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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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8호
최정예 경군을 물리친 황룡전투

  최정예 경군을 물리친 황룡전투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의원

이원구



  긴 유월 가뭄인데 호남의 들녘에는 벼 포기가 푸르게 일렁이고, 아직 모내기를 안 한 논엔 물이 찰랑거렸다. 김제 만경 평야의 보리밭에 황금빛 알곡이 익어가고 있었다. 


  정읍역에 내리자 하얀 뭉게구름 속에서 하늘이 파란 얼굴을 드러냈다. 오늘 답사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 전적지이다. 1894년 갑오년 음력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감영군 천여 명을 몰살시킨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 황룡전투에서 최정예 경군(京軍)을 물리쳤다. 신록이 우거진 유월 초 바로 이맘때였다. 산엔 밤꽃이 하얗게 피고, 논밭엔 보리가 익어가고 감자가 여물고 있었을 것이다.  


  반갑게 맞아주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두 직원과 함께 장성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길게 누운 내장산이 한결 짙푸르게 눈에 들어오던 무렵에 운전하던 황 선생이 말했다.


  “방금 지나간 입암 산성에서 고려군이 몽고군을 크게 물리쳤답니다. 거기 대흥리엔 동학 접주였던 차경석이 보천교를 세웠고요.”


  장성 가는 길은 가도 가도 산 첩첩이다. 지금은 내장산의 허리께에 두 개의 터널이 뚫렸지만 예전엔 이 길로 동학농민군이 추격하는 경군을 따돌리고 남행하였다.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700여 명이 4월 6일 오후 군산항에 도착한 뒤에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4월 7일 오후에 동학농민군이 정읍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자 부안 근처 13개 읍의 수령들은 전주 감영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4월 8일 흥덕, 고창, 9일 무장, 12일 영광에 도착하면서 군기고를 장악하여 무장하고, 세금장부를 압수하여 토색질 한 아전들을 처벌하였으며, 호적을 태우고, 부잣집에서 곡식과 말을 거두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북상하지 않고 영광에서 나흘간 머무르면서 낮에는 진법을 연습하고 밤엔 경전을 읽었다.


  ‘유럽의 십자군들이 방패와 칼에 십자가를 새겨 신의 가호를 빌었듯이 동학농민군들도 시천주(侍天主) 주문을 외우면서 등에는 신비한 부적인 궁을(弓乙)을 붙이지 않았을까?’


  농민군은 5리마다 복병을 두었으며, 30리 거리를 두고 병력을 2500명씩 배치하였다. 지도부는 관군을 대할 때 지켜야 할 4대 강령과 12조 군호령을 내려 군기를 잡았다. 하지만 군산에 상륙한 700명의 경군은 도망치는 군사들이 속출하여 일주일 만에 470명으로 줄어들었다.


  4월 16일, 농민군은 봉기의 목적을 밝힌 통문을 전주의 홍계훈 초토사에게 보낸 뒤에 경군의 추격을 피하여 병력의 절반은 영광에 남고 나머지 반은 함평으로 진군했다. 이처럼 전봉준 손화중 부대와 김개남 부대로 농민군을 둘로 나눈 것은 집중과 분산의 작전이었다. 즉 관아를 공격할 때는 모이고, 이동할 때는 흩어지는 전술이었다. 그것은 관군을 혼란시켜 추격을 피하고, 더 많은 농민들이 동학군에 참여하기를 바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미 홍계훈이 병력을 보내 18일에 이미 정읍에 경군이 머물면서 추격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나주 목사 민종렬이 농민군의 봉기는 명분이 없는 거사라고 성토하면서 배후에서 농민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평 관아를 점령한 7000여명의 농민군은 나주로 진격하지 않고 진세를 펼치면서 세력을 과시하였다. 그 모습을 황현이 <오하기문>에 기록하였다. 


