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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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31호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만열 인터뷰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만열 인터뷰


일 시:  2018년 2월 5일(월) 13:00

장 소: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 자택

대 담: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前국사편찬위원장



 

  이번 호 명사대담에서는 이만열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났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인 이만열 교수는 참여정부 때인 2004년 3월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 : 국무총리) 분과위원회 중 하나였던 ‘결정 및 등록심사분과’의 위원장을 맡으면서 동학농민혁명과 깊은 인연을 맺은 후 2015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 추진위원회’위원장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 마련에 힘쓰고 있다.


<경력>  제8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국제민간교류협회 대표, 서울시공직자윤리위원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등.


<수상>  독립기념관 학술상(2008), 용재 석좌교수(2008), 제15회 상허대상(2004), 황조근정훈장(2003), 단재상(1992) 등.


<저술>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문학과지성사, 1980),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두레시대, 1998),『한국 기독교 의료사』(아카넷, 2003),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푸른역사, 2007),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2014) 등


문) 교수님 반갑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명사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교수님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안녕하세요. 저는 2003년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바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이사장,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25년 동안 꾸준히 해오던 외국인 근로자들을 돕는 일(국제민간교류협회 대표)을 그만두었습니다. 88올림픽 당시 서울의 올림픽 광경을 보고 코리언드림을 안고 온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들의 인권, 의료, 노동 상담을 해주는 일을 해오다가 지난주 대표직을 사임했습니다. 이제는 활동을 줄여나가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좀 가지려하는데 여의치가 않습니다.(웃음)



문) 한국 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도 부침을 거듭해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대한제국기 전후에는 반란사건으로 인식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동학(東學)이라는 사교집단의‘난’(亂)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고양되고, 일제 식민사학 극복의 필요성 등이 제기되면서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연구자 등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국 근대사에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근대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연구되고 인식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한국사 혹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그 의미에 대해 교수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답) 저는 동학농민혁명을 아주 높이 평가할 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연구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지배자 중심의 역사를 피지배자의 역사로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들이 지배세력에 저항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조직화된 움직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지배를 받는 민중들이 지배층의 불의에 항거해서 조직화된 힘을 가지고 일어난 우리 역사상 최초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혁명적 사건’입니다.



