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국섭의 손자 송종수
일시 : 2022. 8. 4.(목)
장소 : 충북 청원군 진천군 송종수 님 자택

문) 이번 호『녹두꽃』유족인터뷰에는 참여자 송주옥(宋柱玉, 1853~1895) 님의 증손자(曾孫子)이자 송국섭(宋國燮, 1879~1946) 님의 손자 송종수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님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 주자 옥자 님의 증손이자 송 국자 섭자 님의 손 송종수입니다. 저는 1928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네 살인가 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1931년에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정읍 고부면 신중리 이웃 마을, 강고리(江古里) 52번지로 이사를 갔습니다. 고부 신중리를 떠나 강고리로 이사 간 이유는 신중리에 살던 집이 없어졌고, 강고리에 저희 송씨(宋氏) 집안 선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12대 종갓집 종손으로 마침 우리 송 국자 섭자 할아버지가 대목 기술이 있어 집을 지어서 강고리로 이사를 왔습니다. 강고리(江古里)는 고부, 소성, 줄포 가운데 지점 쯤으로 각 십리쯤 떨어져 있습니다. 강고리에서 송 국자 섭자 할아버지께서 훈장님도 하셔서 제가 할아버지께 4살 때부터 초등학교를 10살에 들어가서 3~4학년 때까지 한문을 배웠어요. 명심보감이랑 노래 부르면서 배우는 추구(抽句: 오언절구 한시)를 배웠습니다. 그렇게 강고리에서 살다가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7월 달에 신태인으로 다시 이사를 갔어요. 이사 갈 수밖에 없었던 게 강고리에 4개 부락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종암부락에서 남자들이 주동이 돼서 아주 빨치산 촌이 되었어요. 그 무렵 신태인에서 우리 송 기자 태자 아버지께서 이장을 했었는데 우익 좌익 따질 건 아니지만 비교적 우익이고 해서 눈치를 보고 하니까 살던 마을에서 나왔죠. 그때 지하운동 하는 놈들이 나한테 같이 운동을 하자고 포섭하러 왔는데 나는 독자이니 못한다고 거절했죠. 그 동네 사람들이 1.4후퇴 때 다 남쪽으로 도망 가버리고 나는 반대쪽 신태인으로 왔죠. 그러니까 1950년 7월에 신태인으로 이사를 와서 73년까지 23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후 1973년 말에 서울로 갔다가 2009년에 여기 충북 진천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문) 네, 선생님의 고향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은 동학농민혁명과 뗄 수 없는 아주 깊은 인연이 있지요? 사발통문이 발견되어 마을이 주목을 받은 게 1968년이었지요?
답) 네, 제 고향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은 동학농민혁명과 인연이 깊죠.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점인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곳이니까요. 거기다가 저희 집안에서 발견된 사발통문을 1968년 12월 4일 제 아버지 송 기자 태자께서 신문에 발표하면서 국내 뿐 아니라 일본에서 기자나 역사학자 등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문) 1894년 1월 10일(양력 2. 15.) 고부농민봉기는 동학농민혁명 도화선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데, 이 고부농민봉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갑오년 직전 해 그러니까 1893년 계사년과 그 앞의 해인 1892년 임진년 전후의 나라 안팎의 시대적 상황과 고부군을 둘러싼 대내외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계사년(1893) 당시 선생님 집안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답) 송 국자 섭자 할어버지가 1879년생이시니까 1894년에 16세였지요. 그때 갑오년에 저희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나서 다 흩어졌어요.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을 수탈하자 고부농민들이 일어나 관아를 쳐들어갔어요. 조병갑은 도망가 버리고, 후임으로 박원명 군수가 와서 민심을 달래니까 고부농민들이 죽창을 내려놓고 다시 집에로 돌아가서 민란이 끝나는가 싶었죠.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가 와서 동학 교인들을 잡아들였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도 족보를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저희 증조할아버지이신 송 주자 옥자께서 묻었겠죠? 나중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현몽을 해서 족보 위치를 찾아냈어요. 지금은 그 족보를 제 아들이 가지고 있어요. 송 국자 섭자 할아버지는 갑오년 이후에도 제가 네 살 때까지 그러니까 동학농민혁명 이후 30년 넘게 신중리에서 계속 살았어요. 신중리에서 무엇을 하시고 살았는지는 잘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학식이 있어서인지 동네 구장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신중리에서 강고리로 이사를 온 후인 1946년 2월 1일에 돌아가셨어요.
문) 사발통문 서명자가 모두 20명 중에서 6명이 송씨 일가(一家)입니다. 그 중에서 서명자 송두호(父) 님과 송대화(子)·송주성(子) 님이 부자지간이고, 송주옥(父) 님과 송국섭(子) 님이 부자지간입니다. 당시 관련 자료들을 보면 신중리 주산마을의 송 씨가 일찍부터 동학에 가입하여 활동한 내력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서명자 중 송 씨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점에 대한 사항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사발통문을 발견한 후 서명자 20명 중 저희 집안 어른들(송주옥, 송국섭, 송두호, 송대화, 송주성, 송인호)이 6명이나 된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그 후손들을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005년에 제가 유족 등록을 신청할 무렵 집안 내력을 많이 찾아봤어요. 송 국자 섭자 제 할아버지는 당신의 부친이신 송 주자 옥자님과 종조부이신 송두호 님과 동학농민혁명 때 같이 활동하였고, 옥에 갇혔다가 집에 돌아왔다고 해요. 집에 돌아와서 보니 집안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재산은 다 없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송 국자 섭자 할아버지는 혁명이 끝난 고부에서 살면서 천도교 교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셨습니다.

