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학운의 증손 송기숙
일시 : 2024. 2. 19(월) 14:00 ~
장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기숙 님 댁
이번 호 유족인터뷰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학운(宋學運 1846~1939) 님의 증손 송기숙 선생님을 모셨다. 송학운 님은 1894년 봄부터 금산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겨울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후 고향 뒷산으로 몸을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1908년 기독교에 입교한 후 고향 금산에 개척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30년 동안 장로로 시무하다 1939년 93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1대(代) 참여자 송학운과 부인 파평 윤씨 2대(代) 아들 송철 3대(代) 손자 송전무 4대(代) 증손녀 송기숙문) 이번 호 『녹두꽃』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송학운(宋學運 1846 ~ 1939) 님의 증손 송기숙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선생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학운 님의 증손자 송기숙입니다. 저는 인삼과 깻잎 생산지로 유명한 금산에서 태어나 서울과 대전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주중에는 대전, 주말에는 금산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행정학 겸임교수로 근무하였으며, 현재 정부 기관의 각종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된 후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기념재단의 여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13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기 때문에 기념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하려고 합니다.
문) 선생님의 증조부께서 마흔여덟 살이던 1894년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지요? 금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두 축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 축은 1894년 3월 초순 금산·진산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금산 관아를 점령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10월 22일부터 금산의 부소암과 소라니재(松院峙) 일대에서 김개남 부대와 관군·민보군이 사흘간에 걸쳐 벌인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증조부님이 일찍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역사학계에서는 금산지역에 본격적으로 동학이 전파된 때를 18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1887년에 충청도 황간(皇澗)의 조재벽(趙在壁)이라는 사람이 동학에 입도하여 옥천, 영동, 청산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90년 무렵부터 포교 활동을 금산과 진산을 비롯하여 인근의 고산과 용담 지역으로 확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금산관아터(충남 금산군 금산읍 인삼로 69 (금산초등학교)) 금산 제원 동학농민군 기포지(충남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200-8 일대)1894년 3월 12일과 12월 8일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금산지역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1894년 3월 8일 최초로 집결한 곳이다.
금산 소라니재 김개남군 전투지(충남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산 22-1 일대)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과 금산지역 민보군 간에 1894년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문) 네, 그렇습니다. 조재벽(趙在壁)은 충청도 옥천과 황간 등지에서 활약한 대접주입니다. 충청도 황간, 영동, 청산, 진산은 물론이고, 전라도 금산과 고산, 용담 등지까지 포교 활동을 벌였던 조재벽 대접주는 1892년 10월 공주집회, 11월 삼례집회 그리고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와 3월 보은취회(報恩聚會) 때 많은 교도들을 인솔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증조부님이 이 분의 영향을 받아 동학농민군이 되신 거죠?
답) 네,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아마도 증조부님도 조재벽 대접주와 함께 1890년대 초기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염두에 두어야 할 대목은 금산과 진산이 동학 교단 내에서 종교적 지향보다는 사회 변혁적 지향이 강했던 서장옥 대접주 세력의 근거지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현의 『오하기문』에도 “법포(法包)와 서포(徐包)가 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법포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포를 뜻하고, 서포는 서장옥 휘하의 이른바 호남의 대접주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의 세력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으로 봤을 때 호남 농민군이 3월 20일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하고 일어섰는데, 이보다 열이틀이 앞선 3월 8일과 9일에 금산·진산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는 사실에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문) 네, 맞습니다. 금산지역 동학농민군은 이른바 북접과의 연계성보다 남접 동학농민군과 연계성이 훨씬 높았던 것으로 보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증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 초기부터 동학농민군이 크게 패배할 때까지, 혁명의 시작과 끝까지 모두 참여하신 것 같습니다. 그해 겨울에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여 세력이 약화된 이후 고향 뒷산으로 피신하여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졌잖아요. 이때 가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요?
답)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농민군이 패배한 후 일본군은 물론 관군과 지역의 향반들이 조직한 민보군 등이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잡으려고 난리였답니다. 금산에서도 관아의 관원들이 나와서 집을 뒤지고 증조부님 식솔들 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다행히 증조부님은 고향 인근에 있는 경당리 마을 뒤편의 절골 혹은 산재날이라는 곳으로 피신했답니다. 이때 파평 윤씨인 저의 증조모님이 지혜롭게 대처를 잘하셨다고 합니다.
문) 금산군이 지금은 충청남도지만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라도였습니다. 대둔산 입구에서 서북쪽으로 나아가 이치 고개를 넘으면 금산군입니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곳이라 혁명 당시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죠?
답) 네, 지금은 교통편이 차량 중심이잖아요? 혁명 당시에는 말(馬)이나 도보(徒步)가 이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도로 여건 등이 지금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죠. 당시에는 금산이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충이고 당시에는 대둔산을 호남의 관문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대둔산을 지나 이치를 넘어 금산, 진산, 공주 이렇게 올라갔잖아요? 그래서 임진왜란 때 군량미(軍糧米) 확보를 위해 일본군이 호남을 점령하려고 할 때 권율 장군과 금산의 의병들이 이치(梨峙)에서 일본을 크게 물리쳐서 침략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이렇듯 금산이 지리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주요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때도 금산을 아주 중요시했던 것 같습니다.