문) 1960년 4.19혁명에 이어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선거(10. 15.)가 있었습니다. 급박한 정치정세 속에서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크게 물리친 황토현전적지 산마루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1963.10.3.)이 건립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후대의 평가도 있지만 이 탑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을 ‘반란’에서 ‘혁명’으로 전환을 기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습니다. 나아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도 황토현전적지에 ‘갑오동학유적지 정화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과거 군사정권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는데 그 점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역사적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해석이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혁명은 독재정치가들의 입장에서는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도 전두환, 박정희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편취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투표에 의해 권력을 쥘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독재자들은 그들의 본심을 감추고 민중이 원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표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또 그들의 본질을 감추고 민중이 원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역사 해석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도 달리 나올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나 지역, 이해관계, 계층 등에 따라서 나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같은 사실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 ‘바른 해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되지요. 저는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사건을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자유토록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사회적으로는 평등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구속, 제재를 가하는 것은 역사의 발전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는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자신이 잃은 민심을 무마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을 세운 것일 뿐 진심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한 행위라고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역사모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해석을 가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1894년 발발 당시에는 왕조의 입장에서 동학‘난’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도 일제가 조선민중을 독재식민권력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인식 그대로 동학‘난’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도 소수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혁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4·19혁명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3·1대혁명과 4·19혁명으로 반민주세력을 타도하는 힘으로 계승되어 발전되어 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4·19혁명은 역사를 인식하는 혁명적 발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4·19혁명을 경험했던 역사학자들은 동학‘난’이라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재평가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4·19혁명은 민주화의 열망, 민중 문화, 통일 의식 등 많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전두환 세력은 민중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스스로를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호도, 변장시키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본격적인 역사적인 재조명은 1980년대 한국사회에 도저하게 흐르던 민주화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기부터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준비하자는 움직임이 서울과 전북, 전남, 충청, 경상 등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그 당시 11개 기념사업단체가 창립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를 구성하였고, 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국적이면서도 대중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로써 인식되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이 ‘반란사건’에서 ‘혁명’으로 대중적인 역사인식 전환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2004년 9월 17일 국무총리 소속으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교수님께서 심의위원회의 한 분과였던 ‘결정및등록심사분과’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결정 및 등록심사를 하던 시기에 느꼈던 점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오랫동안 ‘결정및등록심사분과’ 위원장을 맡으며 느꼈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참여자 후손들은 동학농민혁명의 후예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자부심을 가져야 했지만,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침묵, 기피해 왔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한말, 일제 하, 4·19혁명까지도 계속되어 참여자와 그 후손들이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제대로 된 역사인식, 역사교육을 부정하여, 참여자 후손들이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죄인시하고 역도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혁명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후손들은 현재 파악된 수보다 훨씬 많을 텐데 찾을 길이 없다는 점이 참 아쉬웠습니다. 특별법 제정으로 참여자들의 명예회복과 역사적 본질이 회복되고 있는 만큼, 서둘러 많은 참여자들을 발굴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가치를 넓히고 기리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여 혁명이 지닌 역사적 가치의 세계화 등을 추구하고자 2015년 6월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이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수고하고 계시는데,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갖는 의미에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위원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위원님과 우리 재단 연구조사부에서 적극 노력한 결과 지난 해 6월 28일 문화재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이 등재 대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큰 성과인데 이 점에 대해서도 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유네스코 세계기록물을 선정하는 이유는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지역이나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 인류가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농민혁명으로서 세계적 의미가 있으며,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서양의 농민전쟁과 비교해보아도 근대적인 진보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지배자의 폭압적 전제정치가 그런 고귀한 인간을 억압할 수 없다고 확신함으로 불의에 항거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 정의로운 혁명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인간관과 가치관을 세계인들과 공유하기 위해 관련 기록물을 제대로 보존, 번역하여 그 가치를 더욱 높이고자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세계화되는 출발점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세계화시키게 되면, 동학사상이 갖고 있는 자유와 고상한 인간관을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 승화시켜낼 수도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으로 선정된 후 유네스코 등재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만, 재단 측에서도 신속한 정보를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문) 말씀하신 것처럼 최종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하여 문화재청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에 대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 행정적인 절차,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남아 있고, 향후 추진계획은 어떤지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그동안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여러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앞으로 전문가회의 등을 거치면서 우선 제출한 보고서를 계속 수정·보충해 가면서 검토를 거듭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기술적·법적 차원에서 추가로 증빙해야 할 서류를 작성·보완하고, 올해 3월 즈음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서를 최종적으로 제출하기 위해 기록물 등재관련 문헌들의 영문번역도 마무리 할 계획입니다.



 

문) 2004년 제정된 특별법에 1894년 갑오년의 역사를 ‘동학농민혁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중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니 이제는 법의 규정에 따라 교과서도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민중이 힘을 모아 조직적으로 일어난 혁명입니다. 우리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세 가지를 든다면 동학농민혁명, 3·1대혁명, 4·19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과의 연계성 속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3·1운동이 아니라 3·1대혁명, 동학농민운동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교과서를 편찬하는 학자들은 ‘운동’과 ‘혁명’이라는 용어사용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혁명은 예컨대, 4·19혁명 같이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라는 새로운 체제로 바꾸듯, 체제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체제 변혁을 위해 일어나 사건이지만, 가시적으로 체제 변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교과서 집필에 임한 학자들은 법에 ‘동학농민혁명’이라 명시되어 있으나, 여러 측면에서 대답이 궁하기 때문에 중간단계인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용어를 취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동학농민혁명, 3·1대혁명, 4·19혁명이라는 역사적 용어를 학계, 정치권, 민중들에게 안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민주화운동의 큰 봉우리인 이 세 사건을 ‘혁명’으로 안착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문) 마지막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현재화의 방향, 혹은 정신 계승을 위해 어떤 점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답) 한국의 역사가 짧은 시간동안 크나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정의에 바탕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가 촛불집회로까지 왔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항쟁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한 촛불집회는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과 다양한 소통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촛불집회는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했던 정의와 평화, 자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현재 국내·외의 복잡한 문제들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때 지도자나 민중은 민주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랏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보국안민 정신과 구국애민 정신을 실현하는 길이며, 당면한 난제를 풀어갈 지혜와 경륜일 것입니다.



문) 아쉽지만 오늘 대담은 이쯤에서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긴 시간 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내내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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