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2020년 2월 14일
장소: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및 녹두관
대담: 김양윤 |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총무국장

문) 『녹두꽃』 이번 호의 기념사업단체 소식은 전북 전주시에 있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민, 이하 전주기념사업회)를 찾았습니다. 김양윤 총무국장을 만나 단체창립 연혁과 함께 그동안 추진해온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국장님 반갑습니다. 본인소개와 함께 전주기념사업회 창립 등에 대하여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안녕하세요. 총무국장 김양윤입니다. 우리 사업회 역사를 살피려면 3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해요.(웃음) 제가 입사한 게 벌써 25년이나 되었네요.
문) 30년, 요즘은 100세 시대라서 불가피하게 그 개념이 재정립되어야겠지만, 옛날에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잖아요? 단체 창립에 대해서 30년을 거슬러야 한다고 하니 왠지 숙연해지네요. 『녹두꽃』 독자들에게 창립 무렵 얘기부터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리 사업회 창립 무렵의 일들은 제가 입사하기 전이라서 직접 겪지 않아 소상하게는 잘 모르지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마치고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명의로 우리 사업회에서 간행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 백서』(이하 백서)를 통해 알고 있어요. 그 백서는 지금 기념재단에서 일하시는 문병학 부장님이 사무국장으로 계실 때 쓰셨어요. 『백서』에 따르면 1988년 전북지역 문화예술전문지 『전북문화저널』 5월 호에 ‘갑오농민전쟁 100주년을 준비하자’는 칼럼이 게재됩니다. 이 칼럼을 당시 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신순철 교수님이 쓰셨는데, 나중에 사석에서 웃으시면서 이 칼럼을 집필한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렀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그도 그럴것이 그 칼럼을 쓰신 책임감(?) 때문에 1990~1991년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 창립주비위원회 및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공식적으로 우리 사업회 창립 이후 줄곧 상임이사, 사무총장 등을 맡아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에 헌신하셨지요.
문) 그 무렵,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기에서 후반기가 우리나라 민족민주운동이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기였지요? 제가 알기로 1980년대 서울에서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이이화)가 창립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답) 네, 맞습니다. 1986년에 역사문제연구소가 창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산하에 ‘갑오농민전쟁100주년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그리고 1993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동학농민혁명100주년전시조직위원회’와 ‘동학농민혁명100주년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이렇듯 전북과 서울에서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를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전북지역에서도 3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 연합체 형태로 1992년 6월 5일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가 창립하였습니다. 창립이후 기념사업을 100주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중앙정부에 법인 설립을 추진하였고, 1993년 7월 31일 문화체육부 소속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가 정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은 첫 번째 사례이지요.

문) 네, 그런 과정이 있었군요. 문화체육부에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네요?
답) 그렇지요. 우리 사업회가 사단법인 인가를 받을 때 문화예술인 모임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한국민예총)도 한날한시에 인가를 받았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전까지는 ‘동학농민혁명’이라든가 ‘민족예술’이라든가 이런 진보적 성향을 가진 단체는 사단법인으로 인가되지 않았습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되어 진보적 성향을 지닌 두 단체가 법인화가 성사된 것이지요. 인가를 받은 후 한국민예총과 우리 사업회에서는 문화체육부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에 따른 국비지원을 요청하였고, 우리 사업회는 8천8백만 원, 한국민예총은 정확한 액수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약 1억2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관련하여 2억 원을 국비로 지원받은 셈이지요. 지금도 적지 않지만 당시에 2억은 큰 액수였습니다. 국비지원이 확정되자 우리 사업회와 한국민예총 그리고 서울의 역사문제연구소 등이 한 자리에 모여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나갈 단체협의회 창립의 필요성을 논의하였고, 협의를 거듭한 끝에 전주기념사업회, 한국민예총, 역사문제연구소를 비롯하여 경남 진주, 전남 광주, 충남 공주, 전북 정읍, 충북 보은 등지에서 활동하던 11개 기념사업단체가 1993년 12월 13일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에 있는 전봉준 장군 고택 마당에서 출범식을 가졌습니다.

