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영 참여자의 증손자 신민호
날짜 2025. 2. 12.(수)
장소 전라남도 순천
참여자 오윤영(1850. 10. 16. ~ 1918. 11. 24.)
유족 신민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오윤영(1850~1918)의 후손, 신민호
진외증조부 오윤영 선생님의 삶에 크게 영향을 받아 전라남도의회 의원 (순천6)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전라남도 여수·순천 10·19사건 희생자 유족 생활보조비 지원 조례」 , 「전라남도 일제강점기 식민 잔재 청산 및 연구 활동 지원 조례」 제정 및 전남독립운동사 편찬 주장과 같은 의정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문) 『녹두꽃』 독자분들께 인사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오윤영 조부님의 유족 신민호입니다. 저는 전라남도의회 도의원(순천 6)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치를 하기 전에는 입시학원을 운영했습니다. 이후 2010년 순천시의원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순천시의회에서 행정자치위원장, 의회운영위원장을 역임하며 재선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2018년부터는 전라남도의원으로 활동하며 제12대 전라남도의회 전반기 기획행정위원장을 역임하고 후반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왕성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재선 도의원입니다.
저의 롤모델은 고흥이 낳은 위인 월파(月波) 서민호 선생입니다. 선생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민호’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민호 의원처럼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불의에 맞섰던 월파 서민호 선생의 빛나는 삶은 제 역사 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학 재학 시절 군부 독재 타도에 앞장선 학생운동도 이러한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여순사건 조례안 제정, 전남독립운동사 편찬 주장 등 우리 지역의 올바른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중요한 일들은 제가 자랑하는 의정활동의 하나입니다.
     
문) 어떻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셨나요?
     
답) 오윤영 접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 할머니께 들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오윤영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저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셨습니다. 때때로 자신감을 잃고 힘들 때마다 할머니께 서는 우리 집안의 역사와 조상의 자부심을 이야기해주시며 저의 자존감을 키워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저는 저 자신의 뿌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훈련대장이자 접주로서 활약하신 오윤영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윤영 선생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답) 오윤영 접주는 진외가 증조부(할머니의 아버지) 어른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고흥에는 포두면 봉림과 도양읍 원동 두 곳에 동학농민군 군사 조련장, 곧 훈련장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포두면에 있는 봉림 군사 조련장의 훈련대장이 오윤영 접주였습니다. 동학농민군 훈련장이 두 곳이나 있었다는 것은 고흥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관군 진압 기록인 『양호우선봉일기』에 흥양(현 고흥) 동학농민군 진압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고흥지역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들의 항쟁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윤영 접주는 동학의 포교 활동과 더불어 농민군 조직에도 힘썼다고 합니다. 오윤영 접주는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신학구를 통해 식량과 군기 물자 등을 조달하게 하였고, 신춘휴를 통해서는 기마술과 병법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오윤영 접주는 1894년 12월 체포되어 처형될 처지에 있었으나, 관군 진압군 포군총장 김정태에게 재산을 내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당시의 상황은, 김정태가 조부님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죄를 약간 가볍게 하여 주며 마치 선처한 것처럼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부님의 삶을 볼 때,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려고 관군 토벌 지휘관과 거래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1915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 따르면, 오윤영 선생님께서는 본적인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에 상당의 토지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흔히 동학농민혁명은 지배층에게 핍박받은 가난한 농민들이 일으켰다고 알고 있지만 여러 조사를 통해 농민뿐만 아니라 지주층, 향리, 심지어 양반까지도 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많은 전답을 소유하였던 오윤영 선생님께서 혁명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들은 바가 있으실까요?
     
답) 오윤영 접주의 부친 오상권은 소문난 효자였다고 합니다. 향교에서 오상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효자오공상권지비(孝子吳公尙權之碑)’라는 비석을 세워주기도 하였습니다.
오상권은 고향 앞 들판인 ‘버든이들’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중농 지주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류 중 하나인데요, 양반, 지주들은 동학에 부정적이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양반 지주들 가운데 상당수 인사들은 동학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았습니다. 무안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하였다가 고막원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된 김응문도 유학자이자 지주였습니다. 함평에서는 양반, 지주들이 자발적으로 동학농민군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윤영 조부 또한 반봉건, 반외세 사상이 강한 동학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동학 사상을 바탕으로 현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오윤영 조부님은, 일본군이 우리 주권을 빼앗으려 하자 전 재산을 내놓고, 무장 투쟁에 앞장섰다고 생각합니다.
     
문) 오윤영 선생님에 대하여 들은 일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요?
     
