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은 봉건적인 신분제도와 부당한 수취체제 등으로 억압받던 백성들이 봉기한 제1차 전투와 밀려드는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재차 일어난 제2차 전투로 크게 구분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며 목숨마저 내건 이들의 용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큰 의의가 있습니다만, 두 혁명 사이에 있었던 집강소 시기를 들여다보면 이들은 용기만으로 혁명을 이끈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에 의해 설치된 집강소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백성이 주체가 된 기관입니다. 본래 조선사회에서의 집강소란 보수유생 등을 중심으로 향촌안정을 도모하던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그 역할이 동학농민군에게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반상이 엄격하던 조선사회에 백성이 주체가 된 파격적인 집강소의 설치는 당시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894년 7월에 있었던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전주화약’ 이후에 현실화되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회담의 주요내용은 ‘조선에 들이닥친 외세침입을 민족적 위기로 받아들이고, 관官과 민民이 서로 화합하여 해결하자’였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집강소입니다.
본 전시는 ‘관민상화의 산물’ 또한 ‘오늘날 지방자치기구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는 집강소’에 담긴 동학농민군의 굳건한 의지와 단단한 주체성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