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최경선(1859~1895)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과 더불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본명은 영창(永昌), 이름 병석(炳碩), 초명(初名) 만석(萬碩), 자는 낙필(洛弼) 혹은 자는 경선(卿宣, 혹은 敬善·慶善)이다. 전주 최시이며 정읍시 북면 월천동(北面 月川洞)에서 출생하여 주산리(舟山里)로 옮겨 살았다. 그의 판결문은 이름을 영창(永昌)이라 하였음
전봉준은 공초에서 3월봉기를 누구와 모의했느냐는 물음에 손화중과 최경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판결문에는 최경선을 전봉준의 모주(謀主) 또는 고굉(股肱)이라 표현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태인 사람으로 1893년 11월 고부군민들의 사발통문 대표로 참여하여 다음해 정월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다. 3월 백산봉기에서 영솔장(領率將)으로서 동학농민군을 통솔했다. 5월 전주해산 후 전라도 각 군현에는 동학농민군의 집강소가 설치되었는데 남원부와 나주목이 이에 응하지 않아 전주 대도소에서는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남원에는 김개남을 나주에는 최경선을 보내기로 했다. 최경선은 동학농민군 3천을 거느리고 내려가 7월 5일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목사 민종열(閔種烈)의 완강한 저항으로 나주성 점령에 실패했음
9월 2차봉기 후 일본군이 나주 영광 해안으로 침입한다는 설이 있어 서울 진격에도 참가하지 않고 손화중과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공주패전 후 전라도 서남부지방의 동학농민군을 나주로 집결시켜 나주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내려오자 11월 27일 광주로 입성했으나 사태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2월 1일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 최경선은 독자적으로 동학농민군 잔군을 이끌고 남평을 거쳐 동복으로 내려갔다가 12월 1일 벽성리(碧城里 현 화순군 남면)에서 관군에 피체되었다. 최경선은 담양(潭陽)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서울에서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1895년 3월 29일 최후를 마치니 나이 37세였음
현재 최경선 생가터에는 대나무가 자라는 공터이다. 역시 정확한 학술조사 후 표석이나 안내판 설치가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