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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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9호
김제지역의 책임자 황종모의 후손 “황금고”

  김제지역의 책임자 황종모의 후손 “황금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 황금고


 


  천년의 도시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며 왕실의 뿌리이자 조선의 3대도시였다. 그런 전주성이 1894년 4월 27일(양력 5월 31일)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사를 통틀어 거둔 최대의 승리였고, 조정에 동학농민군의 저력을 보여준 대사건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전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황종모님의 증손자 황금고 유족을 만나뵈러 갔다. 2011년도 특별전시에 전시되었던 길고 무거운 창이 바로 당시 황종모님이 사용하시던 것으로, 황금고 유족이 직접 기념관에 위탁한 것이다. 그는 마치 손자를 맞이하듯 인자한 미소로 필자를 반겨주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어느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답) 저희 증조부께서는 김제, 정읍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셨습니다. 김제에서는 지역의 책임자로 활동하셨으며, 정읍에서는 전봉준장군 바로 아래 직책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커다란 창을 들고 앞장서서 적들을 치는 돌격대장 역할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족보에는 종모라는 이름 말고도 태하, 경상이라는 이름으로도 쓰여 있는데,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후 피신하기 위해 바꾸신 이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후 정읍 감곡에 살던 딸의 집으로 피신하셨다가 체포되셨다고 합니다. 함께 피신하셨던 조부께서는 증조부의 창과 방패를 가지고 도망치셨고, 그 후에 논밭을 팔아 도피자금을 마련하느라 가세가 기울었다고 합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하신 사항에 대해 주로 어떤 분이 말씀해 주셨나요?


답) 주로 아버지와 큰아버지께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제사 때가 되면 창을 꺼내두고 제사를 지내시면서 너희 증조할아버지께서 이 무거운 창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의를 위해 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버지께서 조부님의 도피자금 등을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시면서 그런 내용들을 전해 들으셨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 증조부께서 어떻게 처형을 당하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전해들은 말에 따르면, 오랏줄로 도망가지 못하게 결박한 다음에 김제 주제소로 데려가 산채로 장작불에 화형시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도자급의 인물을 공개처형하여 동학농민군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한 것이겠지요. 그 당시의 일본인들의 처사가 정말 잔인했습니다. 후에 타고남은 재만 간신히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봉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위치를 알지 못해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체포당하시기 전에 딸의 집으로 조부님과 함께 피난하시는데 앞으로 꿩이 훅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조부님은 꿩이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고 하니 피난장소를 옮기자고 말을 하였지만 증조부께서는 창을 들면서‘내가 무서울 것이 뭐가 있느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피난하신 뒤 며칠 되지 않아 친구의 밀고로 일본인들에게 발각되어 증조부님은 잡혀가시고 조부님은 창과 방패를 들고 도주하셔서 도피생활을 하게 되셨습니다.



문) 대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분들은 참여사실에 대하여 타인에게 언급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아버지께서는 어떠셨나요?


답) 아버지께서도 제가 어렸을 때는 증조부님의 참여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창을 보고 어디에 쓰는 것인지 여쭈어 본 적이 있었는데, 전혀 답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물일곱에서 여덟쯤 됐을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처우가 나아졌고 그때 아버지께 증조부님의 참여사실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을 알지 못하고 지낸 것이지요.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셔서 남기신 유품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답) 앞에서 말씀드린 창과 방패가 있습니다. 방패는 제가 보았을 당시 많이 훼손되어 손잡이가 달린 세숫대야처럼 보였습니다. 현재는 전해져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부님께서 작성해두신 가승*이 있는데, 거기에 증조부님이 사용하신 다른 이름이 적혀있어서 이름을 여러 가지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이미 알려져 위장을 위한 목적이었겠지요. 또한 제사 날짜 등이 족보에 명시되어 있어 증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사실을 밝혀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승 : 족보의 한 형태로서, 가첩(家牒)·세계(世系)·가계(家系)·내외보(內外譜) 등의 명칭으로도 쓰인다.



문) 증조부님의 창을 저희 기념관에 위탁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저희 기념관에 위탁하실 결정을 내리게 되셨습니까?


답) 도립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제 딸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증조부님의 창에 대해 언급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듣고 그 직원분이 찾아와 기념관에 기증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러나 증조부님의 유물이라 기증하기 힘들어 망설이니 기증하기 힘들다면 위탁하여 잘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주셔서 기념관에 위탁할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계기로 관심을 가지고 호적등본 등 자료수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비록 당시는 역적취급을 받으셨지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탐관오리와 부패한 관리들에게 고통 받던 농민들을 위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언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답)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명예회복증서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저를 포함해 20명의 명예회복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이 인원들 모두를 한 장에 명단형식으로 종합 작성한 증서를 보내주어 아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별로 하나씩 이름을 넣어 만들어 주었다면 하나씩 나눠주어 보관하기도 좋을뿐더러, 모두에게 기념이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문) 재단의 활동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재단이 많은 발전을 이루고 사업이 잘 되어 동학농민혁명정신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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