문) 아, 그러셨군요. 그럼 사발통문에 대해 좀 더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발통문을 세상을 알린 분이 선생님의 아버님이신 송 기자 태자 어른이셨는데, 사발통문 발견 경위와 사회적 반응 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답) 사발통문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먼저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신태인에 살고 있을 때, 그러니까 사발통문이 발견되기 5년 전인 1963년 10월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정읍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웠습니다. 그때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고 갑오 동학난을 갑오동학혁명이라고 부르면서 탑을 세운 것입니다.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 열이틀 전에 이 기념탑 제막식이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 박정희가 유세를 하러다닐 때 “내가 한강 변을 건널 때 구한 말 부패한 관리들을 쓸어내기 위해서 일어난 전봉준 장군 심정 같았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죠. 그렇게 해서 정읍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세워지니까 “동학”이란 말들을 많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동학난(東學亂)”이라고 해서 우리 집안이 동학농민혁명에 많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는 저한테 동학농민혁명 관련된 얘기를 일절 안 해줬으니까요. 그렇게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세워진 이후 1967년 말 정읍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그 다음해부터인가 갑오동학문화제가 해마다 열렸지요. 정작 동학농민혁명 그러면 고부의 저의 선친(先親)이신 송 기자 태자 분이 중심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렇지가 못하고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뜻도 모르고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 회원이라면서 떠들고 난리를 치고 다니고 그랬어요. 그때 저의 송 대자 화자 할아버지(종증조부)의 아들 송 후자 섭자 할아버지(종조부)가 신중리에 계속 살았어요. 집안사람들이 후자 섭자 할아버지(종조부) 집에서 족보를 내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 모양이에요. 그 때 족보 속에서 무슨 종이가 우리 아버지(송기태) 눈에 번쩍 뜨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그게 사발통문인 거예요. 그때가 추울 때인데 1968년 음력으로 10월 15일 (양력 12월 4일)에 발견되었죠.
문) 사발통문이 세상 밖으로 나온 이듬해 신중리 주산마을 앞에 ‘동학혁명모의탑’이 건립되었는데, 어떻게 건립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이후 경과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저의 아버지(송기태)께서 고생고생해서 사발통문에 기록된 후손을 다 찾았어요. 후손들을 찾은 다음에 뭔가 사업을 해야겠다 싶어서 탑을 세우기로 하고 쌀 한가마니씩 내라고 하였지요. 그때 당시는 먹고살기도 힘든 때였기 때문에 잘 못 내니까 제 아버지께서 사비를 들여 1969년에 탑을 세웠어요. 그래서 빚도 지고 그랬어요. 결국 아버지께서는 71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힘들게 1969년 12월 1일인가?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졌어요. 그 탑 뒷면 비문을 제가 썼어요. 그리고 사발통문을 그 탑 안에 묻었어요. 사발통문을 왜 탑 안에 왜 묻었는지는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절에서는 사리 같은 것은 탑에 넣듯이 동학혁명모의탑 안에 사발통문을 함께 넣었던 것 같아요.

