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21년 봄 43호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 2021. 3. 9.(수) 14시

장소 :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문) 안녕하세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봄호 지역대담에는 지난 1993년부터 광주·전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그 위상을 복원하기 위해 힘써온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이상식)를 연원으로 활동해온 장성군 사람들이 2017년에 이르러 출범시킨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자이신 조복래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회장님,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회장님 주요한 경력과 함께 자기소개를 해주십시오.


답) 네,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2017년부터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조복래입니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지역대담』 코너를 통해 인사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장성은 제 고향입니다. 저는 장성에서 살면서 1981년부터 대통령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91년부터 1997년까지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장성군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1년부터 2000년도까지 장성군의회 제1대 제2대 의장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제가 군의회 의장으로 있을 때 고향 선배님이자 당시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학장이셨던 이상식 교수님을 만나 장성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게 되면서 황룡전적지를 정비하는 뜻깊은 일에 힘을 보탰습니다.



 

문) 네, 회장님께서 황룡전적지 정비를 위해 애쓰셨고, 장성군이 이 사업에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는 얘기를 이상식 교수님께 자주 들었습니다. 황룡전적지를 정비하기 위한 준비가 1993년부터 시작되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지요? 여기에 대해 형식적인 것에 구애받지 마시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이상식 교수님과 저는 장성 출신으로 고향의 선후배 사이입니다. 저는 장성군 황룡면 출신이고, 이상식 교수님은 삼서면 출신이에요. 사실 이상식 교수님께서 장성군의회 의장실로 찾아오기 전까지 저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잘 몰랐고, 더욱이나 장성 황룡, 그것도 제가 태어나 자란 월평에서 아주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1994년 1월이었어요. 제가 장성군의회 의장으로 있을 때 이성엽 군의원이 있었어요. 이성엽 의원이 바로 이상식 교수님과 한집안 사람이에요. 어느 날 이 의원이 제 방에 와서 “의장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장이신 이상식 교수님을 아시죠? 그 분이 의장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라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래서 존함은 많이 들었노라 대답하고서 이 의원에게 바로 연락해보라 했어요. 그렇게 해서 그 다음 날 이상식 교수님이 장성군의회 의장실로 오셨어요. 의장실에 오신 이상식 교수님이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올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다, 우리 고장 장성 황룡에 갑오년 때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고부군의 조병갑사건 쯤으로 왜곡·축소되면서 국민들은 물론이고 우리 장성 사람들조차도 그 중요한 역사적인 장소를 까마득히 모른다. 그래서 올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니 그 장소를 정비하여 기념탑도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니 장성군과 군의회에서 도와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 얘기를 듣고 제가 이 교수님께 “교수님 반란군들의 기념탑을 세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일에 장성군이나 군의회 등 공적기관에서 나설 수 없습니다.” 그렇게 딱 잘라 말씀 드렸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저는 반란군의 기념탑을 세우는데 협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딱 잘라 얘기를 했더니 이 교수님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들고 온 자료를 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시간 날 때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이 교수님이 의장실에서 나가시고 나서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향 선배님이고, 국립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하신 교수님께 내가 너무 단호하게 얘기를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교수님이 책상에 두고 간 자료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그 자료를 읽고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차,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자료에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동학농민군이 서울에서 파견한 조선의 최정예부대인 경군(京軍)을 물리친 역사적인 고장이 바로 장성 황룡이더라구요. 더구나 이 황룡전투가 내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올린 아주 중요한 전투였더라구요. 장성 황룡면, 그것도 월평리는 제가 태어나 자란 바로 그 동네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날 하루 종일 그 자료를 보고 또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다음날 오전에 군수님실로 올라갔어요. 당시 장성군의 수장은 김정환 군수님이었는데, 제가 올라갔을 때 마침 간부회의가 끝나서 군수님과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어요. 전남대학교 이상식 교수님이 다녀가셨다는 얘기, 이 교수님이 놓고 간 자료에 장성 황룡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이 있다는 등의 얘기를 하면서 그곳을 정비하는 게 좋겠다고 군수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세상에나 군수님이 제가 이 교수님 얘기를 듣고 했던 얘기랑 아주 똑같이 “반란군을 기념하는 탑을 세운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군수는 민선이 아니라 관선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 교수님처럼 똑같이 그 자료를 군수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시간이 날 때 이 자료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그 이튿날 출근을 했는데 군수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김정환 군수님이 지금 막 의장실에 다녀오시겠다면서 올라가셨다고.... 좀 있다가 군수님이 의장실인 제 방으로 들어오셨는데, 손에 제가 군수님 책상에 올려놓았던 그 자료를 들고 계시더라구요. 제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군수님이 저를 보고 이상식 교수님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을 우리 군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줘야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이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지요. 이 교수님 며칠 전에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하고서 군수님까지 다 얘기가 되었으니 황룡 월평에 자리한 전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자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이 교수님이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곧바로 장성군으로 찾아오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제가 동학농민혁명과 깊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문) 네, 제가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전주에 소재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1993년 10월에 역사기행팀을 꾸려서 이곳을 답사했어요. 그때 지금은 고인이신 이이화 선생님과 우윤 선생님, 그리고 신순철 교수님 등이 동행하셨는데, 답사팀이 황룡전적지에 도착하니 전적지 입구에 이상식 교수님이 나와 계시더라구요. 알고 보니 이이화 선생님과 이상식 선생님이 이전부터 가깝게 지내시던 친구분이시더라구요. 하여간 그때 전적지가 정비되기 전이라 황룡전적지는 잡풀로 우거져있었고, 땅은 진펄이라 질척거려서 걸음을 뗄 때마다 조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랬던 전적지가 지금은 국가 사적으로 아주 말끔하게 정비·단장이 되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난관들이 있었지요?


