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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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동학농민군의 이상과 가치를 현대화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이상과 가치를 현대화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박성묵



문)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창립배경이 궁금합니다.


답) 2006년 7월에 오래전 전부터 찾아낸 동학농민혁명참여자 유족 10여 명을 중심으로 <예산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발족했습니다. 지역의 관심 있는 회원을 모아 같은해 관작리 전투일인 11월 23일에 위령제를 시작으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정식 출범했습니다. 지금까지 발품 팔아가며 동학농민혁명 역사현장을 발굴하는 등 예산 · 내포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저변을 넓히는 데 보람을 느끼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 사업회 설립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여론)는 어떠했나요? 예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 사업을 지원해주는 단체나 개인이 있나요?


답)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전라도’, ‘조병갑’을 연상하며 우리지역은 별개의 지역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불모지였죠.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동학농민혁명과 관계가 없다고만 알고 지낸 예산 지역이 오히려 북접농민군의 큰 활동무대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 하나의 소중한 역사를 얻게 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수집했던 사료와 밝혀낸 사실을 바탕으로 2007년 10월에 「예산동학농민혁명사」를 발간했습니다. 예산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어서 자긍심을 갖고 의욕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업이나 단체, 독지가가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문) 박성묵 사무국장님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답) 제 처가가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입니다. 예산군 고덕면에 살았던 저는 이웃마을로 장가간 셈이지요. 하포리는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 3만여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천도교 제4세 교주로 독립운동에 힘썼던 춘암 박인호 선생의 생가터가 있고 유허비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더군요. 학창시절 역사과목을 유난히 좋아했던 저는 처가를 드나들면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지요.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동학농민군의 도피생활과 역적의 후손이란 굴레를 쓰고 숨죽여 살아온 후손들의 삶이 참으로 기구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무언가에 홀린 듯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 찾기에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잊혀졌던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활동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문) 예산을 포함한 충청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분들을 중심으로 어떤 활동이 전개되었나요? 그리고 관련 기념물과 유적지를 소개해주십시오.


답)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의 남접군과 충청도 지역의 북접군으로 구분할 수 있지요. 전봉준 장군이 고부관아 점령을 했고, 같은해 내포지역은 ‘태안관아’와 ‘대흥관아’를 점령하여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94년 춘암 박인호 장군의 지휘 아래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 동학 북접군은 토벌군인 관군, 정예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내포의 3만여 농민군이 승전했던 관작리 전적지, 동학농민군이 무차별 살육을 피해 은둔하여 형성된 주교리 ‘은골’과 집단 정착마을인 탄중리, 농민군 지휘본부였던 삽교 성리 ‘예포대도소’ 등이 있습니다. 그 역사적 자취와 유적은 찾는 이 없이 방치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양 진격을 위해 내포지역 2만여 동학농민군이 진압군과 전투를 벌인 관작리 전적지 위치에는 얼마 전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1차 조성을 완료했습니다.



문)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과거에 어떤 사업을 펼쳤었고,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업의 의의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초반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을 중심으로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유족들의 참여율을 높이고 신뢰감을 얻고자 노력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유족과 관련자들만의 행사가 아닌, 일반인과 학생들도 참여하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문화행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죠. 그래서 다른 지역 여러 행사를 둘러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규모만 컸지 가슴에 와 닿는 프로그램은 드물더군요.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 하더라도, 항상 대두되는 것은 사업비 확보였습니다. 우리 사업회의 능력과 실정에 어울리고 새로운 참여와 저변 확대를 목표로 사업을 구상한 것이 2009년 ‘동학농민군 이동로 걷기대회’였습니다. 2011년 11월에 청소년을 위한 유적지 탐방을 계획했으나 학교 일정 문제로 생각보다 참여율이 높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2회에 걸쳐 청소년 동학농민혁명교실을 개설해 이해와 참여를 높이려 계획하고 있습니다.



문) 박성묵 사무국장님 주변의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질문을 해 보신적이 있나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가요?


답) 입시경쟁 교육에 길들어 있어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아는 학생이 별로 없더군요. 역사를 소중하게 가르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청소년들은 우리나라의 미래희망이죠. 몇 년 전, 개인적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몇몇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역사 과목을 비중 있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 나라 뿌리인 역사보다 영어ㆍ수학 등 입시과목에만 집중하고, 소위 ‘스펙’ 쌓기에만 온 나라가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 교육’이 없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부족한 상황이 오늘날 교육의 현실입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벗어나 사람을 섬기고 나눔과 배려심, 함께하는 참 공동체를 만드는데 중심이 되도록 교육시스템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문) 박성묵 사무국장님에게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답) 개인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삼아 저의 이상을 실현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사상적 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바른 사회상, 함께 살 수 있는 좋은 공동체 만들기 등은 동학의 사상적 통찰과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역사에서 찾아 실천 . 계승하는데 참다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근대사에서 시대를 이끌어가는 동력이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뒤돌아 볼 때 3·1운동, 4·19혁명,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치는 거대한 물줄기입니다. 그 민주화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동학농민혁명을 한 세기 넘게 국가적 차원에서 계승하지 않고 외면하고 전 국민이 가치를 모른다는 것은 미완성의 민주주의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우선 동학농민혁명 선양 사업은 기념재단과 지역기념사업회간에 신뢰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동학농민군이 추구했던 이상과 가치를 현대화 할 수 있도록 기념재단과 지역기념사업회는 젊은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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