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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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 48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영태의 손자 송기홍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영태의 손자 송기홍


일시 : 2022. 6. 2.(목) 11시 

장소 : 서울 종로구 여산송씨대종회 사무실



 

문) 이번 호『녹두꽃』유족인터뷰에는 참여자 송영태(宋永泰, 1862~1921) 님의 손자 송기홍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녹두꽃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1894년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셨던 송 영자 태자님의 손자 송기홍입니다. 2002년부터 2007년도까지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때는 저의 조부님이신 송 영자 태자님의 후손으로 활동하지 않고 저의 종조부(宗祖父)이신 송 경자 찬자님의 후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2004년인가? 특별법에 의해 설치된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신청서를 내서 등록할 때만해도 종조부님만 참여자로 신청하면 그 형제는 그냥 다 되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조부님은 신청하지 않았거든요.



문) 조부님이신 송 영자 태자님의 큰 형, 그러니까 선생님의 종조부님이신 송경찬(宋敬贊, 1858~1894) 님의 후손으로서 활동하셨다는 말씀이시죠? “동학군이 고부성을 함락한 후 백산에 돌아와 진을 치고 재도(再度)의 격문을 발한 후로 호남일대는 물론이오, 전 조선강산이 고부백산을 중심으로 하고 흔들흔들 하였었다. 이때 전후로 모여든 장령급(將領級)으로 있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총괄적으로 검열(檢閱)하여 보면 대장 전봉준과 기타 장령격(將領格)으로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오하영, 오시영, 임천서, 강경중, 송경찬, 고영숙....”(오지영, 『東學史』간행본, 대광문화사, 1984. 123p) 기록에 따르면 종조부께서는 백산대회 때 장령급으로 참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알고 계시는 내용이 있으며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저의 증조부(曾祖父) 님의 살림이 넉넉지 못해 종조부님만 교육시켰답니다. 그 덕분에 종조부께서는 태인에 있던 무성서원으로 가서 공부하셨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다음 무장 근동의 마을 사람들이 “송경찬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큰 학자가 되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이전에 손화중 대접주님이 저희 종조부님을 직접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조부님이 손화중 대접주님 아래 무장접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장기포, 백산봉기 등에 장령급으로 참가하신 것이 분명한 것 같아요.



 

문) 네, 선생님 종(宗)조부이신 송 경자 찬자 님 얘기를 조금 줄이고 선생님 조부이신 조부이신 송 영자 태자님에 대하여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셨는지요?


답) 네, 아버지께서는 제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가 살아가면서 핍박을 받을까봐 집안 어르신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아마 제가 16살 때였을 겁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때였는데, 서당 선생님께서 제게 “종(宗)조부님께서 살아계셨으면 큰 학자가 되셨을 것이고, 너의 집안이 대단한 가문이 되었을 것이다. 너의 종조부께서 무장(茂長)의 두령으로 무장기포, 백산봉기, 황토현 전투 등에 참가해서 관군을 물리쳤다. 그때 동학농민군들이 말을 타고 총을 쏘며 아주 위세가 당당하셨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아버지께 서당에서 훈장님이 해준 얘기를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몹시 역정을 내시면서 다시는 그 서당에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더니 그 다음날 저를 데리고 이웃마을의 다른 서당에 데려다주셨어요. 새로 들어간 서당의 훈장님이 쉬는 시간에 모두 방으로 부르시고는 “정도를 걸으며 깨끗하게 살아온 집안이 있는가 하면, 비적들과 같은 동학난에 가담한 집안도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혹여라도 동학난에 가담한 집안과 절대 어울리지도, 아예 상종하지도 말아라.”라고 얘기를 해주셔서 얼떨떨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훈장님이 하신 말씀을 전해 올리니 “그 서당 훈장님이 너를 제대로 가르치겠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렸을 적 자라온 이런 환경 탓으로 저는 2000년이 되기까지 동학난에 가담하는 것은 쌍놈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럴 즈음 아마 2000년도로 넘어온 다음일 거예요. 고창군 무장읍 예전리에 사는 문국환씨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이기화 고창문화원장님의 부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유족들을 찾고 있다면서, 제가 무장접주로 활동했던 송경찬님의 유족인 거 같다고... 하여튼 그때 저희 집안의 족보와 재적등본을 이기화 선생님께 보내드렸더니 열흘 뒤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준비해서 나갔죠. 그 자리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과 지금까지 운영해온 것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 정남기, 손주갑 이분들을 만났어요. 그렇게 해서 부족한 제가 2002년도엔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을 맡아서 활동했어요. 제 집안의 종조부님,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문) 앞서 종조부님께서 무장기포, 백산봉기 때 장령급으로 참가했다는 점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번에는 조부님 그러니까 송 영자 태자 님의 활동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음 합니다. 조부님 활동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백산봉기, 황토현 전투까지 종조부님과 조부님이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조부님께서 무거운 짐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민군 중에 침을 놓는 사람이 있어 침을 맞아보았지만 호전이 없어 결국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후 가족을 돌보라는 종조부님의 권유로 조부님께서는 9월 재봉기 때에는 출정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종조부님께서는 10월 삼례봉기에 참여하여 북상하던 중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다가 패한 후 피신하였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살아생전에 증조할아버지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던 정 부자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이후 나주로 압송되어 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끝내 시신은 거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영자 태자 제 조부님께서는 종조부님이 처형당하신 후 종조부님의 부인, 그러니까 조부님의 형수님이시죠? 저의 조부님과 조모님은 종조부님께서 처형당한 후 형수님을 잘 모시고, 네 명의 조카들을 알뜰히 보살펴서 향리의 사람들에게 ‘송경찬의 아우 송영태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때도 있었고, 부모님께도 효자였고, 다시 없는 형제우애를 실천한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문)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었던 갑오년의 역사가 1994년, 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재인식되기에 이르렀고, 2004년 3월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2004년 9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되어 참여자와 유족을 조사하고 등록하게 되었지요. 처음에 종조부님만 참여자로 등록하셨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조부님이신 송영태 님도 참여자로 등록하셨지요?