문) 아,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이하 동단협)가 그렇게 창립되었군요. 그렇게 하여 백주년 기념사업을 동단협이 주최가 되어 추진하였지요?
답) 그렇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기념사업 총괄기획은 사업비를 국비로 확보한 전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기획팀을 구성하여 계획하였고,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과는 실무적인 연계를 통해 100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100주년 기념사업은 세 축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축이 1994년 2월 26~27일 이틀간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전북 정읍)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임을 알리는 큰 굿판이었습니다. 두 번째 축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대회인데, 4월 29~30일 양일간 전주시청 광장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습니다. 세 번째 축은 10월 29~30일 공주우금티 추모예술제로 100주년 기념사업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 축으로 추진한 100주년 기념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1894년 이후 100년 동안 반란사건으로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 즉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 첫새벽을 연 반봉건 민주운동, 일제의 국권침탈에맞서 싸운 근대 최초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성과를 올린 것입니다. 이런 성과가 10년 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을 견인해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음악극 천명 포스터
문)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 이후 전주기념사업회에서 아주 굵직한 사업들을 많이 전개하셨지요? 1999년 초에 동학농민혁명 대서사시 음악극 ‘천명’을 서울 국립중앙극장, 광주광역시 문화예술회관, 전북 전주시 삼성문화회관 등지를 순회하는 공연을 개최하여 대중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역사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지요? 그때 천명 출연진과 스텝이 거의 2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던데, 그렇게 대규모 작품의 순회공연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끝난 후 우리 사업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분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동학농민군서훈추진위원회 발족을 위해 힘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이사장님이시던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적극적인 노력을 해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모금운동도 벌이고, 중앙언론사를 통한 홍보 광고도 추진하고 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을 국가유공자로 서훈을 추진하려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과 범국민적인 호응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인식제고를 위해서 언론홍보 등을 통해 노력하는 한편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된 문화예술작품을 순회공연하며 범국민적인 관심과 인식의 제고를 기하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대본을 써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서울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 음악극 ‘천명’을 다시 무대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립창극단, 국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국립중앙극장 소속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연작품으로 음악극 ‘천명’을 리바이벌하였습니다. 그래서 1999년 1월과 2월 사이 서울에서는 국립중앙극장, 광주광역시에서는 광주문화예술회관, 전북 전주에서는 삼성문화회관에서 총 6회 순화공연을 개최하였습니다. 당시 서울의 언론사는 물론이고, 순회하는 지역 언론의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으로 객석은 전석이 매진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입석표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공연장 내부 객석 사이에 임시좌석을 배치하는 등 아주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하는 일은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입법 또는 법 개정 등이 필요한 사항으로 국회 관련 활동을 위해 2000년 1월 17일 동학농민혁명 국회의원 연구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초대 회장을 김태식 국회의원님이 맡으셨고, 이 모임을 준비하고 운영해나가는데 당시 장영달 국회의원님이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2004년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봉환식 (1996. 5. 29. 일본)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발견 및 봉환
문) 네, 전주기념사업회에서 참 많은 일들을 수행하셨네요. 여러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업으로 1995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국내로 모셔온 사업이 있지요? 지도자 유골을 국내로 모셔오게 된 경위와 그분을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전주시 완산동 완산칠봉 끝자락에 ‘녹두관’을 건립하여 그곳에 안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1995년 7월 25일 일본 북해도대학 표본고(標本庫)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머리뼈(인골 人骨) 6구가 일본의 아이누민족 인권운동단체에 의해 발견되어 일본 언론은 물론이고 국내 언론에 유골 발견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북해도대학 문학부 창고에 신문지에 싸여 종이상자에 넣어진 채 발견된 유골의 여섯 구 중 한 개의 유골에는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골 속에 첨부된 문서에는 "메이지 39년(1906년) 9월 20일 진도에서 한국동학당 봉기 때 효수된 수괴자의 것”이라는 내용과 한국통감부 농업관리인 사토 마사지로라는 일본인이 전남 진도에서 시찰 중 수집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유골이 발견 된 북해도대학은 당시 식민지 지배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인종학을 연구하는 일종의 특성화대학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일본인에 의해 무단으로 반출되었다는 언론보도를 접한 당시 전주기념사업회 이사장이신 한승헌(前감사원장) 변호사님은 1995년 8월 일본 북해도대학에 한국인 유골의 국내 봉환을 요청하는 공식문서를 발송하였고, 1996년 2월에는 일본 북해도대학을 직접 방문하여 유골의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내로 돌아온 즉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도교 등과 협의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군지도자유해봉환위원회(상임대표 한승헌)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골을 1996년 5월 30일 대한항공편으로 국내로 모셔왔고,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노제를 올린 후 전주로 곧장 내려와서 그 이튿날 5월 31일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행사와 연계하여 전주 덕진문화예술회관에서 진혼제를 올렸습니다. 이후 유골이 누구인지를 규명하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지도자유골조사위원회(위원장 신순철)을 구성하고 2년여에 걸쳐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밝혀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유골에 붙어 있던 치아 한 개에서 DNA를 검출하여 조사한 결과 “30~40대, 한국인, 남성”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우리 사업회에서는 유골의 안장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유골을 수집한 전남 진도군을 찾아 안장을 요청하기도 했고, 동학농민군 최초 승전지인 황토현전적(국가사적 295호) 안에 매장하는 방안을 수립하고 추진하기도 했고, 동학농민군 구미란 전투지인 전북 김제시 구미란 마을 뒷산에 매장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 여의치 못해 숱한 안장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보지 못하다가 2015년 전북 전주시와 업무협의가 이루어져 동학농민군 완산전투지에 유골을 모시기 위해 ‘녹두관’ 건립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마침내 지난 해 2019년 6월 1일 그분이 영면하실 수 있도록 그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꽃상여 행진 유골 안장을 위해 녹두관으로 가는 길