답) 말해 뭐합니까.(웃음) 전적지 정비를 결정하고, 일 추진에 나서니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먼저 부지를 매입하는 일부터 난항에 빠졌어요. 전적지가 사유지인데 땅 주인이 모두 아홉 명이었어요. 처음에는 버려진 땅이나 진배없어서 매입하겠다고 하니 선뜻 응해서 부지를 확보했는데, 시일이 조금 지나면서 그곳에 뭔가 들어선다는 소문을 나자 땅 주인들이 가격을 턱없이 올려달라거나 아예 팔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하고, 아휴..... 하여튼 장성군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저나 이상식 교수님이 아주 동분서주했습니다. 정비사업을 하면서 진펄인 황룡전적지를 오르내리느라 이 교수님과 제가 버린 신발만 해도 네댓 켤레는 족히 될 것입니다. 한편, 전적지 정비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장성군은 물론이고 인근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등 기관의 지원과 각계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황룡전적지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어요. 저도 그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석하였어요.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1994년 늦봄이었는데, 광주시청 앞 식당에서 추진위원회 회의를 가졌어요. 이상식 교수님이 추진위원회 명의로 개최한 그 회의에 저를 비롯하여 전라남도의회 의장, 광주광역시의회 의장,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등등 모두 여덟 분이 모였어요. 그 자리에서 장성 황룡면 월평리에 위치한 황룡전적지를 정비하고 그곳에 기념탑을 세우는 일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하였어요. 그 무렵 이상식 교수님이 현재까지 전적지 정비를 위한 사업비 5억 원을 확보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제게 장성군에서 2억을 만들어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일단은 알았다고 대답했죠. 그리고 이튿날 제가 군수님께 전적지 정비 등을 위해 2억을 마련해야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군수님이 놀라시더라고요. 1994년 당시 2억 원이면 큰돈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장성군에서 2억 원을 마련했어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업비를 마련하고, 전적지 땅 주인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부지매입을 완료한 후 정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또 문제가 생겼어요. 건설공사 업체에게 그곳을 정비하기 위해 견적을 내달라고 했더니 공사비가 만만치 않은 거예요. 가뜩이나 사업비가 부족한 터여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이상식 교수님이 아주 좋은 생각이 있다면서 좋아하셨어요. 요는 장성과 광주 사이에 육군 31사단이 있잖아요? 이상식 교수님이 그 31사단 사단장님과 안면이 있으니 군부대에 지원을 요청해보겠다는 거예요. 당시 31사단장이 조진희 소장님이었는데 그분이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향토방위사』라는 책도 쓰셨답니다. 그 책을 발행할 때 전남대학에 감수를 의뢰했는데 마침 이상식 교수님이 감수를 맡게 되었다고 해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있어서 이상식 교수님이 31사단을 방문하여 황룡전적지 정비의 필요성을 사단장님에게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어요. 그 결과 31사단에서 대민지원 형식으로 군인들과 장비를 지원해주기로 하였어요. 그렇게 해서 황룡전적지 정비는 대한민국 육군 31사단 소속 군인들과 군장비가 투입되었어요. 문제는, 대한민국 정규군 사단장이 반란군 전적지 정비에 군인과 장비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이후에 31사단장에서 5군단 부군단장으로 좌천이 되고 말았어요. 다들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랐는데 다행히 몇 년 뒤인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어 조진희 소장이 중장으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인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그 때 광주와 우리 장성에서 그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만사 사필귀정이다 그렇게들 얘기하곤 했지요. 하여튼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95년도에 황룡전적지가 지금처럼 틀을 갖추게 되었고, 승전기념탑도 건립하여 제막하였지요. 이상식 교수님 이분 대단한 분이예요. 여기서 멈추지 황룡전적지를 국가사적으로 승격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 결국 이곳을 1998년에 국가사적 제406호로 등재시키셨어요.