답) 네, 조부님도 나중에 참여자로 접수하여 등록하였습니다. 2019년인가? 하여간 접수한지는 4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유족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종조부님만 등록하면 후손들은 유족으로 인정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조부님은 등록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2007년도에 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대회를 개최하던 때였을 겁니다. 그날 우리 유족회 다른 회원들이 제게 ‘조부가 참여자로 확인되어 등록된 것도 아닌데, 무슨... 유족 행세냐’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잘 몰라서 조부님을 참여자로 등록하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을 사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무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장호진님의 손자 장해룡씨가 제 조부님과 자신의 조부님이 서로 매제지간으로 동학농민혁명에 같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해룡씨가 관련 자료를 제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조부님을 참여자로 등록하려고 했으나 유족등록 신청기간이 지나버려서 신청서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고, 법이 개정되어 참여자 조사가 다시 가능해져서 신청서를 접수하여 2020년 참여자로 확인을 받아 등록을 완료하였습니다.



 

문) 성균관에서 선생님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종조부님과 조부님의 업적을 돌에 새겨 후대에 길이 전할 필요가 있다고 기념비를 세우도록 강하게 권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하여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종조부님의 셋째 아들 그러니까 제 당숙께서 종조부님과 그분의 부인 최씨 그리고 조부님에 대한 효자·열녀 통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당숙께서는 한문 서당에 다녔던 저에게 통문을 해석해달라며 건네주셨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요. 그 사이 당숙께서도 돌아가시고... 하여튼 제가 당숙께 받았던 그 통문을 책갈피에 너무 잘 끼워놓은 탓에 어디에 있는지도 까맣게 잊고 그냥저냥 세월이 흘렀어요. 20여년 그렇게 흐른 것 같아요. 그러던 중 어느 해엔가 집안 제사 때 한 어르신들께서 ‘우리 집안이 가난하여 우리가 조상님 앞에 죄를 짓고 있다. 우리 집안에 효자·열녀 통문을 받아놓고도 가난하여 비를 세우지도 못하고 그 통문을 그냥 썩히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깊은 한숨을 쉬셨어요. 그때서야 제가 돌아가신 당숙님께 통문을 받아서 어디엔가 잘 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래서 제사 이후 곧바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집안 곳곳을 뒤져 3개월 만에 통문을 찾았습니다. 책속에 너무 잘 끼워두었더라구요... 20여 년 만에 찾은 거라서 감회가 새로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통문을 찾았던 해가 재단에서 주최한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열렸던 때였어요. 그때 유족회 이기곤 이사장님과 사단법인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전해철 이사장님과 제가 같은 방을 썼는데, 제가 그 통문 얘기를 꺼냈습니다. 제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전해철씨가 통문을 가지고 성균관으로 한번 오라고 그러더라구요. 기념대회를 마친 다음날 곧바로 통문을 가지고 전해철씨와 함께 성균관에 가서 통문을 건네니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장이 “선생님 대단한 집안의 손이시네요. 길가에 비석들이 많지요. 그나마 그 내용들이 가짜들 태반이예요. 그런데 이 통문의 내용은 정말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얼른 비석을 세워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지표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박물관 직원들에게 서류를 잘 처리하라는 당부하셨습니다. 그때 통문을 담당하신 실무자께서 제 문서를 보니 100년도 넘은 문서이라 세월이 많이 흘러 그것이 진본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 문서가 처음 작성된 곳인 전주향교와 무성서원에 가서 통문에 대한 사실여부를 추인받아서 가져오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종친회에 그간의 경과를 얘기하니 100년도 지난 것인데, 전주향교든 무성서원이든 그 통문의 사실관계에 대한 추인이 쉽지만을 않을 거라고 다들 상심하더라구요. 저도 처음에는 힘들겠다 싶어 포기할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가신 당숙님도 생각나고 해서 그래 한번 부딪혀보자 그렇게 마음 먹고 전주향교와 무성서원에 연락을 취하고 찾아갔습니다. 마침 제 사촌처남 중에 정기동이라고 군산대학교 명예교수가 있거든요. 그 조카분이 성균관유도회 전북지부 회장을 역임한 황병근씨와 무성서원 원장 이치백씨, 전주향교 유옥균씨에게 전화해서 통문에 대하여 상황설명을 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제가 가지고 있었던 통문에 대한 사실관계를 전주향교, 무성서원 등으로부터 추인을 받았습니다. 그 뒤 추인 받았다는 사실을 성균관을 가서 확인시켜줬습니다. 그때 성균관에서 이런 사실을 비석을 세워서 후대에도 길이 전하고 현재들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고 다시금 제게 권유를 하셨습니다.



