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살아도 가치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손화중 장군의 손자 손홍렬

동학농민혁명의 3대장군은 전봉준 장군, 손화중 장군, 김개남 장군이다. 그 중 손화중 장군은 전라도의 대접주로 활동하였으며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에서 비결록을 꺼낸 일화로 유명하다. 손화중 장군의 묘역은 전라북도 정읍시 음성마을에 조성되어 있는데 바로 이 음성마을에 장군의 손자인 손홍렬 선생님이 지금도 거주하고 계신다. 장군의 후손인 것에 긍지를 느끼며 자손들에게도 항상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신다는 손홍렬 선생님은 손화중 장군에 대해 말씀해 주실 때 확신에 찬 눈빛을 보여주셨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건제도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전국에 떨쳤던 손화중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후손의 증언으로 생생히 전해들어보자.
문) 조부님에 대하여 어느 분께서 주로 말씀해 주셨습니까?
답) 조부님께서는 1895년에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되셨습니다. 물론 저는 태어나기 전이었고, 제 선친께서는 5살이 되시던 해였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시지요. 당시 모든 일을 직접 겪으셨던 조모님께서 선친께 조부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그분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문) 그분께서 말씀해주신 손화중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답) 조부님은 당시 전라도의 대접주로서 활동하시며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분이 명절 때나 제사 등의 일로 집에 계실 때면 항상 전봉준 장군이 찾아와 함께 봉기할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전봉준 장군이 조부님보다 9살 연상이었으니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거사를 위해서는 동학의 세가 꼭 필요했겠지요. 그러나 조부님께서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 때는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이지 인력으로는 불가한 것이다.’라고 설득하시며 돌려보내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거절하시다가 결국 1894년에 함께 봉기할 것을 결정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으니 우리라도 나서서 바로잡아보자는 뜻으로 승낙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조부님께서 봉기날짜를 잡으시고 준비 후에 무장을 거쳐 백산에서 집결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까지 모두 조부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동학의 접주라는 직책은 교인 100명을 인솔하는 것인데 이런 접주를 100명 거느려야 대접주가 된다고 합니다. 조부님께서는 전라도의 유일한 대접주로 활동하셨으니 통솔권이 대단하셨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조부님께서는 황토현 전투까지 본인이 직접 통솔하시고 이후에 전봉준 장군에게 통솔권을 인계하셨다고 합니다. 2차 봉기 당시에는 조부님께서 일본군의 해안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주력농민군이 패배하고 당신께서도 나주 점령에 실패하자 수하에 있던 농민군들을 해산하시고 광주에서 고창으로 넘어가 부안의 수강산 산당으로 피신하셨지요. 그렇게 피신해 계시던 중 저희 백부님이 관군에 붙들려 인질이 되자 당시 재실지기였던 이봉우 씨에게 자신을 고발하라고 하여 체포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울로 압송되셔서 재판을 받고 전봉준 장군, 최경선 장군, 김덕명 장군과 함께 한날한시에 형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짧게 살아도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부님께서는 짧은 삶을 살다 가셨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문) 조모님과 선친께서 동학농민혁명 이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답) 동학농민혁명 이전에는 우리 마을에 손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본군들이 마을에 손씨 성을 가진 건장한 남성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여 거의 3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 목숨에 위협을 느끼신 조모님은 옥구(지금의 군산)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세상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식모살이를 하셨다고 합니다. 자식들에게도 손씨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이씨나 김씨로 성을 바꾸어 지내신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조부님께서 5살이셨으니 자신의 성씨가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간혹 실수로 손씨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조모님께 크게 혼이 나곤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생사가 걸린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집도 절도 없이 지내시다 5년 후에야 고향에 돌아오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 손화중 장순 묘역 바로 근처에서 거주하고 계십니다. 묘역은 어떻게 조성되었습니까?
답) 처음에는 조부님이 사형을 당하신 후에도 가족들이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의 소식을 전해들을 방도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20년 후에야 조부님이 재판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선친께서 가묘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조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바로 옆자리에 묘를 썼지요. 이후에 제가 조부님과 조모님을 합장하였고, 둘레석과 비석을 세웠습니다. 당시에는 묘역으로 가는 길이 조그만 논두렁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시청에서 새로 길을 내주었고, 작년 겨울에는 장군석도 세워주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문) 조부님께서 혁명에 참여하여 농민군을 이끄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조부님의 사상과 젊은 나이에 봉건제도와 외세에 대항하여 투쟁하신 것에 대하여 자손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자손들도 동학농민혁명의 3대장군이었던 손화중 장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의 후손으로서 지켜야 할 예절과 행동을 항상 강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현재 동학농민혁명의 선양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의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해 기념일 제정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를 정부가 직접 나서고 참여하는 행사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현재보다 한차원이 높은 행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여자들의 유족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조명하여 국가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가치관을 인정해 주는 사업이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족들이 선조들에 대한 긍지를 느낄 수 있을 때에야 영령들의 진정한 해원이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재단이 고인 분들과 유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