간이나 나무에 매달린 채 잔인한 고문을 당했대요. 그래도 증조부께서 한치도 뜻을 굽히지 않자 1895년 2월 3일(음) 참형(斬刑),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증조모님이 달려가서 잘린 머리를 치마폭에 감싸고 30리를 단숨에 걸어 고향으로 돌아왔답니다. 나머지 목 없는 시신은 증조부님의 3형제가 수습했답니다. 그렇게 고향 마을로 시신을 모셔 왔는데 문중 분위기가 워낙에 완고하고, 싸늘하여 선산의 증조부님 자기 자리에 묻지 못하고, 선산은 선산인데 아주 구석진 한쪽 구석에 묻었답니다. 나중에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듬해(1966)에서야 문중에서 회의를 열어 증조부님 묘를 증조부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고조부님 묘소 아래 원래 당신에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 모셨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 때문에 후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특히 일제강점기 때 선생님 집안의 사람이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려다가 거부당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후손들이 겪은 어려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일제강점기 때 곡성군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일곱 명이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가려고 했었답니다. 그때 참여자 기봉진의 손자도 일본으로 나가려다가 동학 괴수의 손자라고 출국이 거부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더 큰 고통은 정통 유림을 자처하는 우리 문중에서조차 증조부님을 반란군으로 치부하였으니…. 그 설움과 고통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나요. 그런데 지금은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혁명으로 평가하고, 참여자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니까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기경도 님과 부인
문) 네, 선생님. 2004년 특별법, 2019년 기념일이 제정되었습니다. 나아가 지난해에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 85건 중에는 증조부님의 활동상이 기록된 『남원군종리원사』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선생님께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마무리 말씀 겸하여 혹여 빠뜨린 얘기가 있으면 해주십시오.
답) 2019년에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승일 5월 11일이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어 매년 정부가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 행사를 준비해서 진행하는 기념재단에도 더없이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지요. 기념일 하루만이라도 모든 국민이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겼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렇게 멀리 찾아와서 긴 시간 동안 저의 중언부언을 경청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문) 네, 선생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