문) 네, 동학혁명모의탑을 세우는데 선생님의 아버님께서 많은 노력을 하셨군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동학농민군이 직접 남긴 자료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측면에서 필사본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발통문의 사료적 가치가 아주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5년 12월 28일에 사발통문과 일괄문서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요. 문화재 지정 경위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사발통문 발견 소식이 신문에 기사로 나가니까 정읍군이나 정읍지역에서 활동하던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 등에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그게 가짜니 뭐니 하니까 문화공보부에서 진위여부 감정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탑에 넣었던 사발통문을 다시 꺼내 감정을 했죠. 그때 이 일을 수행한 감정위원이 이용직 박사였는데, 감정 결과는 “진위여부는 확정할 수는 없으나 종이 재질이 그 당시 것으로 판단되고, 먹의 색깔 등으로 봐서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고 글씨체가 한사람의 글씨체로 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때 당시에는 농민들이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 사람이 대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할 가치는 없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니까 지방문화재로는 지정하길 바란다.”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나중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사발통문을 독립기념관에 기탁했다가 찾아온 적이 있지요? 이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탁하셨는데, 그 경위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사발통문은 내가 가지고 있다가 독립기념관에 기탁했었죠. 독립기념관으로부터 기탁 요청이 왔던 걸로 기억해요. 팔십 몇 년인가 아버지 제삿날 7월 5일에 독립기념관에 우리 여동생 둘이랑 같이 가서 기탁을 했어요. 그런데 1994년 신중리 주산마을 앞에 세워놓은 모의탑이 없어지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어요. 하여간 그런 과정에 독립기념관 측에 반환요청을 했고, 그 뒤 2003년도엔가 전주역사박물관인가? 빌려줬다가 나중에 제 아들(송택렬)과 상의해서 같이 2015년 2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사발통문과 일괄문서 4종(송두호 교장 임명장, 송대화 대접주 임명장, 이왈수 별교장 임명장, 교장 임명장)을 기탁하게 되었지요. 기탁을 받은 후 재단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2015년 12월 28일 사발통문과 일괄문서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로 지정하였지요.

사발통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2015.12.28. 지정)
문) 선생님, 말씀 중에 모의탑이 사라진 해괴한 일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탑이 1969년 신중리 주산마을 앞에 선생님 집안에서 세웠던 ‘동학혁명모의탑’이죠? 그 경위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정읍 고부 주산마을(대뫼)에 시제를 모시러 매년 갔었어요.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니까 가면 신중리에서 하루 묵고 왔어요. 이후 교통이 좋아져서 당일치기로 주산마을(대뫼)을 들리지 않고 강고리를 곧장 가곤해서 모의탑을 자주 보지 못했어요. 그러던 93년 봄, 지금 주산마을 앞에 있는 모의탑 자리에 도로가 생긴다는 말이 있어서 가보았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모의탑이 없어지고 그 기단부인 밑동만 남아있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탑의 행방을 알아보니 임두영이라는 사람이 주산리(대뫼) 마을회관 앞 무명동학농민혁명위령탑이 있는 곳으로 옮겨져 있더라구요. 하여간 그래서 그 이듬해인가? 모의탑을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았어요. 새로 옮겨 놓으면서 기단을 한 단 더 높였어요.
동학혁명모의탑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문) 네, 모의탑이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온 적이 있었지요. 사발통문을 발견하여 언론에 공개하고, 다시 이듬해 동학혁명모의탑을 건립하는 과정 등등을 겪으면서 여러모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지요? 하시고 싶은 말씀 많으실 텐데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사발통문이 발견된 후 이와 관련된 이런 저런 얘기들이 수없이 많이 오갔습니다. 그 중에는 사실과 맞지 않은 내용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이렇게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사발통문과 관련하여 궁금한 내용이 있거나 그러면 저한테 확인을 요청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고부에 계속 살았다면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정확한 내용을 전달했을 텐데 신태인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주산마을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설명할 기회를 많이 놓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문) 선생님께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무렵부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에 참여하셨지요? 유족회 관련한 내용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저는 처음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정읍 주산마을에 살고 있는 송기평 씨 집에 가서 얘기를 나누면서 유족회 손주갑 씨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때서야 유족회가 있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제가 1994년 서울에서 살 때 서울 종로(공평동) 유족회 사무실을 찾아가 손주갑 씨를 만났어요. 손주갑 씨가 사발통문 서명자 중 한 분인 손여옥이라는 분의 손자잖아요? 그 후로 손주갑 씨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관련하여 활동에 참여해왔습니다.

문) 네,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처럼 오래오래 건강하실 것을 기원합니다. 끝으로 마무리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참 격세지감(隔世之感)입니다. 박정희가 혁명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반란이라서 입도 뻥긋 못하고 살았는데, 1960년대 황토현 정상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진 후 그래도 내놓고 갑오년의 역사를 얘기할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제대로 빛을 받지 못한 채 여전히 반란으로 치부되었잖습니까? 그러다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성장하였고, 19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백주년을 맞으면서 전국적으로 기념사업단체가 창립되어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전변되었잖아요? 그래서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까지 제정되었잖아요.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니까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애를 쓴 역사학계나 기념사업을 추진해온 기념사업단체 관계자,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문) 네, 선생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