문) 동학농민군은 정규 군사훈련을 받고 근대적인 신무기까지 갖춘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를 극복하지 못한 농민군은 이후 처절한 죽임의 세월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증조부님이 금산의 산자락에 숨었고, 증조모님 등의 지혜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증조부의 삶은 어떠하셨습니까?
답) 저의 할아버지(송철)께서 남기신 회고록을 읽으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송학운 증조부님의 삶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회고록에 따르면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 실패 후 1908년에 기독교에 입교해서 고향에 개척교회를 세워 30년간 장로로 시무하셨고, 1939년 1월 4일 93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생전에 증조님은 당신의 아들이자 저의 할아버지이신 송철 님을 선교사가 세운 전주 신흥학교로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즉, 증조부님은 시대의 변화를 미리 읽고 대처하신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 참여한 사실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십시오.
답)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저의 조부님(송철, 1896~1986)이 남긴 『송철회고록』(1985년 간행)을 통해 알았습니다. 이 회고록을 바탕으로 2006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참여자와 유족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참여 사실이 확인되어 등록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의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전략) 선친께서는.... (1894년)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였고, 혁명이 끝난 이후 1906년에 정토종 부회장(淨土宗副會長)을 거쳐 그 이듬해는 금산 청년회장으로 신문화 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셨다....(중략) 나의 선친은 요행히 탈출하여 생명을 건지셨으니 내 어머니께서는 막 태어난 핏덩어리와 같은 나를 업고 피난의 물결을 따라 그리고 남편을 찾아다니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셨다. 관군은 매일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을 찾아와서 선친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서릿발 같은 문초를 했다. 그러니 내 어머니께서는 그런 관군의 서슬에 얼마나 고생하셨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관군이 끝내 아버지를 잡지 못하자 아버지의 사촌 동생인 나의 오촌 당숙(末휘운)을 잡아다 태형으로 고문하면서 아버지의 행방을 캐물었다. ...(중략) 나는 선친께서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당신의 행방을 관군이 그토록 찾을 만큼 주동적 역할을 하신 데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학혁명군이 전주 점령 후 관군과 화의할 때 제안한 12개 폐정개혁 조목에서 나타나듯이 내 선친은 위대한 혁명가였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그 혁명가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 증조부님은 돌아가신 후 어디에 모셨는지요?
답) 집안의 선산인 금산군 부리면 질구지(선원리)에 모셨습니다. 이전에는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있었는데, 이장(移葬)하였습니다. 다른 마을에도 유사한 아픔이 있겠지만 불이리에도 큰 아픔이 있습니다. 1894년 겨울에 토벌군에게 쫓긴 동학농민군 10여 명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동학농민군을 숨겨주고 따뜻하게 보살폈다고 합니다. 이후 정보를 입수한 토벌군이 불이리에 들이닥쳐 숨어있던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학살하였고, 이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매년 위령제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당시 처참하고 긴박했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참여자들이 그러했듯이 선생님의 증조부님 또한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집안 내력을 보면 대대로 애국자 집안이신데요. 송학운 증조부님의 아들 (송철), 그러니까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또한 독립유공자이시죠? 증조부님과 조부님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독립유공자라 할 수 있는데. 할아버지 이야기도 좀 해 주시죠?
답) 네, 그렇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선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란 사건으로 왜곡되고, 참여자는 반란군으로 매도되잖아요. 혁명에 참여했던 후손들은 자기 집안의 어른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할아버지(송철)께서는 문집을 남기시면서 당신의 아버지 송학운 님이 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기록하셨습니다. 증조부님의 영향을 받은 할아버지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홍범식 금산군수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비분강개하여 그 길로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의 폭압이 하도 극심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여의치 않자 할아버지께서는 1916년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나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뿐 아니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총회장직을 맡아 활동하고 『한국의 소리』라는 언론지를 만들어 미국인들에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했습니다. 해방 후 국내 좌우대립과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때에는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구호물자를 마련하여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추진하셨습니다. 이런 활동이 확인되어 할아버지께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셨습니다.
문) 선생님의 집안 어른들께서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네요. 선생님의 집안은 물론 금산에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많은 역사와 인물들이 있는데요, 이런 귀한 내용들이 잘 계승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해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시급한 것은 금산지역에서 이루어진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9년에는 기념일이 제정되었습니다. 또한 지난해에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85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된 동학농민혁명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혁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동학농민혁명 = 전라북도 정읍’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현실입니다. 혁명에서 정읍이 갖는 가치가 크지만, 금산을 비롯해 전국에서 봉기한 것도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이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만민평등 세상을 이룬 대한민국 민주주의 뿌리이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반일 항쟁이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문)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빠뜨린 얘기나 추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답) 네, 100년 전에 옳았던 일은 100년 후인 지금도 옳습니다. 나아가 100년 전에 옳지 않았던 일은 100년 후에도 옳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 보국안민 정신은 100년 전에도 옳았고, 지금도 옳습니다. 때문에 100년 후에도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보는 관점도 같다고 봅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여 국왕을 인질로 잡고 국정을 농단하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동학농민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를 하루속히 바로잡아 주실 것을 정부에 요청합니다.
문) 네, 선생님. 바쁘신 가운데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다 잘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