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선운사 마애석불 전경
고창, 전봉준 장군 태생지이자 무장기포가 단행된 곳
고창지역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894년 당시 무장현, 고창현, 흥덕현으로 구분되어 있던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큰 전투나 사건은 없었지만 위로는 고부와 정읍, 부안과 인접하고 아래로는 장성과 영광, 법성포, 나주 등과 인접한 곳이다. 이런 특수성으로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밑바탕이 되었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 때는 든든한 후방기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동학교단의 손화중 대접주는 갑오년 당시 무장지역을 근거지로 호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세력을 거느렸다고 한다. 그래서 1894년 정월 고부농민봉기 발발 이후 3월로 접어들면서 신임군수 박원명 회유와 안핵사 이용태의 무차별적 진압으로 고부민군이 해산하자 전봉준은 손화중을 찾아가 농민봉기의 확대를 꿰한 것으로 확인된다.
손화중과 농민봉기 확대의 합의를 이끌어낸 전봉준은 마침내 3월 20일 무장현 동음치 당산마을(현재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서 ‘무장포고문’을 공포하고 제1차 동학농민혁명 대장정에 올랐다. 무장기포 후 동학농민군은 곧장 고부관아를 재점령(3.23)하고, 여기에서 3일을 머문 뒤 26일경 고부군 백산(현재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으로 나아가 동학농민군 대오를 확대·재편하는 백산대회를 열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
● 보물 제1200호(1994. 5. 2.)
이곳은 1892년 8월 동학교단 무장 대접주 손화중 포(包)에서 마애석불 배꼽에 감춰진 비결(秘訣)을 탈취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며,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와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미애석불은 선운사 도솔암 서편 칠송대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혹은 조선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불상의 크기는 높이 5미터, 폭 3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석불상이다.
이 미륵상은 3천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의 진상(眞像)으로, 그 배꼽에 신비스런 비결이 숨겨져 있는데, 이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곧 나라가 망하는 날이라는 얘기가 전해져왔다. 그런데 1892년 임진년 8월 손화중 포에서 석불의 비기를 탈취하였고, 그 후 손화중 포에 동학교도 입도가 급증했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결 탈취사건을 계기로 동학에 적극적으로 들어왔음을 엿볼 수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갑오년보다 2년 앞선 임진년(1892) 전후 시대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조선의 국내정치는 부정부패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이 체결된 후 외세의 경제적 침략이 노골화했다. 개항한 지 16년이 지난 1892년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따른 폐해로 농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여기에 임진왜란 300주기라는 암울한 인식이 더해져 반일정서가 드높아졌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경북 산간지역과 태백산, 소백산에 은거하던 해월 최시형의 포교가 188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삼남지방(전라·경상·충청)으로 확대된 것도 이런 사회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892년의 대내외적 정치정세 속에서 손화중 포에서 선운사 석불비기 탈취를 결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의 측면에서 장편소설 『녹두장군』(전12권, 송기숙)을 석불비기 탈취사건으로 시작한 작가의 역사인식이 놀랍다.
송기숙의 장편소설 『녹두장군』 중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간짓대를 가지고 온 사람만도 50여 명이었다. 실없이 몽둥이를 들고 오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모두 도솔암 건너편 절벽 밑으로 모여들었다. 바위에 새겨진 미륵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조잡하게 새겨진 미륵의 얼굴은 어찌 보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비결이 들어있다는 미륵의 배꼽은 예사 배꼽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참 위로 올라가 가슴팍 한가운데 있었다.
“우선 사다리부터 얽읍시다.”오하영이가 앞장을 서서 일을 시켰다. 교도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대를 가져오는족족 새끼로 사다리를 얽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이 되자 동학 도인들이 3백 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사다리를 다 얽었을 때는 어둠이 깔려오고 있었다. 한쪽에 모닥불을 피우고 댓가지로 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얽은 사다리를 (마애석불) 절벽에 걸었다... 몸이 날랜 젊은이가 하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사다리 한쪽 끝에 횃불을 달아맸다. 오하영이가 나섰다. 미리 마련해 온 끌과 망치를 옆구리에 차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3백여 명의 교도들은 숨을 죽이고 쳐다보고 있었다. 모닥불에서 댓가지 튀는 소리가 한결 요란스러웠다. 오하영이는 끌과 망치로 배꼽을 쪼기 시작했다. 횟가루가 우수수 쏟아졌다. 동학도들은 숨이 멎어버린 듯했다... 오하영이가 망치질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쑤시는 것 같았다. 가까이 섰던 가운데서는 겁먹은 눈으로 미적미적 뒤로 물러서는 사람도 있었다. 벼락이 떨어질까 겁이 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이놈들!”아래쪽에서 또 중들이 한떼 악을 쓰며 쫒아오고 있었다. “천벌을 맞지 못해 환장했느냐? 그만두지 못할까?”... “이놈들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손을 대느냐?”젊은이들이 쫓아갔다. 중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또 한바탕 드잡이판이 벌어졌다. 오하영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손만 놀리고 있었다. 무얼 품속에 챙기는 것 같았다... 오하영이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하영은 손화중을 한쪽으로 따냈다. 둘이 뭐라 한참 속삭였다. 무얼 주고받은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손화중이가 군중들 앞으로 나섰다. “우리들 일은 끝났소. 이제 돌아갑시다.”손화중이가 군중들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러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접주들이 손화중의 뒤를 따랐다...
다음날부터 이 소문은 날개 돋친 듯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소문이 소문이다 보니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금방 이씨조선이 망하고 손화중이가 임금 자리에라도 올라앉을 것같이 세상 사람들은 들떠버리고 말았다. 다투어 동학에 입도하는가 하면 동학도들을 만나면 차첩 받은 외삼촌 대하듯 했다. 동학도들은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갔다.
송기숙의 장편소설 『녹두장군』(전12권, 1989, 창작과비평사) 1권 21~24쪽 중에서
전봉준생가