추모사 | 이노우에카츠오 명예교수 추모사 | 한승헌 상임대표·변호사


유골 안장식 (2019. 6. 1.)
문) 얘기를 듣다보니 울분이 솟구치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가 처형된 후 백골마저 다시 토벌을 자행했던 당사자인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되어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후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마음에 죄스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해 비로소 그분께서 영면하실 수 있도록 녹두관에 모시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유골이 동학농민혁명 역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를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특히 중요한 한 가지를 든다면 무엇일까요?
답) 일본군은 조선에 불법적으로 들어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른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우리나라를 전장으로 만들었으며,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후 그 총구를 동학농민군에게 돌려 수많은 농민군을 학살하였습니다. 갑오년 당시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연구되지 못한 채 연구자들마다 그 숫자를 각기 다르게 말합니다만 어떤 연구자는 30여만 명에 달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구체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기록이나 이런 것을 일본인들은 남기지 않았지요. 자기들의 천인공로 할 만행을 철저히 말살시킨 결과이지요. 그런데 이 유골은 아주 명확하게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을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한 연합부대가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지난 해, 그러니까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수부였던 전주성을 함락한 125주년을 맞은 5월 31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에 대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그 이튿날인 6월 1일 이곳 녹두관에 모시게 되었는데, 그날 전주역사박물관에서 그분을 꽃상여에 모시고 옛 전주성을 한 바퀴 돌아서 완산칠봉자락에 위치한 녹두관에 안장하였지요?
답) 우리 사업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표자 및 전국에서 동학농민혁명 애국애족정신 선양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지역의 기념사업단체 대표자 등으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폭넓게 안장위원회 위원으로 모시고 이분을 모시는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이분을 꽃상여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그 의견에 모두 적극 동의하여 꽃상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전주시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중간 중간에 많은 시민들이 꽃상여를 멈춰 세운 뒤 상여에 올라 상여의 틀에 노잣돈(현금)을 꽂아드리는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전통 중의 하나가 꽃상여가 나갈 때 상여를 세우고 저승 가는 노자로 쓰시라고 돈을 꽂는 풍습이 있잖아요? 그 전통이 실제로 재현된 것이지요.
문) 네, 인터뷰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고 숙연해졌습니다. 긴 시간동안 애써 기억을 더듬어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전주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할 사업계획이나 이런 것이 있으면 끝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리 사업회는 1991년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매년 동학농민혁명 백산봉기 기념대회(4월), 동학농민혁명 전주입성기념대회 및 기념주간(5월 말 ~ 6월 초),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대회(10월), 찾아가는 동학농민혁명 역사교실(11월) 등을 추진해왔습니다. 이 중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부안군 백산봉기기념사업회, 완주군 삼례봉기기념사업회가 각각 창립되면서 그곳에 해당하는 사업은 해당 지역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추진해온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5월 31일부터 6월 11일까지 동학농민혁명 전주입성 기념주간으로 정해서, 복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전라감영과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모신 완산칠봉자락의 녹두관 등을 잇는 구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적극 힘쓸 계획입니다.


녹두관 내부 녹두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산 1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