답) 오윤영 접주는 자신 소유 토지에 훈련장을 마련하고, 마을 앞에 솥을 걸어 농민군의 식사를 도맡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봉림 방앗간이 있는 자리를 ‘막배미’라고 불렀는데, ‘막’은 끝이 없다는 뜻이고, ‘배미’는 논을 구분하는 표현입니다. 오윤영 접주가 소유한 끝없는 논, 넓은 들판인 막배미에 동학농민군들이 솥을 걸어 놓고 식사를 준비했다 하여 나온 명칭이라고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받은 피해가 있었나요?
     
답) 마을에 밀정이 있어 오윤영 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이 고발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재산을 약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재산 피해가 커 완전히 가세가 기울어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주신 할머니께서도 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께서는 조부님의 뜻을 기리며, 조부님을 닮은 저를 제사에 꼭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조부님의 강인한 신념과 희생, 그리고 가족을 위한 헌신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문) 신민호 유족님은 현재 전라남도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의정 활동 중 여순사건 법 개정 촉구,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역사 왜곡 교과서 검정 통과에 대한 규탄 결의 등이 눈에 띕니다. 아무래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이라는 점이 의원님 인생의 이정표가 된 것은 아닐까 싶은데요.
     
답) 앞서 언급했지만, 저는 누구보다 불의에 항거하는 의지가 강합니다. 이는 투철한 역사의식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역사의식 형성의 토대가 된 것은 동학농민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오윤영 조부님의 삶이었습니다. 이미 우금티 전투에서, 그리고 전남 곳곳에서 일본 정규군의 살육 작전에 맞섰던 많은 농민군이 엄청난 희생을 당하였음에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 재산을 내어 동학농민군을 훈련하는 훈련소를 운영하였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숙연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조모님과 부친에게서 들은 오윤영 접주의 빛나는 삶은, 저의 역사 의식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기에다 의식이 형성되면서 어려서 막연히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월파 서민호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공부하면서, 올바른 역사 의식은 정체성 형성의 토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친일과 항일이 섞이고,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반공’으로 항일지사를 공격하고, ‘여순 사건’ 희생자들이 ‘빨갱이’로 무참히 희생되었던 현대사의 비극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지역 정체성 확립의 토대를 반드시 구축하여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문) 최근 전남 항일운동의 시작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라고 언급하시면서 동학농민군들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전남도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농민군 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흥 석대들에 무명 열사 묘역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셨습니다. 전남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원님의 다양한 활동이 주목되는데요. 의원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 저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외세의 침략에 맞선 구국 항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치른 순천 영호도회소의 빛나는 항쟁, 장흥 석대들에서 장엄한 옥쇄를 선택한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학농민군들은 ‘동학의병’을 자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곧 의병 전쟁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현재 편찬 중인 전남독립운동사에 제2차 동학농민혁명의 항쟁을 담고, 특히 2025년 말 개관되는 남도의병역사박물관에도 동학농민항쟁의 역사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곧 정책으로 성과가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장흥 석대들의 무명 열사 묘역 등을 성역화하고, 전남 곳곳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정리하고, 전투지를 발굴하여 기념 공간으로 만드는 일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여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널리 알리도록 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 관련 국제 학술 세미나도 추진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체계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업들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도록 행정적, 재정적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문) 신민호 유족님의 좋은 말씀을 듣다 보니, 신민호 유족님의 가치관이 궁금해집니다. 대한민국의 오늘도 크고 작은 위기에 봉착해 있는 상황인데, 우리 사회는 향후 무엇에 중점을 두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답)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는 강조합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가치관이 혼돈 상태에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살률 1위’, ‘명품 소비율 1위’ 등의 참담한 기록은 우리 사회가 매우 불안한 사회라는 징표입니다. 이러한 불안정성을 이용한 것이 최근 현직 대통령이 취한 친위쿠데타였습니다. 법원이 공격받은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폭동’이라고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합니다. 공화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반복되기에 저는 역사의 소중함을 간절히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역사를 알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길러지고, 당당해지기 때문입니다.
2025년부터 전남독립운동사 편찬이 본격적으로 추진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업 마중물은, 2020년 제가 증액 편성한 3·1운동 판결문 번역 사업이었습니다. 이때 미서훈 독립운동가의 구체적인 양상이 드러나자 대대적으로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추진하여, 2024년 1,023명의 서훈 신청이라는 성과를 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독립운동사 편찬과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전남독립운동사’ 편찬이라는 우리 지역 독립운동사의 성전(聖典) 편찬이 시작되는 성과를 냈던 것입니다.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되새기고, 그분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정치적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역사를 잊지 않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으며,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재단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높이 평가합니다. 재단 홈페이지에 가끔 들어가 보면, 체계적인 활동이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과 ‘농민’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혁명의 성격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단은, 양 측면을 동시에 살피면서 ‘동학농민혁명’을 한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해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민호 유족님. 긴 시간 동안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소식지 유족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대담자 : 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최두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