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청. 춘. 을. 바. 치. 다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문병학

문) 문병학 사무처장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네, 저는 이력이 좀 특이합니다. 대학에서는 국문학,현대시를 전공했습니다. 대학생 때 학교신문에 시를 실었는데 이 시를 고은 시인이 『노동문학』(창간호)에 ‘이달의 시’로 선정, 추천사를 써서 발표시켜 등단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졸업 후 서울 문화방송사 구성작가로 입사하여 어린이 프로그램인 ‘뽀뽀뽀’ 대본을 쓰기도 했지요. 등단한 지가 25년이 넘었고, 그동안 꾸준한 문단활동으로 현재 한국작가회의 전북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또 시민사회단체인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우진문화재단, 한국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 문병학 사무처장님과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답) 인연이 참 깊지요. 1992년부터 지금까지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동단협), 재)동학농민혁기념재단 사무처장 등을 맡아 일했고, 지금도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으니까 동학과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23년이나 되었네요. 청춘기를 동학농민혁명과 온전히 함께 보낸 셈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갑오년 역사에 대한 보다 깊은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뒤늦게 원광대 대학원 사학과에 들어가 한국 근대사를 전공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994년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을 6년 앞둔 1989년 『전북 문화저널』 6월호에 원광대 사학과 신순철 교수(現기념재단 이사, 원광학원이사장)님의 ‘갑오농민전쟁 백주년을 준비하자’라는 제목의 글이 기고되었지요. 이 글이 단초가 되어 1990년 1월 전북대 호남사회연구회에서 ‘갑오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회 주비위원회’를 결성했고, 1991년 준비위원회로 발전되어 마침내 1992년 6월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 연합체 형태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약칭 동백사)가 창립되었지요. 당시 김삼룡 원광대총장님, 조용술 목사님,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공동회장직을 맡아 애를 많이 쓰셨지요. 이후 ‘동백사’가 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사단법인 등록이 필요하다는 논의에 따라 1993년 7월 문화체육부 법인으로 등록했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시민사회단체가 법인으로 승인된 것은 우리 기념사업회가 처음이었지요. 이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 오랜 시간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 오셨는지 간략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답) 1990년대 초에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 하나가 있는데, 1993년 3월 초였어요. 우리 기념사업회에서 백주년 준비사업의 일환으로 동학농민혁명 99돌 범도민 걷기대회라는 행사를 기획해서 전라북도 해당과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접수했어요. 담당 공무원에게 공문을 건넨 후 한참 설명을 하는데 이분이 느닷없이 “근데 반란사건도 기념해요?”라고 말하더군요. 많이 당황했지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관변단체가 아닌 순수 민간단체가 추진하는 기념사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처럼 열악했어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법인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문화체육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했지요. 지금은 쉽게 법인 등록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어쨌거나 법인 등록을 하여 사업비를 문화체육부로부터 지원받게 되었지요. 이렇게 우리 기념사업회가 재원확보 등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 1백주년 기념사업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여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지요. 우리 기념사업회가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창립의 산파역할을 했고, 이후 동단협 주최로 1994년 2월 26~27일 양일간 정읍시 일원에서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1994년 4월 28~29일 양일간 전주시청 광장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의 메인행사인 기념대회를 ‘바로서는 역사, 다가서는 통일’이라는 주제로 성대하게 펼쳤지요. 명의상 주최는 동단협이었지만 사업비와 사업추진 전반을 우리 기념사업회가 모두 책임지고 추진했지요.
우리 기념사업회가 추진한 중요한 것으로는 서울 역사문제연구소 ‘백추위’와 함께 전국의 기념사업 단체창립을 지원한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1993.11.), 상주·예천·진주·완주·금산·남원·홍천·광주전남기념사업회 등을 창립시켰지요. 기념행사로는 전주입성 기념대회를 비롯하여 무장포고 범도민 걷기대회, 백산봉기 기념대회, 백주년 기념 학술제·무용제·연극제·그림전·시민강연회, 삼례봉기 기념대회, 찾아가는 역사교실, 동학기념 전북도민 마라톤대회, 한·중·일 석학들이 참가한 국제학술대회(2001), 대서사시 음악극 ‘천명’ 전국 순회공연(1999) 등이 있습니다. 또한, 특별법 제정 기반이 된 국회 동학농민혁명연구회 창립과 사무업무를 담당했고, 표석 하나 없이 버려져 있던 삼례봉기 터에 기념비(1996.10.)를 건립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완주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삼례봉기 역사공원이 세워졌습니다. 삼례봉기 역사공원 건립에는 우리 기념사업회가 거금 5천만원을 지원하기도 했지요. 이밖에도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해봉환(일본→한국 1996.5.), 동학농민군 대둔산 최후 항전지 규명 및 발굴(원광대 사학과 공동), 전주시 효자동에 자리한 전주역사박물관 건립 및 위탁운영 등의 특별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출판사업으로 『황토재에서 우금재까지』(1993), 『실록 동학농민혁명사』(2000),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2001), 『전주성을 점령하라』(2013) 등 20여종의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문) 전주에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무엇보다도 동학농민군 전주성 함락을 들 수 있습니다. 전주성은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거사계획 작성 때부터 농민군의 제1차 점령목표였습니다. 전주는 조선건국자의 본향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서해안을 낀 곡창지대를 관할하는 수부로서의 의미를 지닌 곳이지요. 따라서 농민군에게 전주성이 함락된 것은 엄청난 사건이지요. 전주성 함락 소식을 접한 조선정부는 대신회의를 열어 청나라에 군대파병을 요청했잖습니까? 조선정부의 파병요청은 향후 조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거대한 폭풍을 불러왔지요. 전주성이 함락되자 전국 각지 농민들이 봉기에 호응했고,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으로 진출했지요. 일촉즉발의 정치정세 하에서 6월 21일 폭약으로 경복궁 성문을 부수고 일본군이 무단으로 침입하여 조선의 내정을 쥐락펴락합니다. 나아가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동아시아가 일대혼란에 빠져들었지요.
