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정태영의 증손자 정해곤
문) 이번 호의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정태영(1859~1922)의 증손자 정해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님을 모셨습니다. 사무총장님 반갑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를 위해 본인 소개와 근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먼 충남 아산까지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정 태자 영자의 증손자로 현재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정해곤입니다. 1970년대 후반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 아산농민회장을 맡아서 활동하였고, 지금도 농민회 활동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의 삶은 1970년대나 지금이나 나아진 것이 별로 없이 힘들지요. 지금이라고 별반 나아진 것이 없지만 지난 70년대와 80년대 농민들의 삶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약자의 편에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농민회, YMCA 시민운동 등 이런저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시고 기꺼이 한 목숨 내걸고 싸우셨던 증조부님의 피의 내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참여 사실을 알게 된 경과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답) 증조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얘기는 조부님께 들었습니다. 저의 조부님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신 아명은 수자 길자, 관명 규자 희자이십니다. 할아버지께서 제가 어릴 때부터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나보다 증조할아버지께서 공이 많으신 분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지금에 와서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부님께서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과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반일투쟁이라는 맥락에서 동일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문) 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지는 역사를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그해 7월 23일 일본군 경복궁 무단점령으로부터 일제의 국권침탈이 시작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셨던 조부님도 동학농민혁명과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아주 당연한 인식이셨던 같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가 동학농민혁명을 역사의 뒤안길에 암장(暗葬)시켜 축소하고 왜곡시킨 결과 단절된 역사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조부님의 말씀이 우리가 깊이 새겨봐야 할 중요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참,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신 조부님은 독립유공자이시죠?
답)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조서를 정리하여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매번 할아버지께서는 ‘국민으로서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무슨 유공자 신청을 하느냐’고 말리셨죠. 그래서 79년도 5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듬해인 1980년 독립유공자 지정신청서를 보훈처에 제출하였습니다.

문) 증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고, 조부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거기다가 선생님도 1970년대부터 농민회 활동을 해오셨고,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데... 오늘 인터뷰 내내 숙연해집니다. 선생님 집안의 내력이 곧 굴절 많았던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증조부님과 조부님, 그리고 선생님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내력으로 생활이 많이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떠했는지요?
답)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고 조부님이 독립운동을 한 이후에는 저희 집안은 엄청나게 어려웠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곧잘 했지만 공부를 계속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집안이 상당히 어려웠었는데 제가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나라를 위해 했던 일들을 누군가는 정리를 해줘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나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광복회, 농민회,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등 이런저런 단체 활동에 참여해왔습니다.
문) 네. 그랬었군요. 이쪽 충청도 내포지역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1차 때는 소강상태였으나 10월 16일(양력) 소위 북접대도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께서 전국 동학교도 총동원령(청산기포령)이 내려진 후 태안 등 내포지역에서 동학농민군 활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갑오년 당시 증조부님은 아산에 거주하셨는데, 그 당시 아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봉기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답) 아산에는 동학농민혁명 집회지라든가 기포지, 전투지 등 뚜렷하게 드러난 활동은 없어요. 내포지역 여타의 지역 그러니까 태안이나 예산 이런 곳들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분들은 아산에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아산 선장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뿌리는 동학농민혁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독립운동은 몇 개 마을에서 몇 명만 참여했었는데, 아산 선장면은 12개리가 전부 독립운동에 다 참여했어요. 이런 걸 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아산 선장면 분들이 많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아산 선장면은 위치가 인천광역시와 가깝고 하니까 선장에서 기포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책자를 낸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회장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아산 선장면하고 도고면 이쪽에 동학농민군이 많았는데,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태형을 맞은 사람이 도고에 80명이나 있었고, 산장은 100명이 훌쩍 넘어 도고와 선장 사람들을 합치면 2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립운동 한 지역은 도고에는 없고 선장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독립운동 하는 조직이 선장을 거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자 그해 9월 24일 남원대회를 통해 반일항전의 의지를 표출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8일 전북 완주군 삼례읍 대도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반일민족항쟁의 횃불을 높이 올립니다. 이후 10월 16일 이른바 북접의 동학교단에서 동학교도 총동원령이 내려집니다. 이후 10월 29일 충청도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태안관아를 점령하고, 11월 22일 관작리(예산)전투, 구만포전투, 당진전투 등에서 승리합니다. 그 여세를 몰아 동학농민군은 11월 24~26일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벌었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증조부님도 내포지역의 여러 전투 등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증조부님의 활동에 대하여 알고 계시거나 전해들은 얘기는 없으신지요?
