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정신과 서예의 길을 걷다
예술과 삶, 그리고 변화의 과정

예술가 여태명
여태명 선생님은 우리나라 곳곳에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겨 온 예술가이다.
2024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에서 뜻깊은 작품을 쓰셨고, 함께한 작가들과 더불어 서예 작품을 기념재단에 기증하였다.
날짜: 2025. 2. 21.(금)
장소: 충청남도 천안 작업실
문) 안녕하세요, 선생님.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많은 작품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뉴스나 신문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어 많은 분이 잘 알고 계시지만, 아직 『녹두꽃』 독자 중에는 선생님을 모르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녹두꽃』 독자를 위해 인사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저는 평생 그림을 그리고 서예 활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공부보다는 예술에 심취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민체를 하다 보니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작업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책들도 많이 수집하였습니다. 평생 민체를 연구하면서 민체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동학농민혁명 관련 작품을 많이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민중들이 사용하던 서체로, 글자의 형태가 자유로워 글자를 쓴 사람의 개성이 느껴진다.

궁중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서체로, 특유의 '삐침'은 궁인들이 임금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문) 원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랫동안 전주에서 거주하셨는데, 천안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답) 정년퇴직을 앞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평생 전주, 익산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았더군요. 그래서 퇴직하게 되면 꼭 다른 지역에서 지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세종시, 파주, 서울 등을 놓고 고민하다가 고속버스, 기차와 같은 교통이 발달하고 서울과 전주를 오가기 편한 천안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하늘 아래 편한 곳이라는 이름처럼 연고는 없지만 이곳이 편하고 좋습니다. 천안에 있으니 각지에 떨어져 지내는 동생들 만나기도 수월합니다.
미혼인 아들들과 아내는 전주 집에 있고, 작업실은 천안에 두었습니다. 원래는 천안에서 7~8년 있다가 완주로 내려갈까 했는데, 몸이 아파서 계획을 변경하여 천안 작업실을 정리해야 되나 싶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과 선생님의 첫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동학농민혁명 관련 첫 작품은 무엇이며, 당시 동학농민혁명 작품을 썼던 상황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싶습니다.
답) 1998년에 제작된, 전주 덕진공원의 손화중 장군 기념비가 아마 첫 작품일 겁니다. 신정일 선생님(『갑오동학농민혁명 답사기』저자)의 부탁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정일 선생님은 같은 고향 진안 사람이고, 친구의 형이라서 어릴 때부터 잘 알던 사이입니다.
문) 감사하게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2024년에 <안심치덕가>라는 작품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여 주셨습니다. 해당 작품은 현재 재단 기념관 2층에 특별전시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관련 책들을 수집하면서 이 책들을 내 손으로 써서 책으로 엮거나 작품으로 남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념재단에 기증하거나, 아니면 기념재단에서 매입하여 전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그런 작업을 해왔었습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관련 여러 책을 보다가 『안심치덕가(安心治德歌)』의 한 대목이 딱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작품이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특별전시에 활용되었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게 된 것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서예 작품 ‘안심치덕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 동상에 새겨진 ‘녹두장군 전봉준’,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 심은 나무의 표지석 글씨 ‘평화와 번영을 심다’, 전주 톨게이트 현판 ‘전주’ 등 여태명 하면 많은 작품이 거론됩니다. 선생님께서 꼽으시는 대표작은 무엇입니까?
답) 땅으로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 판문점에 남아 있는 것인데, 국가적 행사에 서예 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내가 참여할 수 있어 큰 영광이었습니다. 하늘로는 대통령 전용기의 ‘대한민국’, ‘KOREA’가 있고, TV에 나오는 걸로는 ‘1박2일’, 관청에 있는 것 중에는 문화체육관광부 현판이 대표작입니다.
문) 2018년 남북 정상회담 표지석 글씨를 제작할 당시의 상황과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답) 오랜 시간을 두고 계획된 것이 아니라, 급히 진행된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북한과 조율해야 되어서 딱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전화가 왔는데, 그때가 선거철이라서 여론 조사나 하나 보다 하고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았습니다. 받았더니, 청와대 아무개라고 하더라구요. 청와대에서 나한테 전화할 일이 없어서 사기꾼 전화인가 싶었는데, 조용히 이런 저런 일이 있는데 해주실 수 있냐고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해드려야죠” 라고 했더니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자 이메일을 보낼 테니 지금부터 딱 비밀로 하고 메일을 열어본 연후에 다시 통화를 하자고 합니다. 비밀로 하라고 하니, 청와대에서 전화를 받았다고 말을 하 고 싶은데 말도 못했습니다.
다음날 이메일을 열어 확인하려는데 청와대에서 온 건 보안이 걸려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볼 수 있더라구요. 비밀번호를 넣으니까 자세한 설명이 안내되어 있고, 한 두세 가지 시안을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첫 번째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글자체, 그다음에는 제가 전주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한 전주의 완판본체, 세 번째를 뭘 할까 고민하다 제가 평생 민체를 공부했으니 민체로 시안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해서 보내드렸더니 거기서 회의를 했는지 민체를 택해서 민체로 디자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숫자는 훈민정음으로 쓰고, 이름은 민체로 썼습니다. 개인적 욕심으로는 민체가 되었음 좋겠다 했는데 정말로 민체를 택했더라구요.
그런데 비밀로 진행되어 기념식 전까지도 정말 제 글씨로 진행되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의뢰하여 다른 사람의 글씨로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북 정상회담 생방송을 보고 있는데 딱 제 글씨더라구요. 외국에서도 생방송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친구들, 말레이시아, 대만, 중국 이런 데서도 연락이 오고 한국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습니다. 제 친구들이 보고는 여태명 글씨 같은데 맞냐, 틀리냐로 막걸리 내기도 했습니다.

