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추모관, 전시관(박물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內)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넋을 기릴 수 있는 추모관이 조성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동아시아와 세계사적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전시콘텐츠를 구성·설치한 전시관(박물관)이 조성되었다. 지난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일에 개관한 기념공원 내 추모관과 전시관의 규모는 각각 연면적 225.82m2 과 1078.58m2이다. 전시관은 국립박물관으로 등록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전시관(박물관) 기획의도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All history is contemporary history) 지금으로부터 128년전인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역을 격동시켰던 일대사변이었다. 이 사건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물질문명 중심의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를 전변시킨 거대한 폭랑(暴浪)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외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중심으로 작동하던 동아시아 지역질서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주도하는 질서로 전환하는 기점이었다. 한편, 조선 내부적으로는 낡은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근대 만민평등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 한국 근대 민주주의운동의 시작 혹은 민족주의운동의 뿌리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시기에 빚어진 민족내부의 극심한 좌우대립, 민족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점철된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사교집단 동학비적(東學匪賊)들의 ‘반란사건’ 혹은 특정지역(전라도)에 국한된 ‘지역적 민란’으로 축소·왜곡되었다. 봉건질서를 존속시키려는 전제왕조의 견고한 벽과 물질문명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한국 근현대사가 극심한 굴절과 부침(浮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민족민주운동 선상에서 이 사건을 반봉건, 반외세 기치를 들고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 결과물로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는 기념시설물들로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지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북 전주시 풍남동 ‘동학혁명기념관’, 전남 장흥근 석대들전적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충남 태안군 백화산자락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2022년 5월 11일 정읍 황토현전적지 일원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중심시설로 동학농민혁명전시관(박물관)이 개관되었다.
반란과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인식이 공존했던 20세기를 거치고, 또 다른 세기로 들어선 시점에서 건립된 이번 기념관은 기존의 기념관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할 시대적 소명을 떠안았다. 한 세기(世紀)가 지난 오늘날, 사람의 기본권(人權)과 물질문명을 중심에 둔 소위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수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코로나19 팬더믹, 급격한 지구온난화에 따른 재앙에 가까운 기후변화 등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에 기존의 전시관이 지향했던 관점, 대체로 한국사적 관점에서 사건의 전개과정을 나열하는 패턴을 지양하고, 동학농민혁명사를 한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사적 차원에서 조망하고자 관점을 제시하는 기념관(박물관)으로 전시콘텐츠를 구성하였다. 21세기 지구촌시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인류사적으로 제기된 제반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데 기초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롭게 건립된 전시관이 동학농민군이 추구했던 ‘사람이 하늘이다’는 차원 높은 인본주의 정신은 물론이고, 만생명(萬生命)을 하늘로 여기면서 나눔과 배려를 실천한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정신 등의 현재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글 / 문병학(기획운영부장, 박물관 전시기획 총괄)
동학농민혁명 추모관
"1894 그날의 기억"

추모관 입구
"1894년 그날의 기억", “넋이여, 갑오년의 꽃넋이여” 등의 주제어로 콘텐츠가 구성된 추모관은 복도와 추모관 내부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추모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1894년 그날의 기억’이라는 슬로건 아래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던 주요 전투지를 소개하고 있다.
추모관 입구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넋이여, 갑오년의 꽃넋이여”, “넋이여, 세기(世紀)를 밝힌 꽃넋이여”라는 글씨를 빛으로 연출하여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추모관 내부 벽면에는 2004년 3월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2004. 9.) 때부터 2022년 5월 11일 추모관 개관까지 조사·등록된 참여자 3,600여 명의 활동지역과 함자(銜字)를 자연산 오석(烏石, 충남 보령 웅천석)에 새겨 모셨다.

