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내용
최승우는 운암면 지천리에서, 김홍기는 둔덕면 둔기리(현 오수면 오수리)에서 각각 봉기하였다. 「전북연합신문(남원권의 동학농민혁명1)」.
1894년 3월 무장기포 당시 임실 대접주는 최봉성이었다. 그는 연로하여 행동에 직접 나서지 않았고, 그의 아들 최승우가 봉기를 주도했다. 최승우는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에 동학농민군을 집결시켰다.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연구 - 사적지를 중심으로」, 『동학학보』 33, 195쪽.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에 사는 최봉성은 신사로부터 도를 받아 포교하였고 1891년에 이르면서 남원지역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동학세력이 자리잡게 되었다. 「남원의 동학혁명운동 연구」, 『동학연구』 5, 25쪽.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최시형으로부터 임실의 최승우에게 “척왜척양하고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하에 동원령이 전달되었는데 최승우는 즉시 남원에 거주하고 있던 김홍기에게 연락하여 임실과 남원이 합동하여 기포하였다. 「남원지역 토착 동학농민군의 활동-김홍기와 유태홍을 중심으로」, 『동학학보』 33, 41쪽.
1894년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최시형으로부터 임실의 최승우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하고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원령이 전달되었는데, 최승우는 즉시 남원에 거주하고 있던 매부 김홍기에게 연락하여 임실과 남원이 합동하여 기포하였다. 포명은 신흥포였다. 「은적암과 초기 남원지역의 동학전파」, 『동학학보』 33,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