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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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열기
2014년 여름 16호
무안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과 발전⋅확산을 위하여

  무안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과 발전⋅확산을 위하여


참여자 최선현의 증손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최효섭



 


문) 최효섭 사무국장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으로 활동하셨던 최선현 증조부님의 증손 최효섭입니다. 2011년 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기념사업회 발기 당시부터 사무국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 세 분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을까요?


답) 저의 증조부이신 최선현 증조부님과 형인 최장현 증조부님, 그리고 종제인 최기현 증조부님 세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활동하셨습니다. 최선현, 최장현 증조부님은 무안의 해제와 함평의 접주셨고, 최기현 증조부께서는 주로 형들을 도우며 활동하셨습니다. 특히 최선현 증조부께서는 농민군 훈련대장으로 해제면 석산 민대들판에서 동학농민군들의 훈련을 시키셨다고 합니다.


  당시 해제면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한적한 마을이라 눈에 띄지 않았고, 인근에는 임치진이라는 수군진지가 있어 각처 농민군들이 육로보다는 편리한 해로를 이용하여 해제 석산으로 모여들어서 훈련을 받은 후에 해제면 대사리의 닭머리나 송산리의 도리포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영광이나 함평 등지의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이때 서남부 동학농민군 지도자이신 배상옥 장군께서 훈련장을 자주 찾아오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에 기록된 내용 중 1894년 11월 고부의 부자가 해제면의 도조를 거두러 왔다가 최문빈(최장현)의 저지로 돌아갔다는 사료로 보아 증조부 세분이 가난한 농민의 편에 서서 활동하셨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세분은 나주성 함락을 위해 고막포 전투에 참여하셨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들에게 패하게 되었고, 배상옥 장군의 해산명령에 따라 고향인 해제면 석산부락에서 숨어지내다 인근마을 주민의 밀고로 체포된 후 나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셨다고 합니다.



문) 그분들의 참여사실에 대해 어느 분께 전해 들으셨나요?


답) 어렸을 적부터 조부님께서 ‘너의 증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제와 함평의 접주셨고 훈련대장이셨으며 백마를 타고 다니셨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1973년에는 문중에서 해주최씨 3의사비를 마을 앞에 세워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유족 중 자손들에게 선조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 마을은 웃어른들의 참여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후손들에게 증조부님들의 활동사항을 자세하게 알려주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님들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답) 『일본사관함』에 동학농민군 토벌을 담당한 일본군대대장들이 선봉장 이규태에게 ‘동학거괴를 잡으면 즉시 토벌대 본부(나주 순사청)로 압송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고, 『양호선봉일기』에 의하면 압송된 94명 중 78명은 나주 일본순사청 진영에서 총살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저희 조부님들이 등장하고 접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조부님 세 분 모두 인근마을 주민의 밀고로 해제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가 1894년 12월 27일 같은 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나주로 압송될 당시 최장현 증조부님의 둘째 아들인 최영환 조부께서 뒤를 따라가셨고, 처형된 시체를 불태우거나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에 검정기름을 바르는 등 참혹한 일본군의 행패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확인하여 한쪽으로 옮긴 후, 고향에 연락해 마을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최기현 증조부님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해 현재 가묘로 모시고 있습니다. 당시 체포되었던 수많은 농민군들이 현장에서 처형되었지만, 세분은 고향인 해제에서 나주까지 압송되신 사실과 일본사관함의 기록으로 보아 중책을 맡고 많은 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증조부님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여 남기신 유물이 있으실까요?


답) 제가 어렸을 적 최선현 증조부님이 사시던 집 뒤에서 개머리판이 발견되었으나 아쉽게도 관리소홀로 인해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집 앞에는 지금도 동학농민군들이 훈련당시 먹었던 우물물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문) 그 외에 주변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분이 계십니까?


