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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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15호
남원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남원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남원성


  동학농민혁명의 삼장군 중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한 김개남장군의 거점은 남원이었다. 전주성 점령을 통한 전주화약과, 전봉준 장군과 전라감사 김학진의 대담을 통해 관민상화가 이루어지며 남원대도소가 세워졌고, 남원은 전라좌도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남원은 동학농민혁명 재봉기 당시에도 가장 많은 농민군이 집결한 곳이며 민보군과 농민군 사이에 가장 치열한 공방이 펼쳐진 곳이다. 이런 역사를 통해 다수의 전적지와 도성,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흔적이 남아있는 남원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소개한다.



  방아치 전투지


  2014년 청마의 해가 밝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설이 지나고 2월도 절반이 넘어가고 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120주년, 즉 2주갑을 맞이한 해이기에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더욱 아쉽다. 1894년의 갑오년 이후 10간과 12지가 돌아가며 짝을 이룬지 예순 번 만에 다시 ‘갑’과 ‘오’가 짝을 이루고, 이가 두 번 반복된 후에야 동학농민혁명 2주갑이라는 세월이 완성된 것이다. 더욱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동학농민혁명이 난에서 혁명으로 격상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갑오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올해는 그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의 혼이 되살아날 수 있는 해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기념할만한 해의 첫 답사를 어느 곳으로 가야할까 하는 고민 끝에 김개남 장군의 거점이자 동학의 성지인 남원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중에서도 처음은 남원의 박봉양 민보군과 농민군 사이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방아치 전투지로 향했다.


  방아치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중 남원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김개남 장군이 5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자, 운봉에 진을 치고 있던 박봉양의 민보군이 남원에 잔류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여 남원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대규모의 농민군이 남원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비운 채 다시 물러났다. 이후 주력농민군의 북상에 걸림돌이 되고 있던 운봉의 농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유복만, 남응삼 등 지도자들이 이끄는 농민군이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이들은 운봉을 공격하였으나 민보군이 경상도에서 지원받은 신식무기를 대량 보유하고 있었던 데다, 박봉양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불리한 전투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은 소떼를 앞세워 공격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약 28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접주 5명을 포함한 2천여 명이 전사하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방아치 전투지를 찾아가는 길에 무뎌진 칼바람과 포근한 날씨가 기분을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굽이치는 언덕을 오르다 언듯언듯 보이는 아지랑이에 봄의 향기도 느껴졌다. 갑오년의 봄이다. 동학농민군들이 꿈꿔왔을 봄의 초입에 그들이 목숨 바쳐 항쟁했던 전적지를 찾아간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감상적이기도 했다.


  어느새 오르막이 내리막이 되고 굽던 길도 꽤나 반듯해졌을 무렵 방아치 전투지 기념비에 다다랐다. 이 기념비는 2007년에 동학농민혁명참여자심의위원회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함께 세운 것이다. 기념비의 첫인상은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받침과 비의 높이를 합해 약 3미터는 돼 보이는 비가 꽤나 압도적이었다. 주변에 높이를 비교할 것이 없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비가 위치한 곳은 방아치로 올라가는 입구로 실제 전투지의 위치는 아니지만 분명 동학농민군들은 이 비가 위치한 길목을 따라 올라가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은 농민군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며, 이후 방봉양의 민보군에게 남원성까지 함락당하고 만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 번 비를 바라본 후 발걸음을 돌렸다.



  쪽뚤 농민군 주둔지



쪽뚤주둔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쪽뚤 농민군 주둔지였다. 남원 일대를 위협하며 농민군들의 활동에 제약이 되던 박봉양의 민보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홍기, 유복남, 남응삼, 유태홍 등은 남원의 농민군을 이끌고 쪽뚤에 진을 쳤다. 쪽뚤은 방아치와 여원치로 가는 갈림길에 위치한곳으로, 이곳에 진을 친 것은 어느 쪽을 공격할지 민보군이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민보군에게 간파당하였고 오히려 유인책에 빠져 역공을 당하고 말았다.


  쪽뚤은 넓고 평탄하여 진을 치기 적합한 장소로 보였다. 이런 점에서 남원의 농민군들이 이곳을 전열을 가다듬을 장소로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뚤이란 쪽이 많은 뜰이라는 뜻에서 쪽뜰이라 불리다 이가 쪽뚤로 변화하여 지명이 된 것이라고 한다. 쪽의 꽃말은 추억이다. 이곳의 쪽들은 남색의 원료가 되는 그 푸르름으로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항전하였던 남원의 농민군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위해 피어났던 것일까.


  현재 쪽뚤 주둔지에는 2009년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설립한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쪽뚤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국도 주변에 위치한 이 기념비를 오고가며 보게 되는 이들이 농민군들의 희생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를, 그리고 기억하기를 바래보았다.



  갑오토비사적비



갑오토지사적비

 

  운봉에 진을 치고 남원일대는 물론 경상도 지역까지 위협하였던 박봉양의 민보군은 남원의 농민군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이 박봉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가 바로 갑오토비사적비이다.


  박봉양은 남원의 유명한 부자로 권세가 막강하였으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기에 지방 관리들도 어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뒷받침에 기대어 무단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체포되었으나 압송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났으며, 이후 민영준에게 뇌물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부패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화약을 이룬 농민군들이 폐정개혁을 시작하자 재산을 빼앗기거나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러나 입도 후에도 재산을 계속해서 빼앗기자 동학과 연을 끊고 많은 재산을 이용해 민보군을 결성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 박봉양의 민보군에게 남원현감과 함양의 포군, 경상감사 등 주변의 호응과 지원이 이어져 5천명의 규모로 크게 성장하였으며, 그들이 진을 친 운봉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이었기에 더욱 공략에 어려움이 있었다.