추모관 복도
추모관 내부 중앙에는 천창(天窓)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이 중앙의 연못 형태로 형상화된 물 위로 내리고 그 빛을 따라 노란색의 녹두꽃이 피어나도록 구성하여 참여자 영령께 헌화하는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참여자 명패가 모셔진 세 벽면 이외에 나머지 한 벽면에는 갑오년의 역사, 동학농민혁명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영상을 배치되었다. 영상의 주요 줄거리는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아낙네부터 마을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난 갑오년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추모관 내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패

동학농민혁명 전시관(박물관)
"1894년 그날의 혁명을 다시 세우다"

전시관 전면
전시관은 ①민중의 힘으로 사회를 개혁하다 ②전국에서 민중 민족 항쟁이 일어나다 ③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④동학농민군의 고난과 희생을 되새기다 ⑤한국 근대 민주정신의 큰 줄기가 되다 등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이번 호부터 5차례 걸쳐 전시관(박물관)을 ‘지면 전시’ 형태로 소개할 예정이다.
Intro 혼란의 시대 1894년

전시관 내(內) 영상
동학농민혁명전시관에 들어서면 전면에 동학농민혁명 주요 메시지를 ‘글꼴 디자인기법’(Typo wall design)으로 연출하였다. 전시관 첫 번째 콘텐츠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침략하던 때의 시대상황을 영상으로 담았다. 사발통문 형태를 영상의 기본바탕으로 삼아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의 이름 대신 아편전쟁, 강화도조약, 텐진조약, 미일수호통상조약, 청일전쟁 등을 배치하여 1894년 전후 조선을 둘러싸고 빚어진 격동의 시대상황을 보여준다.


전시관 내(內) 영상
PART 1 민중의 힘으로 사회를 개혁하다

19세기 후반 거듭된 농민 봉기와 동학사상은 민초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농민군은 스스로 사회를 개혁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힘을 합쳤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 집강소 활동, 제2차 봉기를 거치며 목숨을 건 투쟁 속에서 새로운 민주적 질서의 가능성을 만들어 나갔다. 반일 투쟁이 있던 시기에는 전투에 직접 가담하지 않더라도 신분과 연령, 성별을 막론하고 여러 백성들이 음식을 해 나르거나 첩보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농민군을 도왔다.

▮ 개혁에 나선 민중
사발통문(沙鉢通文), 1893년

사발통문에는 1893년 12월(양력 기준) 전봉준을 포함한 20명이 모여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서명한 문서이다. 탐관오리를 벌하고 전주성을 점령한 후 서울로 진격한다는 내용의 거사계획이 담겨 있다.
○ 사발통문 일부
매일 어지러움과 망함을 노래하던 민중들은 곳곳에서 모여 말하기를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그 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하나.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하나.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침어*한 탐관오리를 징계할 것
하나.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
*효수梟首 형벌의 일종으로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음
*침어侵漁 백성을 괴롭히고 못살게 굶
▮ 봉기에 나선 민중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 | 취어(聚語) 1895년

1894년 4월 25일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봉기할 때 발표했던 포고문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민중의 삶을 얽어매던 각종 폐단의 개혁을 중심에 두고 있다. 원문은 『취어聚語』, 『동비토록東匪討錄』 등에 실려 있다.
○ 무장포고문 일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지를 갈아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 정부와 농민이 함께 세운 자치 기구
집강소執綱所


집강소 김제 원평집강소
1894년 6월,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 자칫 양국의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위기를 맞게 되자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 간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을 만나 ‘관민상화(官民相和)’에 합의하고 나라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후 각 고을 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관과 농민이 서로 도와 체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대규모 민중 운동을 일으킨 백성들이 정부와 협력하여 자치 기구를 세우고 국가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자 한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하다
의안(議案), 1894년

의안(議案)은 1894년 6월 작성된 문서로 갑오개혁의 실시에 앞서 작성된 개혁안의 초안이다. 동학농민군이 요구했던 폐정 개혁안의 일부로 노비제를 폐지하고 천민을 해방하는 신분제 개혁안이 포함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