 

문) 네, 이상식 교수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왜곡과 축소의 길을 걸어온 갑오년의 역사가 명실상부하게 복권될 수 있었던 같아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한 기념사업 추진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어요. 회장님 이쯤해서 주제를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성과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을 크게 1차 봉기와 2차 봉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서울에서 파견된 조선의 최정예부대 경군(京軍)을 맞아 승리한 장성 황룡전투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황룡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그렇지요. 황룡전투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1894년 정월 동학농민군은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4월 무장기포, 5월초 백산대회 등을 거쳐 전라도 수부였던 전주성, 그러니까 전라감영을 점령하려고 진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은 자신의 휘하의 군대인 전라감영군을 중심으로 보수상과 향병 등을 모집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을 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전투가 바로 정읍의 황토현 전투이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영군을 크게 물리칩니다. 전라감영군을 물리친 동학농민군은 비어 있는 전라감영,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바로 전주방향으로 진격시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태인을 지나 원평에 이를 즈음에 서울에서 조선의 최정예부대 경군(京軍)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지요. 그래서 동학농민군 부대를 되돌려 정읍, 부안, 흥덕, 고창, 무장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영광, 함평 등지에서 농민군 세력을 늘리면서 장성에 이르게 되지요. 그러다가 동학농민군은 이곳 장성 황룡 월평에서 초토사 홍계훈이 경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1894년 5월 동학농민혁명 황룡전투이지요.



 