동학농민군 전주성 함락은 최대전승이자 그 역사적 의미도 지대합니다. 프랑스하면 사람들은 에펠탑을 떠올립니다. 파리 에펠탑은 프랑스대혁명 100주년 기념탑이지요. 프랑스혁명 기념일은 7월 14일로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한 날입니다. 프랑스혁명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한 것은 곧 동학농민군 전주성 점령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사람들은 에펠탑을 세워 세계만방에 혁명을 기념하는데 우리는 동학농민군 전주함락의 역사적 의미조차도 잘 모릅니다.
일제식민지시기, 민족분단,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시기 등으로 점철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굴절로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 일개 지방사로 축소되고 왜곡된 채 한 세기를 지나온 탓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갑오선열들의 후손으로서 낮 뜨거운 일이지요. 우리는 갑오선열들께 중죄인입니다.
문) 전주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소개해주십시오.
답) 전주성을 함락시킬 때 입성 경로였던 완산동 용머리고개, 전주성 서문과 남문, 전라감사 집무실이었던 선화당 터를 비롯한 전라감영 터 전체가 유적지이지요. 이밖에도 태조 이성계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 완산칠봉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곤지산, 칠봉 7부 능선의 전주입성기념비,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뒤에 허겁지겁 농민군을 뒤따라온 초토사 홍계훈 부대가 진을 치고 수차례 농민군과 격전을 벌였던 완산칠봉, 곤지산, 다가산, 유연대 등이 있지요. 이밖에도 덕진공원에는 전봉준선생상, 손화중장군기념비, 김개남장군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기린봉 산자락에 동학농민군 진압대 우선봉장이었던 이두황의 묘가 있지요.
문) 올해 동학농민혁명이 12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올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어떤 사업을 추진 중이십니까?
답) 혁명 12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 사업회에서는 크게 전북지역 학생대회(4월), 전주입성기념대회(5월), 전북도민 걷기대회 및 전적지 답사(10월), 찾아가는 고교생 역사교실(11월)을 기본 축으로 정신선양을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이 중에서 전주입성 기념대회를 여느 해보다는 다채롭게 풍성하게 추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선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정기공연을 전주입성의 의미를 주제로 한 규모있는 창극을 제작하여 전주입성일을 기해 한국소리문화전당에서 공연할 계획입니다.
나아가 전주시립극단과 연계하여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를 추구하는 연극을 제작하여 전주입성 기념일 전후부터 6월 초순까지 덕진종합예술회관 등에서 공연할 계획입니다.
문) 작년에는 ‘전주성을 점령하라’라는 전주·완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안내하는 책자를 발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전주와 완주지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읍이나 충남 공주 등에 있는 유적지 외에는 별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이에, 늦었지만 이제라도 전주 완주지역에 산재해 있는 유적지들의 중요성 함께 그 의미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진면목을 전북도민은 물론,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온 정성을 기울여 출판한 책자입니다.
문) 제120주년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의 방향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답)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던 1994년 전후시기 기념사업의 핵심은 역사바로세우기였습니다. 말하자면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온 갑오년의 역사를 혁명으로 제자리를 찾아주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요. 1970년대까지 금기시되어왔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구가 이 시기를 지나면서 본격화되어 각 지역별 전개양상을 비롯하여 이전에 밝혀지지 못했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규명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학농민군 유족 현창사업에 힘을 기울여 왔는데 이 점도 2004년 특별법을 이끌어내어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족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 등등 아직도 너무나 많이 미흡합니다. 이점에 대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시기, 특히 1980~90년대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 현재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21세기 초입 작금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상황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마치 120년 전 갑오년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두웠던 일제식민지시기와 군사정권시기 충청도 계룡산, 전주의 모악산, 정읍의 내장산, 고창의 방장산쯤으로 치부되었던 왜곡과 축소를 서둘러 떨쳐내야 합니다.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 세계사적 맥락에서의 역사적 의미 추구를 통해 오늘 우리 삶의 좌표 정립에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