답) 석산마을 옆 감정마을에 장일채 씨라는 분이 저의 증조부님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훈련시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소문해본 결과 증손자 되시는 분이 여전히 해제면에 거주하고 계시다고 하여 추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해제면의 다른 마을에서도 많은 농민군들이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이후 역도로 몰려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사를 가거나 이름을 바꾸고 생활하셨던 분들이 많아 참여자를 발굴하기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이후 가족 분들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답) 저의 증조모(밀양박씨)께서는 98세까지 사셨는데, 동학농민혁명 이후 역도로 몰려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고 합니다. 1894년 12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관군들이 찾아오면 피난을 가야 했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울음소리 때문에 발각될까봐 둘째 계식과 셋째 춘식을 이불솜에 싸서 소나무 밑에 감춰두고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어찌나 추웠던지 두분은 추위로 얼어서 머리털이 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왜 머리털이 없으세요 물으면 그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후에도 어려운 생활을 계속 하셨으나. 6.25가 지난 후에는 후손들이 학문에 열중하도록 많은 독려를 하셨다고 합니다.



문) 어떤 계기로 참여자유족 신청을 하게 되셨나요?


답) 무안군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 중 뜻있는 몇 분이 조상님들을 위해 일해보고자 여러 해에 걸쳐 노력하셨습니다. 2008년 어느 날, 당숙(한암)께서 저에게 동학농민혁명 유족 분들의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하셨습니다. 동석한 그 자리에서 유족회가 발족하게 되었고, 초대 유족회장이신 김광용 회장님의 노력으로 『무안동학농민혁명사』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각 문중에서 선조 분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에 대한 내용을 원고로 가져와달라는 부탁을 하셨는데, 이를 제가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증조부님들의 활동사항에 대한 원고를 쓰기위해 사료를 조사하고 모으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사 발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부터 사무국장 직책을 맡게 되었고, 지금까지 여러 업무를 수행하여 왔습니다.



문) 현재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계신데, 증조부님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이 계기가 되신 걸까요?


답) 네, 그렇습니다. 동학농민혁명사를 연구하면서 구한말 외척세력에 의한 매관매직, 탐관오리에 의한 수탈, 외세침략 등을 알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도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정신이 국가와 약한 자들의 안녕을 위한 것이기에 나 자신부터 옳은 일을 알고 참여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힘닿는데 까지 맡은 소임과 동학농민혁명정신 계승⋅확산에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고, 현재 유족 분들이 연로하신 분들이 많아 조금이라도 더 젊은 제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문) 증조부님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답)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가난하고 수탈당하는 약한자의 편에 서서 역적으로 몰리면서 까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참여하신 것이 매우 떳떳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비록 증조부님 이후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는 곤궁하고 어렵게 생활하셨지만, 면학정신과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정신을 전해주셨기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이후 두 번째 갑오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올해 이것만은 꼭 이루어야 한다고 바라는 것이 있으십니까?


답) 무안은 전국에서도 두 번째로 많은 포와 중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종 집회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이 있었던 고을이었음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적고, 이에 대한 발굴이나 정리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기념비조차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사료에 나타난 무안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몇 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째. 오지영의 『동학사 초고본』에 의하면, 삼례집회와 광화문 복합상소에 배상옥 장군의 동생 배규찬이 참석하였고, 원평⋅보은집회에는 무안접에서 260명이 참여하였으며, 백산대회에는 무안의 장령급 참가자가 고부나 무장, 태인의 13명 보다도 많은 15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선무사 이규태의『완복서』,『순무선봉진등록』에는 ‘전봉준과 김개남은 바로 거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들보다 큰 자는 무장의 손화중과 무안의 배상옥입니다.’, ‘만약 거괴를 말한다면 당연히 손화중과 무안의 배상옥을 가리켜야 할 것입니다.’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그중 가장 높았던 1000냥의 현상금이 걸린 분은 전봉준, 무안의 배상옥 장군 두 분뿐입니다. 액수만으로도 남부도호소의 지도자로 활동하신 배상옥 장군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안지역의 활동이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음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됨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역사적 사실 언급이나 정부의 기념사업 추진에는 뒤쳐져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이 헛되지 않도록, 사람이 하늘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농민혁명정신이 계승되고 발전⋅확산될 수 있도록, 일시적인 행사보다는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홍보와 역사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많은 협조와 지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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