문) ‘우아한 가난’이라는 말처럼 예술가의 가난은 신성시되고 당연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제대로 밥 먹는 것조차 힘들어 꿈을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선생님께도 이런 힘든 날이 있었을까요?
     
답) 밥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데 예술인들은 가난해야 된다, 이거는 말도 안 됩니다. 예술가들이 밥도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재료도 사고, 또 살아가려면 필요한 게 많습니다. 작품으로서 판매가 된다든지, 정당하게 사회에서 환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술에 대한 인식이 어려워서 생활을 위해 예술을 해야 하는지, 예술을 위해 생활을 해야 하는지 그 갈림길에서 참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예술을 위한 생활은 예술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은 희생해야 했습니다. 라면을 먹든지 밥을 덜 먹든지, 제가 희생하고 감내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생활을 위한 예술을 하면 예술을 희생시키고 작품 활동을 덜하든지, 생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 고민 속에서 예술과 생활, 두 가지를 똑같이 해야 되지 않나 싶었습니다. 특히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들은 더욱 생활을 포기할 수 없잖습니까.
제가 원광대 서예과 교수로 있을 때 서예과 나오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국문과 나왔다고 전부 시 쓰고 소설가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서예도 글씨만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초서‧전서와 같은 고문서 번역가, 박물관 학예사, 연구원, 캘리그라피, 디자인 등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무궁무진합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시대와 트렌드를 따라 작품에 변화를 주고자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무엇에 주목하며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으신가요?
답)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서예과가 없어서 전공을 동양화로 처음 시작하였습니다. 서예를 오래 해서 서예로 이름이 많이 알려졌지만, 한국화를 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한글도 쓰고, 전각 (인장)도 하고, 문인화나 디자인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는 미술교육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판화, 조각도 다 해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융합 예술입니다. 제 작품은 저게 서예 작품이야, 그림 작품이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본디 서예 작품은 읽고 그 내용을 감상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저의 작품은 보는 서예, 글자를 몰라도 되는 서예입니다. 그래서 획과 점으로 구성된 글자를 풀어헤쳐 놓은 해체 예술 혹은 서예와 전각을 융합하거나 서예와 서양화를 융합하는 융합 예술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예가가 아닌 예술가입니다.
문)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께 ‘예술’이란 무엇인가요?
답)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해보니 부단히 변화되는 모습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더군요. 늘 하던 것만 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죽은 작가입니다. 생명이 끝난 겁니다. 60대에서 70대로 가면서 변화하고, 70대에서 80대로 나이가 들면서 또 조금씩 달라진다면 살아 있는 작가입니다. 변화를 해결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본 사람만이 변화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계발하고 도전하며 계속 변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가 노력하여 변화의 방향을 찾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술에는 끝, 완성이 없습니다.
(대담자 : 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최두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