문) 네, 맞습니다. 동학농민군이 황룡전투를 앞두고 경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을  망설였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전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과 전투를 벌일 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곳 황룡전투에서는 농민군의 심리적 부담감이 한층 더했을 것입니다. 임금이 파견한 군대를 상대한다는 것은 곧 반란으로 인식될 사안이니 부담백배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전에 나서 결국 경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황룡전투가 갖는 의미는 남다른 측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난 한 세기 동안 황룡전투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에 대한 관심은 턱없이 낮았던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그렇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장성 황룡전투 뿐만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이 일제강점기와 굴곡 심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거쳐 오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은 곧 전라도 고부 탐관오리 조병갑을 몰아내기 위한 지역적 사건쯤으로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탓이지요. 실제로 1970년대까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의 조병갑 사건 정도로 기록되어 가르쳐왔잖아요? 그리고 박정희 정권 때와 전두환 정권 때 전북 정읍에 기념사업이 편중되다보니 대중적인 역사인식 또한 동학농민혁명 그러면 전라도 고부, 정읍 이렇게 인식하게 되었던 측면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아주 철저하게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근대 민주주의운동이라는 측면과 특히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여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본군과 대항해서 싸운 민족적 의미를 철저하기 무시하는 입장을 견지했잖아요? 그래서 일본인 사학자나 식민사학자들이 동학농민혁명을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해 일어난 고부농민들의 항거라던가 동학이라는 사교집단의 난으로 왜곡하고 축소했잖아요? 이런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학계의 관심도 저조했고, 당연히 황룡전투에 관심도 일천했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 네, 회장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은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기에 극심한 민족내부의 좌우대립, 한국전쟁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그 이후 자주성이 떨어진 정부와 군사정권의 집권이 이어지면서 1970년대까지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한 세기가 넘도록 반란사건으로, 특정 지역에 국한된 지역적 민란으로 치부되어오던 동학농민혁명이 이상식 교수님이나 회장님과 같은 뜻있는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명실상부하게 그 명예를 회복하는 복권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장님,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요한 사업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매년 5월 27일(양력)이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승일입니다. 이날을 기해서 우리 장성기념사업회는 매년 황룡전적지 내 황룡전승기념탑 앞에 특설무대를 설치하여 동학농민혁명군 황룡전승 기념식을 개최하고, 다양한 문화공연도 펼칩니다. 이 행사를 위해 장성군은 물론이고 장성문화원, 장성농업인연합회 등이 힘을 모아 한마음을 한뜻으로 행사를 펼쳐오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전승행사 풍물길놀이를 시작해서 전승기념식을 갖고, 황룡전투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문화공연 등으로 행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행사는 지역축제처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장차는 지역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나갈 방침입니다. 매년 행사를 펼치면서 조금 아쉬운 것은 장성군만 하더라도 시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의 핵심 중의 핵심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제대로 알리는 일인데, 우리가 매년 개최하는 행사에 청소년 참여가 저조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전라남도교육청 장성교육지원청을 비롯하여 가까운 곳의 광주광역시교육청 등 인근 시군의 교육지원청과 협의하여 많은 청소년들이 전승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는 진펄로 버려져 있던 이곳 전적지를 정비하고, 기념탑을 세우고 국가사적으로 등재시켜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황룡전투의 승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기념관이나 자료관 그런 것이 없어서 그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기념관이나 자료관 건립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나갈 생각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꼭 110년만인 지난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로부터 15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꼭 125년 만인 지난 2019년 2월에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어 이제는 달력에도 5월 11일 칸에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이라고 새겨져 나옵니다.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노력하시는 회장님 입장에서 위와 같은 일들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남다르지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가기념일이 제정된 것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하고 기쁩니다. 기념일이 제정되던 첫 해에는 그러니까 2019년 5월 11일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125년 만에 정부(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념식이 개최되었지요. 그때도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특히나 기념식에 참석하신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께서 하신 기념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 최초 민주주의운동이고, 우리나라 최초 근대민족주의운동이며, 우리나라 근대 최초 반부패개혁운동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하면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디 저뿐이었겠습니까?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그간 모진 어려움 속에서 기념사업을 추진해온 전국의 기념사업단체 임원진과 회원들은 물론이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억울하게 반란군의 후손으로 낙인찍힌 채 살아온 후손들도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워지기는 매일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해 5월 11일 코로나로 인하여 축소하여 정읍 황토현전전지에서 개최한 기념식에도 참석하였습니다. 갑오년의 선열님께서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군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셨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에서 기념식을 추진되니 후손으로서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아쉬운 것은 장성과 가까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때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참석하셨는데, 동학농민혁명기념식 때는 지지난 해와 지난 해 두 번 다 참석하지 않아 좀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신지요?


답) 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말 그대로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뜻으로 자연풍광이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언가가 확연하게 바뀌었을 때 사용되는 사자성어인데,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다가 110만에 특별법이 제정되어 혁명으로 복권되고, 다시 125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이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두고 상전벽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125년 만에 기념일이 제정되었는데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한 세기 하고 다시 사반세기가 지난 뒤 명실상부하게 명예가 회복되고 복권이 되었잖아요? 이 말을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고, 재인식을 추구하여 범국민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기념사업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했을 때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의해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역사적 책무는 막중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직과 예산에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지금까지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갑오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데 더욱 힘을 기울여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임원과 회원 모두 기념재단에서 추진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가겠다는 뜻을 함께 전합니다.



문) 네, 회장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겨울 62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