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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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봄 59호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을 우리 가슴속에 새기는 작업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농민혁명을 우리 가슴속에 새기는 작업


임진택 이애주문화재단 상임이사


  올해 2024년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당시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과 민극협(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의 임원으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총괄기획하였고, 그 중 성과의 하나가 정읍시 일원에서 펼친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이다.


  나는 고향이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인데, 어렸을 적 우리 마을 이름이 접주리였다. 접주리라는 이름의 연원이 ‘배[舟]가 닿는다’는 접주(接舟)라는 뜻인지, ‘동학접주(東學接主)가 살던 마을’이었는지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으로 남아있다. 어쨌거나 원평과 태인에 동학 대접주들이 웅거하던 지역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내 고향 접주리가 동학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설레는 기대’가 오랫동안 내 안에 자리했다.


  내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존재를 처음 들어 알게 된 경위는 역사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작품을 통해서였다. 대학시절 시인 김지하 선배가 동학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하길종 감독이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태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금치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이 후퇴를 거듭하다가 주력부대가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 태인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얼마 후 대학 졸업을 앞둔 1973년, 작곡가 이종구 형이 음악대학 졸업작품으로 ‘동학’이라는 제목의 교성곡(交聲曲-칸타타)을 발표하였다. 소리를 배운 적 없는 내가 음대생 졸업작품에 찬조 출연해서 성악 아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1982년에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익산으로 피신, 은거하던 작곡가 겸 가수 김민기가 불현듯 희곡을 하나 써서 서울로 올라와 ‘연우무대’와 함께 연극을 올렸는데, 그 작품이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였다. 당시는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사회 전체가 암울하였고, ‘멈춰 선 상여’의 작품 분위기 또한 대단히 무거웠다. 이때 김민기가 나한테 급하게 극 중 해설자 역할을 판소리 도창(導唱)으로 해줄 수 없느냐 물어왔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안핵사 이용태 만행(蠻行) 장면’과 ‘황토현 전투 승리 장면’을 사설로 짜서 도창으로 실연(實演)하였다. 파격적인 풍자의 통쾌함이 무겁던 객석의 분위기를 일거에 포복절도(抱腹絶倒)하는 분위기로 바꾸었다. 뜻밖의 성과에 나는 동학농민혁명사 전체를 판소리로 만들어 그 정신을 새겨보자는 생각을 이때부터 가졌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었다. 나는 비로소 ‘동학판소리’ 창작을 시도하였다. 100주년이라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역사비평사』가 선뜻 창작기금 후원을 약속해 준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다섯 인물(또는 사건)을 판소리로 창작하는 계획을 제안하였고, 그 첫 작품으로 ‘동학판소리’를 생각하였다. 이후 작품을 짜느라 몇 달을 끙끙댔지만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난감한 문제는 ‘수운‧해월의 동학사상과 갑오년 농민봉기와의 관계 설정’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점과 ‘남접’의 실체는 무엇이며, 남접과 북접 간의 갈등과 연합의 실체는 또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어쨌든 나는 처절한 우금치 전투 대목을 제대로 형상화할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완성에 미치지 못한 작품을 시연(試演)했다. 스스로 평가하자면 낙제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10년, 내가 환갑이 되었다. 나는 일찍이 서원(誓願)을 세운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백범 김구’ 등의 작품 창작에 힘을 기울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읍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2022년에 ‘녹두장군 전봉준’을 창작판소리로 다시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나로서는 1982년 ‘멈춰 선 상여’ 이후 독자적인 작품을 구상한 지 실로 40년 만의 일이자 열두 번째 창작판소리 작품이다. 이렇게 하여 완성한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그해 가을과 겨울, 정읍‧전주‧서울에서 공연하였다. 그리고 2023년 겨울 서울에서 다시 공연하였다. 나를 비롯하여 왕기석‧송재영 명창이 함께 무대에 오른 3시간짜리 대작(大作)인 이 작품에 대한 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해이자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안팎으로 겪고 있는 불의와 폭력, 불평등과 불공정, 연성(軟性) 검찰독재, 외세의 간섭과 분단, 가중되는 전쟁 위기, 생태 교란과 기후 위기는 130년 전 정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근래 전라북도가 ‘특별자치도’로 지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때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우리의 가슴 깊이 새기는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한반도 대(大)위기의 시대, 전 지구적 대(大)전환의 시대에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이 ‘동학사건’을 ‘혁명적’ 차원뿐 아니라 ‘개벽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확장해 나가는 뜻깊은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임진택(林賑澤)

  1950년 전북 김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 졸업하였다. 현재 이애주문화재단 상임이사, (사)민족예술창작원-마당판 예술 총감독을 맡고 있으며,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한때 방송국(TV) 프로듀서로 재직하다가 1981년 강제 해직되었다.

  이후 ‘광대’를 자칭하며 ‘마당극’과 ‘창작판소리’ 창출과 정립에 힘써왔다. 그동안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의 일환으로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대한국인 안중근> <전태일> <녹두장군 전봉준> 등의 사설을 직접 쓰고, 이를 작창·공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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