 

문) 아~ 네, 선생님. 통문을 찾아낸 것과 그 통문의 사실관계 등에 대한 추인을 받아낸 과정 등을 들으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선생님 참 애 많이 쓰셨네요. 그렇게 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기 시작했는데, 현재 추진상황은 어떤지요?


답) 작년 늦은 여름에 제가 비석에 새겨 넣을 내용을 일단 정리해서 유족회 손주갑씨 등과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어요. 그 만남에서 손주갑씨가 이이화 선생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분이 계셨으면 비문은 금방 써주셨을 텐데 그러는 거예요. 그러다가 불쑥 작성된 비문을 기념재단 문병학 부장에게 다듬어달라고 부탁해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문부장이 시인이면서 대학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공부했고, 기념사업에도 오랫동안 몸담아온 사람이라 적임자인 것 같다고. 그래서 제가 작년 늦은 가을부터 문부장에게 몇 차례 부탁했어요. 그런데 기념공원 공사다, 국가기념일 기념식이다 뭐다 문 부장이 바빠서 못 밀어붙였어요. 그런데 제 건강이 작년과 올해가 달라서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서 지난 5월 11일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며칠 뒤 정읍으로 내려가서 문 부장을 붙잡고 늘어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비문이랑 다 완성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논산시 양촌에 있는 비석공장에 비문을 새기라고 넘긴 상태입니다. 문제는 비석을 세울 장소예요. 진윤식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님이 지금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요. 저는 기념비를 건립할 장소로 3곳 정도를 생각하고 있어요. 첫 번째는 무장포고가 단행되었던 구암리(공음면 구수마을), 두 번째는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종조부님 생가, 세 번째는 예전리 마을입구 쪽 큰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뭣이든지 다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을 봐야겠지요. 지금 진윤식 고창기념사업회 이사장님이 열심히 알아보고 있으니까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문) 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잘 이루어지길 기원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혹여 빠뜨린 얘기가 있거나 기념재단에, 또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관련 기관 및 단체, 관계자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사실, 재단에는 별로 바랄 건 없습니다. 재단은 재단 나름대로 현재의 명예회복법에 따라 기념공원 조성사업이나 기념일을 제정해서 국가기념식을 매년 추진하고 있고,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최종적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단에는 크게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대신 저는 저희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속된 말로 다른 집안의 후손들은 조상님들의 업적을 돈을 주고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요, 조상님들이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돈을 주고 가짜로 훌륭한 업적을 만드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태에서 우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은 굉장히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참여자 후손들은 정작 조상님들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것에 아쉬움이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분들의 귀하고 숭고한 정신이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늘 대한민국의 밑바탕이 되었잖습니까? 2차 동학농민혁명참여자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박용규씨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 유족들이 이 문제에 대해 조금 소극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괜히 기념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기관 또는 단체들과 실익도 없이 불편한 관계를 만들 게 아니라 우리 유족들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내적으로 합심을 이끌어내 우리 조상님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드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나갈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고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문) 네,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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