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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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8호
김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재조명되길 바랍니다

  김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재조명되길 바랍니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최고원


  김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김제평야’일 것이다. 그 풍족한 황금들판의 이면에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지난 6월 5일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았다. 아담한 사무실에서 우리들을 맞아준 최고원 사무국장님의 깊은 미소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해주신 사무국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문) 기념사업회 창립배경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 창립 시 구미란 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주관했던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두 고령이었고, 그 명맥을 이을 세대가 없어 저희 기념사업회가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창립 후 곧바로 재정위기가 닥쳐와 약 2년간 사무실 임대료를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었죠. 다행히도 현재는 재단의 지원으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문) 기념사업회 창립 시 사회분위기는 어떠하였습니까?


답) 모두가 환영해 주진 않았죠. 한편에서는 창립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자의 유족과 동학농민군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유족이 공존했으니까요. 본의 아니게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든지, 극소수의 농민군에게 재산을 빼앗긴 경우 등이 있었습니다. 동전에 앞면이 있다면 응당 뒷면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던 것이죠. 필히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문) 김제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소개해 주세요.


답) 먼저 금구 원평취회가 있었던 원평장터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원평에서 수천명의 교도들을 회유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전봉준 장군이 고부봉기 이전부터 김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곳입니다. 그리고 원평장터는 3.1운동이 최초로 성공한 곳입니다. 3.1운동 당시 상당수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원평집강소가 있습니다. 이곳은 전봉준 장군이 9월 봉기를 준비할 때 각지에 통문을 보낸 곳입니다. 당시 필요한 정곡이나 자금을 원평 집강소로 지원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비록 며칠 후 좌두와 우두를 전부 총괄할 수 있는 삼례 부근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원평 집강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금치 전투 이후 최후집결지 역시 원평입니다. 원평전투에서 한나절 가량의 전투를 벌이고 태인으로 퇴각하였는데, 당시의 관군이 거둬들인 전리품으로 여러 섬의 총알, 많은 돈, 호피 등 후퇴한 병력들이 옮겨왔을 만한 물건들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원평지역이 동학농민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볼 때 원평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최고원 사무국장님과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답) 작은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알려지면 화를 피할 수 없었기에 말씀하시기를 꺼리셔서 정확한 활동사항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할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로는 당신께서 최경선 선생이 맡기신 궤를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문서 보관용의 궤였는데, 구미란 전투 즈음에 맡긴 것으로 추측됩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보관하시다가, 후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이름이 써지거나 낙관이 찍힌 부분을 모두 먹으로 지워버려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희 당숙께서는 작은할아버지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용했던 칼을 직접 보셨다고 말씀 하셨지만, 그 칼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문) 기념사업회를 운영하시면서 힘드신 점이 있으셨습니까?


답) 물론 재정적인 문제나 업무적인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제 경우에는 사람관계가 가장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많은 분들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희 창립대회 때나 여러 행사 때 따로 인원동원이 없었더라도 마을 어르신들께서 먼저 나서서 참석해주시고 도와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업회를 이끌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답)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라는 방법론의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김제의 모든 유적지에 대해 성역화 작업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더 잊혀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김제지역의 활동이 재조명 되었으면 합니다. 학술대회도 더 자주 열리고,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정말로 순수하게 기념사업을 해 나가는 것이 저희 기념사업회의 목적입니다.



문) 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오시면서 생각에 남는 일화가 있으십니까?


답) 2009년 무장기포 행사, 정읍 황토현 행사 당시 행사 주최단체에서 버스와 식사비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려웠던 때여서 더욱 마음에 남습니다. 그리고 구미란 전적지 근처에 세워진 폐기물 처리장을 마을 주민들과 철거했던 일이 있습니다. 시의원의 굴삭기 지원이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폐기물 양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김제시에서 트럭 여러 대를 지원해 주어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두 사람이 시작한 일을 한 손, 두 손 계속하여 힘을 합쳐서 결국엔 커다란 일을 해냈다는 보람에 뿌듯했던 기억입니다. 제가 앞서 사람관계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그것 또한 사람이 다 해결해 주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저희 기념사업회 최고의 자원은 바로 인적자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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