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정신적 지주 김덕명 장군
김석태 참여자 김덕명 장군의 증손

 
문) 안녕하십니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전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왜곡되고 축소된 채 뒤안길에 묻혀져있던 김제의 동학농민혁명사가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김제원평지역에도 기념사업단체를 창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현재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아 고생하고 있는 최고원 씨를 주축으로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후 지난 4년 가까이 이사장직을 맡아 수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2013년 12월에는 전국농민혁명유족희 회장을 맡게 되어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끌었던 김덕명 장군 후손으로서 유족 현창사업에 기여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2015년 3월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직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활동하고있습니다.
문) 김덕명 장군님의 활동사항에 대해 어떤 분께서 전해주셨습니까?
답) 저희 조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부친께 니의 할아버 지가 매우 훌륭한 분이셨다고 한다. 그분의 행적을 밝혀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에 부친께서는 증조부님 관련 자료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부산법원에 증조부님 관련 자료가 있디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찾아가 증조부님의 사형판결문을 가져오기도 하셨습니다. 또 부친께서는 증조부님에 대한 추모집을 발간하시는 등 조부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저도 부친께서 말씀해 주신 것을 통해 층조부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부친께 증조부님 얘기를 들었던 때는 제가 마흔 살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까지만해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일반적으로 동학란이라고 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증조부님께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거의 몰랐습니다. 이후 증조부님에 대한 자료와 서적을 찾아보고 공부를 해가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무렵쯤에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부친께서 말씀해주신 김덕명 장군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답) 증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 주요 지도자 중 가장 연장자셨으나 한발 뒤로 물러서서 전봉준 장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참모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뤄볼 때 증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군 전체의 멘토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전봉준 장군의 어머니가 언양 김씨, 저희 집안에서 출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혈연의 끈끈함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당시 언양김씨 집안은 전라감사도 부임하면 인사를 다녀갈 정도로 대단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증조부님께서 지역에서 덕망이 높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위해 합세하는 사람이 많았고, 군자금을 모금할 때도 개인적인 감정이 가미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 증조부님께서는 이들에게 사람을 헤쳐서는 안되고 군자금을 모금할 때도 꼭 필요한 만큼만 거둬들이라 말씀하셨다고합니다. 우금티전투 패전 이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11월말에 벌어진 원평구미란전투, 태인전투 이후에는 원평의 집강들에게 자신을 구명해달라는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강들은 증조부님을 살려주면 자신들이 죽을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도움은 줄 수 없지만 만약 체포되면 자식들은 살려 준다 약속하고 곧장 관군에 신고해 증조부님을 체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집강의 사람들은 증조부님과 한 약속을 지켜 처형된 증조부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할 수 있었고,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후손들을 돌봐줬다고 합니다.
문) 김제 원평은 동학농민혁명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답) 동학농민혁명사에 김제 원평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제 1차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동력이자 든든한 바탕이 된 곳이라는 점입니다. 증조부님께서 혁명의 전반적인 부분을 총괄하시면서 여러 지역에 걸쳐 활동하셨지만 그 본거지로 원평을 삼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물적자원의 대부분을 증조부님께서 재산을 끌어 모아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전 해인 계사년(1893년) 충북 보은에서 보은집회가 열리던 때 원평에서도 집회가 열렸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전봉준 장군을 포함한 변혁 지향적인 동학교도들이 참여한 이 집회는 동학농민혁명 실행 가능성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였다고 봅니다. 동학농민혁명군 주력부대가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한 후 밀리고 밀려 후퇴하다가 재기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원평구미란이었다는 점 또한 우연한 일로 봐서는 안될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배수진을 친 것은 농민군이 이곳을 든든한 근거지로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마저 패배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이 재기하고자 했던 꿈은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원평구미란전투에서 패배한 다음날 태인으로 후퇴하다가 태인 성황산 부근에서 또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힘없이 무너져 주력부대를 해산하게 되었잖습니까? 즉 동학농민혁명은 원평에서 시작해서 원평에서 끝났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문) 현재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김덕명 장군님의 묘역은 어떻게 조성되었습니까?
답) 증조부님께서 처형되신 이후 원평 집강의 사람들이 시신을 모셔와 매장했던 곳은 금산면 장홍리 은곡마을이었습니다. 은곡마을에는 고조모님 산소가 있던 곳인데 바로 그 아래 증조부님을 모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이 워낙에 높고 깊고깊은 험한 산속이라 성묘라도 갈려면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어느 정도 길을 정비한 다음에야 갈 수 있을 정도로 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리가 소홀해지고, 또한 조상님의 산소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후손들이 산소를 찾기조차 힘들 것 같은 상황이어서 2007년에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현재의 위치에 가족납골당을 만들어서 합장하였습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당시 향토사학자 최순식 선생께서 “곧 국가에서 김덕명 장군님 묘역을 성역화해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만 워낙에 험한산골짜기에 묘역이 있어서 가끼운곳에 가족묘를만들어서 이장(移葬)을 했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주요한 지도자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사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훨씬 더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서지 않아도 될 자리에 스스로 나서셨던 것은 분명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극심하게 부패한 조선왕조 말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 답답한 세상을 혁파해야겠다는 각오를 굳히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당시 증조부님과 같은 상황이라면 가족을 두고 죽을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필부(匹夫)라면 그런 일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봐야겠지요. 역설적으로 증조부님께서는 참으로 대장부였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개인의 안위보다는 고통 받는 백성들과 함께 의기를 들어올린 증조부님의 결단은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크게 일조했다고봅니다. 한편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은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서 보국안민하고자 봉기한 것이지 왕을 끌어내고나서 자기들이 왕권을 쥐려고 한다는 논의 등을 전혀 한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역적이라는 인식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진짜로 참된 애국자들이 바로 동학농민혁명군이지요. 역적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문) 지난해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제8대 회장으로서 저희 재단 천도교와 함께 120주년 기념대회를 공동개최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당시의 소감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답) 여담이지만 처음 12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하게 치른다고 들었을 때 꼭 120주년에만 큰 행시를 할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매해 성대하게 치러져도 부족하지 않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제 120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대회를 되돌아보자면 지금까지의 기념행사 중 그처럼 모두가 힘을 모아 일사분란하게 행사를 진행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재단과 유족회 , 천도교가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하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화합의 계기가 있었기에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사업 추진 역시 재단과유족회, 천도교, 학자대표 4단체가 6월 11일(전주화약일)을 국가기념일 단일안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번에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제정추진위원희에서 어렵게 합의를 이끌어낸 날로 국가기념일이 정부에 건의되어 서둘러 제정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참여자 분들의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해서나 기념사업의 새로운 단계로 발전을 위해서나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