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해월 최시형은 1898년 4월 5일(음) 원주 호저면 고산리 송골 원진여 집에서 송경인이 이끄는 병졸에 체포되었다. 5월 30일 교형을 선고 받고 6월 2일 형이 집행되었다. 3일 뒤인 6월 5일 이종훈은 상여꾼을 사서 시신을 수습해 광주 이상하의 뒷산에 장사하였다. 2년 후인 1900년 3월 12일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원적산 천덕봉 아래 소시랑봉 산중턱으로 이장했다.
묘 우측에 1980년 3월 21일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세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뒷면 비문은 이선근(1905-1983)이 지었다. 1986년 4월 10일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천덕산 중턱에는 해월의 세 번째 부인인 손시화의 묘, 아들 최동희와 부인 홍순영, 손자인 최익환과 부인 홍창업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고증내용
(경자) 5월 1일에 성사가 박인호를 명하여 해월신사의 분묘를 광주군 원적산 아래에 이장하시다(<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1>>494쪽)
형을 실행한 3일 뒤에 감옥서에서 비로소 대선사의 시신을 광화문 밖에 버렸는데, 이종옥 등이 밤을 이용해서 비를 무릅쓰고 겨우 반암과 수의를 구해 광주 땅에 임시로 묻었다가 나중에 경자년(19000 3월 12일에 이천 천덕산 건좌의 언덕에 이장하였다(<동학도종역사>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1권 146쪽)
경자 3월 12일 여주 광덕산에 이장했다(<시천교역사> 하 <<동학사상자료집3>>, 654쪽)
이종훈은 저녁에 신사의 시신을 파다가 6일 새벽 나루를 건너 송파의 이상하의 산에 안장했다. 2년 후인 포덕 41년(1900), 이상하가 신사의 묘소를 이장해 달라고 간청해 왔다. 상사(춘암 박인호)와 이종훈은 신사의 유골을 수습하여 짊어지고 광주를 거쳐, 1900년 3월 12일 성사와 많은 두령들이 참례하여 천덕산 기슭에 안장했다.(표영삼, <해월 신사 연대기> 231쪽)
광주 송파의 이상하의 뒷산에 모셔졌던 해월 시신은... 1900년 3월 12일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원적산 천덕봉 아래 소시랑봉 산중턱에 안장했다.(<여주의 동학과 해월 최시형의 최후에 관한 연구> 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