  평민 한 사람이 열네댓 살 소년을 어깨에 얹히고 군대 앞에 섰다. 소년이 작은 남색 깃발을 쥐고 군대를 지휘하자 모든 적(농민군)이 그 뒤를 따랐다. 맨 앞에 피리 부는 이가 섰고, 그 뒤에 인의(仁義) 깃발 한 쌍, 예지(禮智) 깃발 한 쌍, 그리고 백기 두 개가 뒤를 따랐는데, 하나는 보리(菩提), 또 하나는 안민창덕(安民創德)이었다. 그 다음 황색깃발에는 보리중생(菩提衆生), 나머지 깃발에는 각각 그들이 사는 읍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갑옷 입고 말을 탄 채 칼춤을 추는 자가 뒤따르고, 칼을 잡고 걷는 4,5쌍의 사내, 큰 나발을 부는 붉은 관복을  입은 자 두 명, 그리고 날라리를 불고 북 치는 자가 뒤따랐다. 이어서 한 사람은 도인의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채 나귀를 타고 가는데, 이 같은 모습을 한 대여섯 명이 나귀를 타고 뒤따랐다. 


  농민군은 그처럼 장엄한 행군을 하면서 진법 훈련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즉 다섯 가지 색깔의 두건을 두른 만여 명의 총 든 자가 두 줄로 걸어갔는데, 그 뒤를 죽창 든 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걸으면서 휘어지고 꺾이면서 갈지자(之) 혹은 입구(口)자로 만들기도 하면서 진세를 배치하였다.


  황현은 이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즉 교활한 소년을 골라서 미리 어떤 진을 펼칠 것인가를 며칠간 가르친 뒤에 신동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보는 사람들을 현혹시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농민군은 맨 앞에 선 소년의 깃발이 지시하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차는 장성에 도착하였다. 뭉게구름이 다 걷히고 한여름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정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장성은 교통의 요지였다. 북쪽으로 정읍 전주, 동쪽에 순창 담양, 남쪽으로 나주 광주, 그리고 동쪽으로 고창 영광으로 사통오달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황토현 전투에서 지형을 잘 이용하여 대승했던 동학농민군은 동남쪽 함평 무안에서 5일 간 주둔해 있다가 장성으로 이동하여 머물며 추격하는 경군을 유인하면서 기다렸을 것이다. 물론 장성엔 정읍에서 남하한 병력 말고도 전라남도 일대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수 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감사, 초토사 홍계훈, 나주 목사에게 폐정을 바로잡고 탐관오리를 처벌하여 보국안민을 실현하겠다는 봉기의 이유를 밝힌 문서를 보내면서 경군을 물리칠 계책을 세웠다. 


  4월 21일 오전 8시 경 만여 명의 농민군은 황룡면 월평리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신호리 삼봉 아래에 진을 쳤다. 이때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를 출발하여 고창에 이르러 관군을 나누어 농민군을 쫓았다. 그는 농민군의 해산을 촉구하는 방문을 붙이는 한편 조정에 증원부대를 요청하고 전라감사에게 순창, 담양, 광주, 나주에 방어선을 치라고 지시한 뒤에 직접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구, 정읍, 고창을 거쳐 4월 21일에는 영광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외국의 교관이 훈련시킨 최정예 경군은 무기는 우수하였지만 농민군들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4월 23일 오후 2시경 홍계훈은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에게 300여 명을 붙여주면서 장성으로 먼저 출동시켰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월평리에 도착한 대관 이학승이 지휘하는 선발대가 삼봉 아래에 진을 친 농민군을 공격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경군이 쿠르프포를 쏘자 순식간에 50여명을 잃은 농민군은 후퇴하고 경군은 추격하면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삼봉에서 농민군들은 맹렬하게 반격하여 드디어 경군은 패하여 달아났고 대관 이학승이 칼을 휘두르면서 혼자 싸우다가 병사 5명과 함께 죽었다. 이 전투에서 경군은 쿠르프포 1문, 회전식 기관총 1분, 수많은 탄환을 잃었다. 당시 홍계훈의 요청으로 4월 16일 조정에서 파병한 총제영병 500명이 전투가 벌어진 날 홍계훈 병영에 합류했으나 전투는 이미 종료된 후였다. 홍계훈은 조정으로 장계를 올렸다.


  “.......쿠르프포를 쏘자 수백 명이 죽었고, 그 무리 만여 명이 30여리를 돌격해 오니,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아군은 힘이 빠져 넘어지면서 황급히 진지로 돌아오니....... 그 참담함과 놀라움을 다 말할 수 없다.......”


  농민군의 승리는 지형을 이용한 전술과 용맹성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 신무기인 ‘장태’의 힘이 컸다고 황현이 기록하였다. 


