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 13일 동창을 부수고 10월 23일 홍천 서석에서 수 많은 희생을 당한 차기석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농민군은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내면 자운.흥정 과 계장천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잡은 원당리. 청두리 약수포 등지에서 토벌대와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 60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침입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 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 당했다. 차기석은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사로잡혔다. 오대산 깊숙이 약수포 쪽으로 밀렸던 농민 군 500여 명은 청두리 쪽에서 뒤쫓아온 토벌군과 신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 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였다.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살 당하고 접사 박하조는 붙잡혔다.
사로잡힌 차기석과 박학조는 11월 22일 강릉 사대에 만든 교장에서 효수 당하였다. 정선에서 체포된 이중집, 임순철, 김윤언 등도 이때 같이 포살되었다.
차기석 박학조 등 농민군 지도자 들이 처형당한 곳은 강릉 관아의 사대(활터)에 설치된 교장 이었다. 1990년대 전반 당시 증언에 의해 강릉여자중학교(2016.03.01. 강릉해람중학교로 교 명 변경) 건물 사이 공터가 농민군 지도자 처형인 교장터 였다고 알려 졌다. 사대 앞에 교장을 열고 처형했다는 기록을 보면 활터에서 처형했다는 뜻이다. 강릉 관아의 활터를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장시’에서 처형했다는 기록도 혼재하므로 옛 장시의 위치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증내용
사로잡은 거괴 차기석과 박학조 2놈은 이 달 22일에 교장에서 머리를 베어 사람들을 경계한 뒤 수급은 역자를 정해 본도의 감영에 보냈습니다.(<동비토론><<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43 쪽
차기석과 박학조 괴수 2명은 한꺼번에 왔기 때문에 이 달 22일에 장시에서 우선 비괴 차기 석과 박학조의 목을 벤 뒤 수급은 역자를 정해 감사에게 올려 보냈습니다. (<동비토론><<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45쪽
11월 22일에 내면의 군사가 돌아와서 차기석과 박학조를 면박하여 소모영에 바쳤다. 소모사 가 사대 앞에 교장을 열어 두 놈의 목을 베고, 여량의 괴적인 이중집 등 7명을 포살하였다. 차. 박 두놈의 머리를 원주 순무영에 담아 보내었다. (임영토비소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