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함완석의 손자 함기영

문) 이번 호 유족 인터뷰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함완석의 손자 함기영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세요.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함 윤자 찬자, 함윤찬의 손자 함기영입니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정신을 선양하고 그 유족들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유족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보다 나은 미래, 다 함께 더불어 잘 사는 미래를 남겨주고자 했던 조부님의 뜻대로 그 지평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 나름대로 적극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요?
답) 60년대죠. 제가 열일곱 살 정도 되었을 때부터 족보를 자주 봤어요. 그러다보니 집안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조 중에는 조선 개국공신으로서 형조판서와 8도 관찰사까지 역임한 분도 계시고, 영의정을 지낸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셨던 함태영 같은 분도 제 집안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던 우리 집안이 어쩌다가 집 한 칸 없는 처지로 몰락해서 교회 사택에 빌붙어 살거나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했는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반항심이 큰 사춘기 때 어머니께 화를 내며 물었더니 아버지께 들으셨다고 하시면서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후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조부께서는 총상의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조모님도 제 아버지를 낳던 날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제 아버지를 큰할아버지 호적에 올렸다고 합니다. 당시 조부께서는 혁명에 참여하셨다가 어깨에 총상을 입고 돌아왔는데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큰할아버지는 동생인 제 조부님을 데리고 진안으로 피신하여 겨우 겨우 살았다고 합니다.
문) 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후손들이 삶이 여의치 못했을텐데... 부모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울러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계시는지요?
답) 어머니 말씀이, 함씨집안이 벼슬도 많이 한 집안이어서 믿고 시집왔는데 와서 보니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그래서 진안이라는 산촌에서 자식 둘을 낳은 다음에야 비로소 친정을 가게 되었대요. 그때 친정의 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이 어머니께 살림살이 형편으로 듣고 깜짝 놀라 그길로 처갓집 뿌리가 있는 김제로 이사를 하게 했답니다. 그 때가 1935년 즈음이었답니다. 조부께서 동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부유했던 집안이 풍비박산 날 일도 없고 잘 살았겠지요. 처음에 조부님 얘기를 듣고 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철이 좀 들고 나서부터는 조부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부님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별 탈 없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조부님께서는 정의를 택하신 거잖아요? 저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인데, 아무래도 조부님의 정의로운 피를 받아서 그런가 봐요.(웃음)

문)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을 전후하여 유족회와 전국 기념사업단체가 창립되어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헌신적으로 벌였습니다. 그 결과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 법에 의해 조부이신 함완석 님도 참여자로 인정되고, 선생님도 유족으로 등록이 되었지요? 그 무렵 일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근래에 와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백주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적으로는 도적들이 일으킨 반란사건으로 치부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기부터 백주년을 준비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서울과 전북 등지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단체가 만들어졌고, 이 과정에서 참여자 유족들의 모임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윤 박사님, 그리고 손주갑 선생님이랑 함께 문선생도 그때, 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 때 애를 많이 쓰셨잖아요? 벌써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하여튼 그때까지만 해도 유족들의 활동이 적극적이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백주년 때 전국적으로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TV에도 나오고 그러니까 유족회 참여자 수도 늘어나고 활동도 적극적으로 바뀌었지요. 이후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고 참여자와 그 유족 등록사업이 추진되면서 많은 유족들이 함께하게 되었지요. 저도 그때 자료를 찾아서 조부님을 참여자로 등록하는 동시에 저를 참여자 후손으로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유족을 등록하는 기간이 너무나 짧았어요. 다행히 지난 연말에 특별법이 개정되어 다시 유족등록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니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낡은 봉건체제를 개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추구했고, 일제의 불법적인 국권침탈에 맞섰던 애국애족 정신의 표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면서 참여자는 ‘역적’으로, 그 후손들은 ‘반란군의 후손’이라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겪은 일들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우리 조부님은 가을걷이 때 나가셨다가 총상을 입고 돌아오셨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일본군을 쫓아내려고 서울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공주우금치에서 총상을 입으셨던 것 같아요. 조부께서 소싯적 함윤찬이라는 함자를 쓰셔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참여자 등록을 하려고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적등본에 함완석으로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이름을 바꿔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까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요. 이후에도 이곳저곳 부평초처럼 떠도는 생활을 하시면서 이름을 4개씩이나 사용했다고 들었어요. 조부께서는 총상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제 아버지의 삶이야 오죽했겠습니까? 큰할아버지 호적에 적을 두고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지요. 그러다보니 저 또한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자랐고, 학비를 제때 못 내서 국민학교 5학년 때 중퇴를 해야 했어요. 이렇게 자손대대로 몸도 마음도 참으로 가혹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본에 빌붙어 친일을 한 집안은 3대가 흥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신 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는 가난이 대물림되었지요. 이게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까? 참 허망한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문)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정의롭게 살다 가신 조부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터인데, 평소에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다”그런 얘기를 듣거나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답) 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1960, 70년대 급변하는 시기에 불합리함과 모순에 대해 신문에 기고하거나 데모를 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택시기사의 노동권 보장을 내세우며 택시업계 최초로 파업을 해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걸린 적도 있었고, 현대건설에 몸담고서 중동에 나갔을 때도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회사와 도급제를 놓고 교섭하여 성사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 측에서는 공정기간이 훨씬 단축되면서 톡톡히 성과를 봤고, 노동자들도 처우가 개선되는 결실로 이어졌던 일도 있었지요. 이렇듯 저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아무래도 조부님의 정의로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웃음)
문) 동학농민혁명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지역단체, 그리고 역사학계 연구자 등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 아직까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여자 후손으로서 누구보다도 기념일이 조속히 제정되기는 바라는 마음일 텐데, 이점에 대해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저는 1993년도에 구성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25년 동안 유족회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기념일 제정을 강하게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기념일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모두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기념사업단체, 지방자치단체들이 서로 자기 지역, 자기단체와 연관된 날을 기념일로 제정하자고 하면 끝이 없는 일이지요. 갑오년에 선열님께서 지엽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저지하고자 한 목숨 내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갑오선열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서둘러 합의가 이루어지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문) 앞서도 얘기가 되었습니다마는 1993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그 이듬해인 1994년 3월 3일 동아일보 사옥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대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창립된 때로부터 23년만인 2017년 5월 8일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승인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초창기 때부터 적극적으로 유족회 활동을 해온 선생님께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진작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지만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동안 유족들이 겪은 말 못할 억울함과 고난을 이제라도 정부기관에서 인정해준 것이라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제가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으로 허가된 후 구성된 첫 번째 이사회의 이사로 참여하게 되어 더욱이나 기쁘고, 또한 책임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유족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되기 이전에는 유족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주머닛돈을 털어서 어렵게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지금도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사단법인으로 허가되었으니까 후원금도 모으는 일 등이 보다 더 용이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 참, 지난 해 열린 제123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 때 선생님께서 공로패를 받으셨지요?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확산시켜나가는데 애쓰신 공로로 상을 받으셨는데,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면서 앞으로 활동계획 또는 각오를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사실 제가 받아야 할 상이 아닌데 받아서 쑥스러웠습니다.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사비로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고 지지해주십니다. 이 상은 그동안 유족회에 참여하며 성심성의껏 뛰어주신 모든 분들을 위한 상인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동학농민혁명은 그저 모두가 다함께 잘 살자는 뜻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갑오선열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면서 힘닿는 데까지 저는 앞으로도 더욱 적극적으로 유족발굴과 지원, 정신 선양사업과 계승사업 추진에 힘쓸 생각입니다.
문) 선생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 유의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