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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16호
동학교단의 강경노선을 이끈 황하일(黃河一, 1846 ~ ?)

  동학교단의 강경노선을 이끈 황하일(黃河一, 1846 ~ ?)


충북발전연구원 충북학연구소장 김양식


  언제 어디서나 큰 역사적 사건에 직면한 지도자 옆에는 그를 보필하고 선택의 나침판을 놓아주고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인물이 있다. 실제 역사 흐름은 이런 인물들에 의해 좌우되는 법인데, 바로 그런 역할을 한 동학교단내 인물이 황하일이다.



  교조신원운동의 전개와 황하일


  황하일은 충청도 보은군 송림면 구강교에서 태어난 인물로, 최시형과 서장옥의 오른팔 역할을 한 강경파의 한 사람이었다. 1882년에 동학에 들어온 이후 줄곧 서장옥과 함께 최시형을 보필하면서 동학교세를 확대해 나갔으며, 1892~93년 동학운동의 선봉에 서서 억울하게 죽은 교조의 신원을 부르짖고 탄압받는 교인들을 지켜내려 정부를 상대로 맞서 싸웠다.


  1892년 공주와 삼례에서 있었던 동학집회, 1893년 1월 광화문 복합상소, 1893년 3월 보은집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동학운동은 모두 황하일 등이 그 중심에 서서 동학집회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황하일은 언제나 서장옥 등과 더불어 강경노선을 걸으면서 동학운동이 보다 큰 사회변혁운동으로 나가도록 역사의 물줄기를 잡아나갔다.



  남북접 연합의 주역을 맡다


  그의 나이 48세에 일어난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서장옥과 함께 최시형을 설득하여 동학 내부의 남북접이 연합하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3월 20일 전라도 무장 기포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전주성 점령에 이어 집강소체제를 이끌어냈지만, 충청도는 청일전쟁이 발발한 7,8월에 들어와서야 동학농민군이 본격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갑오년 8월 2일 보은 사각면 냇가에는 동학도 수백명이 집결해 있었다. 보은군수 정인량이 찾아오자, 동학도들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관민이 함께 창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집회를 이끈 인물이 바로 황하일을 비롯한 임규호, 이관영 등 동학 접주들이었다.


  9월에 들어와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재기병하였다. 문제는 서울 진공을 위해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총 연대하여 북진하는 일이었다. 충북 청산에 머물러 있던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은 여전히 동학농민혁명에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서장옥은 동학농민혁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온 최시형을 설득하였다. 그는 최시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절친한 친구인 보은 출신의 황하일을 동원하였다. 황하일은 비록 북접 소속일지라도 동학교단 내부에서 급진적인 인물에 속하는 데다, 전봉준과도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황하일은 서장옥의 의견을 받아들여 손병희·손천민 등과 함께 민족적 위기를 내세워 최시형을 설득하였다. 이때 전봉준이 보낸 오지영이란 인물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남북접 대연합전선의 구축과 황하일


  드디어 9월 18일 충북 청산에서 전국 동학접주회의가 열리고, 이 자리에서 동학교단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시형은 9월 25일경에 일반 동학교인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동원령을 내렸다. 보은 장내리에는 ‘충청좌도 대도소’를 설치한 뒤, 강원·경기·충북 동학도를 집결시켜 손병희로 하여금 통솔하도록 하였다. ‘충청좌도 대도소’는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 직속의 동학농민군 사령부로서 주로 충북지역을 관할하였다. 여기에 소속된 동학 접주들은 보은의 황하일을 비롯하여 회인의 유일수, 회덕의 김복천, 충주의 성두환, 옥천의 박석규, 문의의 오일상, 청산의 이국빈, 청주의 서장옥, 영동의 손광오, 황간의 조경환 등이었다.


  이것으로 남북접 대연합전선이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청주 출신의 서장옥과 보은 출신의 황하일, 그리고 전라도 농민군을 이끌고 있는 전봉준의 역할이 컸다. 그 결과 9월 말에 이르면 동학농민군의 사령부와 같은 대도소가 보은 장내리, 전라도 삼례와 남원 세 곳에 각각 설치되고 서로 기맥이 닿아 서울로의 북상날짜만을 손꼽고 있었다. 남은 일은 군사력을 확대해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것, 그래서 서울을 점령한 뒤 일본세력을 바다 건너로 축출시키는 일뿐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의 황하일


  황하일은 분명 이런 계획과 목표로 최시형을 설득하고 대일전선에 참여하였으리라. 그래서 황하일은 충북일대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895년 2월 25일 고향인 보은 어디에선가 체포되어 ‘동학당에 투입하여 지방 안녕을 해친’ 죄목으로 1895년 윤 5월에 법부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3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황하일이 어디로 유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 뒤의 행적도 묘연하다.


  이와 같이 황하일은 최고의 지도자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시종일관 동학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가 꿈꾼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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