전봉준 생가 (항공사진)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 59번지
전봉준은 1855년 12월 3일(음력)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번지에서 태어났다. 당촌은 갑오년 당시 천안전씨 20여 가구가 살던 집성촌이었다. 아버지 기창(基昶, 1827-?)은 창혁(全彰赫)으로도 불리는데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다. 전봉준의 어릴 때 원래 이름은 철로(鐵爐)였는데, 나중에 병호(炳鎬)·봉준(琫準)으로 바뀌었다.
당촌마을은 뒤로는 해발 4백 미터의 화실봉이 있고, 앞으로는 인내(川)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마을이다.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체구가 작으면서도 다부졌고, 두 눈은 바위라도 녹일 듯 광채를 발하는 차돌멩이였다. 전봉준은 이곳 당촌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3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고부로 이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고창군에서 1998년 생가 터 부지 2,813㎡를 매입하고 2000년에 생가복원을 위한 학술용역을 실시, 이를 바탕으로 2002년 현재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이 때 마을 서편에 있는 선대(先代) 묘소를 정비하고 돌비 1기도 세웠다.
무장기포지

무장포고문 필사본
●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당산마을 일대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를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진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조병갑의 잉임(仍任)이라는 돌발적인 상황에 따라 급하게 봉기를 한 까닭에 인근 지역의 호응이 이루어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가 이루어지고 안핵사 이용태가 강경진압에 나서자 봉기에 나섰던 고부 농민들이 3월 3일 무렵부터 해산하기 시작하였고, 3월 13일에는 완전히 해산했다.
이에 전봉준은 50여 명과 함께 무장의 손화중 포로 몸을 피한 후 전국적인 농민혁명의 필요성을 역설, 전격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3월 16일부터 무장현 당산마을로 인근 지역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3월 20일, 그 숫자가 4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마침내 무장포고문을 공포, 보국안민창의기(輔國安民倡義旗)를 들고 혁명의 대장정에 올랐다.
한편, 이곳 당산마을은 동학접주 송문수(宋文洙)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에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모의했던 직후인 1893년 12월 10일경 이곳 당산마을로 내려와 손화중, 정백현, 송문수 등과 전라감사의 폭정에 맞서 거의(擧義)할 것을 모의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8,065㎡(2,440평) 부지에 무장포고 기념탑, 농민군 훈련장, 아홉 줄기 느티나무, 3대 장수를 상징하는 세 그루 소나무 등의 기념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여시뫼(狐山)봉(왕제산)
● 전북 고창군 공음면 신대리 8번지 일원
1894년 4월 6일-7일에 황토현에서 보부상 등이 포함된 전라감영군을 크게 물리친 농민군은 4월 8일 고창을 점령하였다. 다음날인 4월 9일 오후 4시경 무장에 도착한 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이었는데, 무장 관아에서 10里 쯤 떨어진 여시뫼(狐山)봉으로 부대를 옮겨 설진(設陣)하여 이곳에서 3일간 머물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한 곳이다.
무장읍성 및 관아

무장읍성 및 관아 (항공사진)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6번지 일원
● 무장읍성 / 사적 346호(1991. 2. 26.)
● 동헌·객사 / 전북 유형문화재 제34, 35호(1973. 6. 23.)
무장기포를 단행한 동학농민군은 무장읍성을 공략하지 않고 곧바로 고창, 흥덕, 부안, 정읍 등지를 거쳐 고부관아를 점령한 후 백산으로 나아가 백산대회를 열고 부대를 확대재편한 후 전주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던 중 전라감영군과 서울 경군의 동태를 파악한 후 남하하던 중 4월 6일과 7일 황토현에서 감영군을 크게 물리치고 4월 9일 무장에 도착하였다. 무장읍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죄수 40여명을 풀어주고, 동헌과 공해(公廨)를 파괴하였다. 이때 군기고를 파괴하여 화약과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성내 평판이 나쁜 양반지주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무장읍성의 객사나 현아 건물 등은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현재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고창읍성