  적은 병기를 거두고 조금 물러났다가 곧 바로 삼봉으로 올라가 진을 쳤는데, 마치 학의 모양과 같았다. 적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홀연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름한 닭의 집과 비슷한 것이 수십 개였다. 밖으로 창과 칼을 삐죽하게 꽂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로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내려왔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 돌을 쏘았지만 대나무 통에 차단되어 버렸다. 적은 대나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뜨거운 햇빛이 산과 들을 눈부시게 태우는 유월 바로 지금 이맘때쯤의 전투였다. 일행은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의 드넓은 전적지에 도착하였다. 반갑게 맞아 주는 문화해설사 김채림 선생이 조각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1994년에 광주 전남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2만여 평의 대지에 승전기념공원을 만들었습니다.” 


  조각상은 웅장했다. 30미터 높이의 대리석 죽창,  장태 뒤에 숨은 농민군 셋, 화승총과 죽창은 든 농민군 두 명, 그 밑 청동부조엔 농민들의 전투장면이 처절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묵념을 마치고 탑을 돌아보니 곽재구의 시 ‘조선의 눈동자’가 새겨져 있다.


  ‘.......그날 우리들은 짚신발과 죽창으로 오백년 왕조의 부패와 치욕 맞닥트려 싸웠다.’


  다른 벽엔 전남대 사학과 이상식 교수가 쓴 글이 눈에 파고 들어왔다. ‘장성 황룡싸움은 농민군이 대포 등 신무기로 부장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전주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며, 왕의 군대를 무찔러 혁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4대 강령도 새겨 있었다. 그 중 ‘군대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는 마지막 강령에서 동학 농민군의 서슬 푸른 의지가 엿보였다. 문득 전봉준 장군이 재판 받을 때 던진 말이 떠올랐다. 즉 황룡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관군보다 두 배를 빠르게 전주로 가서 전주성을 무혈점령하였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산봉기의 일차 목표였다. 황룡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효유문을 받아가지고 내려온 왕의 관리를 처형하면서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신채림 선생이 일행을 과수원 사잇길로 이끌었다. 좌승지 이학승 순의비(殉義碑)가 감나무 곁에 호젓하게 서 있었다. 독성을 감춘 가시를 단 환삼덩굴이 비석을 금방 침범할 듯 보이는 이곳이 당시 황룡전투의 현장인 듯했다. 1897년 이곳 유림들이 세웠고, 매천 황현이 비문을 썼다고 한다. 


  순의비 길을 나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모셔진 김인후 선생의 필암서원을 안내해 준 뒤에 신 선생은 뜻밖의 말을 던졌다.


  “장태를 창안한 분이 화암 이춘영 씨였어요. 갑오년 봄에 황룡강가에 대장기를 세운 분인데, 그의 후손 이장우씨가 지금도 살고 있어요.”


  식사하던 농민군이 기습을 당한 옛날 장터를 수소문하고, 문화원에서 자료를 구해주는 등 유월 뙤약볕 속에서 정성껏 안내해준 신 선생과 헤어진 뒤에 차는 광주 가는 길로 달렸다. 드넓은 들판에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2,3킬로미터 달려 황룡면 오룡마을, 혹은 토말의 그 집에 들어가자 갈색의 정다운 닭들, 검은 토종닭들이 십여 마리 흩어져 모이를 쪼고 있었다. 누렁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캐다 만 감자가 뒹굴고 있었다.


  ‘이 집이 바로 갑오년에 집강소를 설치한 곳이라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오십대 후반의 이장우 씨는 장태를 만든 왕대나무를 4,5킬로 떨어진 황룡면 가정리 송영직의 대밭에서 베어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리고 천여 명을 이끌고 황룡전투에 참여한 증조부 이춘영은 공주전투에서 패하자 외가로 도피한 뒤 독립자금을 모았고, 천도교 광산 교구장이었던 조부 이규익은 3.1독립선언서를 장성에 전달하였단다. 헌데 헤어지면서 후손 이장우 씨는 참 명쾌한 걸작 말을 던졌다. 


  “말하자면 황룡전투에서 농민군이 특수부대 대장 이학승을 죽였던 셈이지요. 헛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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