  북상을 준비하던 남원의 농민군들에게 이들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전봉준 장군도 이들을 찾아가 농민군에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들은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주력농민군이 재봉기를 위해 북상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박봉양은 방아치 전투, 남원성 전투에서 농민군에게 승리하여 남원성을 점령하고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였으나, 일본군과 경군이 전주에 도착했다는 소식들 듣고 자신이 저지른 약탈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도망갔다. 스스로도 세운 공보다 지은 죄가 더 많았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갑오토비사적비 주변에는 가지각색의 비석이 모여 있었다. 마치 갈 곳 잃은 비석들이 사방에서 옹기종기 모여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오토비사적비는 운봉초등학교 앞 도로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발굴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왔으며 이때 후손들이 기단부를 만들고 ‘박봉양 一目(일목) 장군비’라는 글귀를 새겼다. 일목이라는 별칭은 박봉양의 눈이 한쪽밖에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 한다. 비석의 외관은 매우 처참했다. 오른쪽 윗부분이 사선으로 쪼개져나간 데다가 글씨부분도 대부분 훼손되어 어떤 글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훼손이 누군가에 의한 것인지 땅에 묻혀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과응보라는 말이 떠오른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동학성지남원기념비


  교룡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교룡산성공원에는 전면에 수운 최제우의 칼노래가 새겨진 동학성지남원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최제우는 경주에 거주하였으나 동학을 창도하고 포교하는 과정에서 관아로부터 사도난정이라는 죄목을 받고 남원으로 몸을 피하였다. 최제우의 이런 피신생활은 호남에 동학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에서 포교를 시작한 그는 교룡산성 안에 위치한 선국사의 한 암자에 은적암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곳에서 수도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최제우는 이곳에 은거하며 논학문, 권학가, 교훈가, 도수사 등의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으며, 동학이라는 교의 명칭을 처음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동학성지남원기념비는 호롱불 모양으로 세워져 개성적인 기념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호남에 동학을 전파하고 이를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시대의 등불로 밝혀낸 수운 최제우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 여겨졌다. 이 기념비는 2005년 남원문화원과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운 것으로, 선반에 책자를 올려놓은 듯 한 전면에 새겨진 칼노래는 수운 최재우가 은적암에서 수도하던 중 자주 불렀던 것이라 한다.



  교룡산성


  김개남 장군이 7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으로 돌아왔다. 남원 읍내를 가득 채울 정도로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을 두 곳으로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었다. 이곳은 성내에 우물이 99개나 있고 계곡도 흐르고 있어 성을 지키기 좋은 곳이었으며, 남원의 20여개 성곽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기도 하다.


  꽤나 높은 언덕길을 올라 도착한 교룡산성은 척 봐도 천혜의 요새로 보였다. 오른쪽으로 돌아들어가는 입구가 성벽에 가려있으며, 왼쪽으로는 넓직한 계곡이 흐르고 있고 입구의 오른쪽에는 가파른 산이 솟아있어 단단한 벽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예상보다 훨씬 큰 성내의 모습이 펼쳐졌다. 산의 경사를 따라 돌계단이 이어지고, 길 양쪽으로 쌓인 돌담장 안에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치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성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룡산성의 입구에는 1993년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표지목을 세워두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방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며 발길을 채촉했다.



  남원성


  남원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사각형 모양에 한 면의 길이는 3.4km, 높이 4m의 읍성이었다. 세월이 지나 많이 허물어 진 것을 최근에 일부 복원하여, 완전했을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김개남 장군이 남원으로 들어와 7만여 명의 농민군을 주둔시켰던 곳 중 한곳이 바로 남원성이었다. 이 남원성 안에 대도소가 세워졌으며, 이로 인해 남원은 전라좌도를 총괄하는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후 김개남 장군이 북상한 뒤 박봉양의 민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고, 농민군이 다시 탈환하였다가 방아치 전투 이후 다시 빼앗기는 등 남원의 농민군과 민보군은 이 성을 사이에 두고 힘의 줄다리기를 함으로서 서로가 남원의 지배를 확고히 하려 하였다.


  일부만 복원된 모습이었지만, 좌우로 길게 뻗은 모습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남원성의 모습은 웅장했다. 성벽 안쪽의 둔덕에는 새 봄을 맞아 마른풀을 태운 모양인지 그을린 잔디들이 몽고반점처럼 박혀있었다. 둔덕을 밟고 성에 오르자 아래가 까마득했다. 두터운 성벽 길을 걸으며 이곳에서 농민군과 민보군이 어떤 전투를 벌였을지 상상해보았다. 그들은 방아치 전투의 커다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북상한 주력농민군을 위해 끝까지 항쟁하였다. 성문이 불태워지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을 때 농민군들은 얼마나 비통함을 느꼈을까?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려 성벽을 내려왔다.



  요천훈련지기념비


  남원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요천훈련지였다. 이곳은 김개남 장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과 대적하기 위해 휘하의 농민군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곳이며, 전주화약 이후 남원대회를 개최하여 농민군의 사기와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정신을 드높인 곳이다. 이곳에는 2007년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건립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천변에 세워진 기념비는 탁 트인 대로변에 위치하여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촬영을 위해 계단을 오르자 강처럼 넓은 요천의 모습과 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아름다운 아치다리, 먼 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대관람차의 모습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1894년 당시에는 지금과 풍경이 많이 달랐겠지만 분명 김개남 장군도 요천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훈련한 농민군들은 청주성 공격과 방아치 전투에 참여하였다. 비록 패하고 말았지만 그들이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 한 마음 또한 이곳에서 키워 나갔을 것이다.


  기념비의 마지막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지금은 당시의 원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귀 기울이면 그때 농민군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의 함성을 잊지 않고 보존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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