답) 제가 본 연구자료에 따르면 충남 신창의 동학 농민군은 10월 25일과 26일 신창현 남상면 판방리에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김경삼, 곽완(郭玩), 이신교(李信敎), 정태영(丁泰榮) 등의 접주들이 이끌었던 신창의동학농민군은 천안의 동학농민군과도 연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창의 동학농민군은 당시 대포 2문을 보유하고 읍내에 석권할 만큼 기세를 떨쳤다고 합니다. 기세를 떨치던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은 26일이나 27일경 대흥과 홍주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증조부께서는 신창의 김경삼, 이신교 등의 접주들과 천안의 동학농민군과도 연계를 꿰하면서 11월 24~26일(양력) 홍주성으로 이동하여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증조부님은 1859년생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35세였는데, 홍주성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서 귀가했다고 천도교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문) 증조부님은 홍주성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귀가했다고 하셨는데, 귀가 이후 증조부님은 어떻게 지내셨고, 언제 돌아가셨는지요? 그리고 묘소는 어디에 있는지요?
답) 네, 증조부님은 기미만세운동(1919년)이 일어난 것을 보신 후 1922년도에 돌아가셨고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 선장면 군덕리에 있습니다. 증조부님과 조부님, 아버지 모두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증조부님 출생지는 충남 당진 신흥리인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피신하여 예산군 대술면 이티마을에서 사셨다고 해요. 여기서 조부님을 낳으셨습니다. 그런데 선산이 출생지인 당진 신흥리도 아니고 조부님을 낳으실 때 사셨던 대술면 이티도 아닌 선장면 군덕리에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한 곳에 거점을 두고 살지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건국훈장 독립유공자 정수길 님(정해곤 님의 조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정해곤의 집(충남 아산시 선장면)
문)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번지 일대에 2021년 완공목표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공원 한 편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묘역과 수많은 무명동학농민군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관과 전시실 등이 마련될 예정입니다. 기념공원이 완공된 이후 차차 제반 절차를 거쳐동학농민혁명 참여자분들을 기념공원 내 묘역으로 모시게 될 터인데, 조부님 묘소도 이 곳으로 옮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답) 네, 고민을 하기는 하는데... 딱히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선장면 군덕리 선산 맨 위에 정 태자 영자 증조부님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 독립유공자이신 정 수자 길자 조부님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쪽에 저의 아버님 묘소가 있습니다. 사실 저희 조부님은 독립유공자이기 때문에 국립현충원으로 모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현재 이곳 선산에 증조부님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조부님이 “증조부님의 공이 훨씬 크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 등을 생각하여 두 분을 떼어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분들을 현충원 이런 곳을 정해서 한 곳에 집단으로 모시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만 그분들이 활동했던 현장에 그대로 두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조성된 이후 증조부님을 그곳으로 모셔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은 해봤지만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신 증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모시고, 독립유공자이신 조부님은 국립현충원에 모시려면 필연적으로 두 분을 멀리 떼놓아야 하는데... 이점이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하는 이유입니다.