고창읍성 (항공사진)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9
● 사적 제145호(1965.4.1.)
무장기포 후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점령한 곳은 고창현이었다. 이런 사실은 자신들이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이 약속한 것으로 보이는 구폐교정절목(捄弊矯正節目)이 있었기에 해산했는데 다시 난민들을 체포하니 전라감영으로 가서 감사 김문현과 안핵사 이용태에게 그 연유에 따지겠다는 주장이 담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이후 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3월 21일부터 정읍과 고부 혹은 사포나 줄포 방향으로 이동하였는데 농민군이 흥덕에 들어간 것은 3월 22일이었다.
한편, 1894년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크게 물리친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의 경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로를 돌려 남하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고창읍성으로 들어가 옥에 갇혀있던 동학교도 7명을 석방하고 군기고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또한 호적 등 장적을 거두어 조사하기도 하고, 성 앞에 있는 불량한 토호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고창읍성은 모양성(牟陽城)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백제 때 고창지역 지명이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완공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다.
손화중 도소
● 전북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276-1
손화중은 동학에 입도한 후 자기 고향인 정읍 음성이 아닌 부안에서 처음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정읍 농소리(현 정읍시 농소동), 입암면 신면리 등을 거쳐 본가가 있던 음성에서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장으로 거처를 옮겨 포교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처음에는 무장 읍내 포접소를 두고 활동하다가 나중에 양실마을로 옮겼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양실마을을 근거지로 삼아 동학을 전파하던 손화중은 괴치리 최부잣집으로 도소(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276-1번지)를 옮겼는데, 그 시기를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무렵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괴치리 도소는 1894년 당시 본채와 사랑채가 ㄱ자 형태의 집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그 자리는 복분자밭으로 변해 있다.
손화중 피체지

손화중 피체지 (수강산 산당)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120
이두황의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鎽日記)에 “(12월) 11일, 토병들과 힘을 합쳐 손화중을 고부군 부안고면(扶安古面) 수강산(壽江山) 산당(山堂)에서 잡았습니다.”라고 손화중의 체포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손화중은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후 대세가 기울어지자 수강산 산당 이씨 재실로 피신 중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옥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무경, 처남 유용수도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또한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소식까지 접한 그는 재실지기 이봉우를 시켜 자기 위치를 알렸고, 1894년 12월 11일 체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강산 산당은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120번지에 위치한 전주이씨 재실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재실은 이진문의 호를 따 침명재(枕溟齋)라고 부른다. 침명 이진문은 1556년 12월 27일 출생하여 1635년 9월 13일 생을 마감한 사람인데 그의 묘소는 수강산(225.8m) 자락인 어옹산자락(또는 봉오산)에 있다.
한편, 최근 ‘수강산 산당’이 그동안 알려진 부안면 안현리 120번지 소재 이씨 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새롭게 제기된 주장은 현재 부안면 소재지에서 선운사 쪽으로 옛길을 따라가면 저수지가 있는데, 그 저수지 끝부분에서 질마재 쪽으로 100여 미터 부근에 소재한 우측 마을의 안쪽 골짜기가 손화중 장군 피체지라는 내용이다.
정백현 생가

정백현 생가 (항공사진)
● 전북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상예마을) 222-1
정백현은 1869년 10월 23일(음력)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상여마을에서 정만원과 순천박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약봉이다. 동학농민혁명 백산대회 때 비서(秘書)의 직책을 맡아 격문, 통문, 행동규약, 폐정개혁 등을 작성하여 진중에는 물론 전국에 띄우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이어 백산에 집결할 때 비서로 송희옥, 정백현이 등장하는데, 이 두 사람은 전봉준의 직속 심복이었던 셈이다. 정백현은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에서 패하자 가족을 무장면 옥산리 가라실로 이주시키고 홀로 고창 신촌마을 친구인 봉정범의 집 골방에 은신하였다. 이후 서울로 피신하여 이전에 교류하던 판서 신헌구, 참판 이근용, 이중하 등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동학로(東學路) -동학농민군 진격로-

무장기포지 → 소숙재 → 무장읍성 → 무장향교 → 첨금정 바위 → 월증마을 → 끄렁재 → 깨진바위 → 사신원 → 임낸보 → 운곡 람사르 습지
참고자료
· 오지영, 『동학사』, 대광문화사, 1984.
· 송정수, 「전봉준의 가계와 출생지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12, 2000.
· 이기화, 「전봉준의 가계와 태생설에 대한 재조명」, 『동학학보』 8, 2002.
· 「동학란과 전봉준 장군 -진중측근자 고 김흥섭 옹의 회고」, 『중앙일보』 1965. 11.
· 「巡撫先鋒陳謄綠」,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2』,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隨錄」,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林下遺稿」, 「甲午略歷」,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5』,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 「兩湖右先鎽日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 「全琫準供草」,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4.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 -동학농민혁명 제118주년 전국학술대회』, 동학학회, 2012.
· 『전봉준 장군 생가 터의 역사적 의의와 활용 및 보존방안』,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