증조부 정태영 접주 묘소(충남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292-6) 조부 정수길 독립유공자 묘소(충남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292-6)
문) 쉽지 않는 문제임은 틀림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넋을 기리고,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생님 말씀처럼 꼭 한 곳에 모실 게 아니라 그분들이 활동하셨던 각각의 지역과 장소를 잘 정비하여 후대들에게 애국애족정신 선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증조부님은 1922년도에 돌아가셨다고 하셨잖아요?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돌아가신 분들과는 달리 혁명 이후 28년을 더 살아계셨는데 그런 연유로 증조부님이 남긴 기록이나 증조부님 관련 유물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증조부님 사진만 있습니다. 당시는 사진이 있기 어려운 시절인데 증조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찍었으니까 100년이 넘었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갑오년과 그 이듬해 일제와 관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지만 저의 증조부님은 홍주성전투 때 부상을 당해 피난을 가서 살아 남으실 수 있었습니다. 증조부님은 피난 가서 낳은 아들, 그러니까 제 조부님을 통해 기미년 3·1만세운동에 힘을 쏟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여튼 저의 조부님은 장남으로 증조부님의 파란만장한 얘기를 다 들었을 것이고,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에 선대의 정신을 이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매진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하셨어요. 3년 동안 징용생활을 하고 돌아왔는데,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탄광에서 일했기 때문에 진폐증에 걸렸고, 결국은 그 병이 악화되어 57세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7년 먼저 돌아가셨어요. 제 기억으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심했어요. 아버지는 강제징용 다녀와서 몸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천도교에 이름만 올리고 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이점에 대해 아버지에게 나무람을 하셨지요.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가 집안 어르신들의 맥을 이어 이런저런 사회적인 활동을 하시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강제징용 등을 통해 상처가 컸기 때문인지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이점을 늘 서운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극심한 부침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평가 절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민족민주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펼쳐졌고, 그 결실로 2004년 특별법,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설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서 나아나 지난 해 2월 26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5월 11일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주관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펼쳐졌고, 올해도 오는 5월 11일 기념식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참여자 후손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텐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5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공포되어서 작년에 처음으로 정부주관으로 기념식이 개최되었습니다. 가슴이 아주 뭉클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그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면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던 분들을 ‘비적’, ‘반란군’ 등으로 매도해왔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런데 지난 해 공식적으로 정부 주관으로 기념식이 개최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증조부님과 독립운동을 하셨던 조부님, 징용생활을 하셨던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한편, 아직은 우리나라는 친일세력이 득세하고 있잖아요?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민족적 긍지를 곧게 세우려면 친일했던 세력과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을 잘 구분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에 대하여 제대로 대우하고, 그 정신을 후대에 넘겨줄 수 있는 교육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기념탑(충남 아산시 선장면)
문) 선생님, 지난해까지 사단법인 아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계셨지요? 올해 임기가 만료되어 다른 분이 이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었고, 선생님은 다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 역할을 맡으셔서 많이 바쁘실텐데 이렇게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 3대 교주 손병희 선생님까지는 많이들 그 활동과 역사에 대해 알고 계시는데 천도교 4대 교주이신 춘암 박인호 선생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분은 충남 예산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 때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때에도 동학교단의 최고지도자 직책을 맡아 큰 공헌을 세우셨습니다. 저의 증조부는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춘암 박인호 상사님과 함께 일하시면서 천도교 예산지구를 창설하고 직위도 받으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때나 그 이후에나 이곳 충청도 지역의 많은 농민들이 동학의 정신으로 곳곳에서 애국애족정신을 표출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동학농민혁명’하면 전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게 강한데 이점이 조금 아쉽습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현재 홍주성에 있는 700의총(義塚)은 그 주인이 동학농민군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홍주성의700의총(義塚)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두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학농민군이 그 의총의 주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 직책을 맡고 있고, 광복회 아산지회장도 맡고 있으니까 잘 연계하여 홍주성 700의총(義塚)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열의를 기울일 생각입니다. 기념재단에서도 이점에 대해 깊게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 말씀 드립니다.

문) 네, 선생님 긴 시간동안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