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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31호
19세기 동아시아 사회에서 농민 기반 혁명의 성취와 좌절, 그리고 유산

19세기 동아시아 사회에서 농민 기반 혁명의 성취와 좌절, 그리고 유산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사회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과제를 공유했다. 특권적 사회계층이 권력과 자원은 독과점하고, 책임과 의무는 면제된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는 게 그 하나였다. 근대 서양의 경제사회적 및 정치적인 혁명적 변화에 의해서 비교되는 국면이기에 이 과제는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더욱이 여러 동아시아 사회들은 왕조체제의 말기 증후군을 겪고 있었기에 봉건질서의 적폐는 특히 심각한 상태였다. 또 하나의 과제는 경제혁명과 정치혁명을 기반으로 팽창하며 동아시아 사회들을 압박해오고 있던 서양 제국주의에 대응하는 반외세(反外勢)였다.


  중국, 조선, 그리고 필리핀에서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담당한 사회 계층은 농민층이었다. 중국과 조선은 가까스로 독립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외세에 의한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있었다. 활력과 자기 혁신의 능력을 상실한 왕조체제에서 농민층이 반봉건과 반외세의 임무를 떠안은 것이다. 필리핀은 이미 16세기 중엽 이래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19세기 말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식민주의 국가권력이 교체된다. 이 국면에서 필리핀 농민층은 반외세 독립과 반봉건 사회혁신의 과제를 자임하고 나섰다.


  태평천국에 참가한 농민층은 새로운 국가권력을 구축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조선의 동학농민세력은 처음엔 반봉건에 치중했으나 청국과 일본이라는 외세가 개입하자 반외세를 위해 봉건 국가와 화약(和約)을 맺고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로써 반봉건의 동력은 꺾이게 된다. 봉건 국가는 그 틈을 타서 외세와 결탁하여 농민혁명을 파괴했다. 필리핀의 농민층은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데에 일정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이 필리핀 독립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이 나라를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려 하자 필리핀 농민들은 독립전쟁의 주축으로 나선다.


  중국, 조선, 필리핀에서 반봉건과 반외세를 추구하여 일어난 농민층의 무장기의(武裝起義)는 결과적으로는 모두 수십만 명의 희생을 남긴 채 좌절하고 말았다. 태평천국은 스스로 국가를 세우자마자 초심을 잃고 부패한 왕조국가로 전락했다. 필리핀 독립전쟁은 처음엔 반외세 못지않게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 혁명과 사회변혁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곧 스페인 식민 시절부터 기득권 세력이었던 지방의 사회경제적 엘리트집단과 결합하면서 사회혁명은 물론이고 반외세의 추동력도 상실한다. 미국의 폭력 못지않게 내부의 혁명적 기상의 상실이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필리핀 독립전쟁의 방식과 그것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자행한 폭력의 양상은 훗날 베트남전쟁에서 판에 박은 듯이 되풀이된다.


  동학농민혁명은 국가를 세우지도 않았고, 필리핀의 독립전쟁 세력처럼 사회 기득권세력과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혁신과 반외세를 담당하는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지속되거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일본과 친일파 정부가 전개하는 광범한 폭력적 진압으로 동학농민혁명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조선 사회는 그 내면에서 정신적 진공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회를 혁신하고 공동체의 독립과 자주를 지향할 주도적인 사회세력의 구성이 불가능했다.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같은 일종의 시민층이 구성되었다고는 하나 그 영향력과 의미는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인구의 절대 주력인 농민층 안에서의 혁명의 동력이 폭력으로 파괴된 이후의 조선 사회는 전반적으로 동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배경이었던 그 전 10년에 걸친 민씨 척족 세도정치의 적폐와 습관적인 외세의존의 전통은 대한제국 선포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제국 선포 후 조선의 사회개혁은 갑오경장 이전으로 오히려 후퇴했고, 전제 왕권의 강화에 몰두한 채 러시아 등 외세 의존의 위험한 공중제비놀이가 계속되었다. 망국과 식민지의 운명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산이 서너 번 바뀐 뒤에야 운 좋게 일본 제국이 망하는 바람에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닌 탓에 분단의 운명에 직면했고, 그것이 원인의 하나가 되어 전쟁을 겪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잇따른 개입으로 반도의 허리에서 분단은 다시 도돌이표가 되었다. 그 후 수십 년간 북한은 전체주의, 남한은 반공 파시즘의 역사에 시달려야 했다. 무책임과 탐학과 외세의존으로 일관하는 국가권력과 사회지배층을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 건설의 역할을 자임한 조선 농민층의 비전과 활력이 국가가 결탁한 외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됨으로써 어떤 불행이 뒤따랐는지를 일별한 것이다.


  중국의 태평천국 이데올로기는 반외세를 내세우면서도 서양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자기식의 변형을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태평천국에 있어 기독교는 전통적인 왕조체제에 새로운 외피를 씌우기 위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필리핀 독립운동은 역시 서양에서 발원한 공화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다. 의회주의를 도입했지만 결국엔 그 역시 사회 기득권층의 봉건적 특권에 서양 근대의 껍데기를 덧씌운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필리핀의 사회와 정치가 유서 깊은 엘리트 집안들에 의한 과두정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스페인 식민주의, 그리고 미국 식민주의 질서와 함께 필리핀 독립전쟁의 이념과 실천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은 동양의 전통적 사상들인 유·불·선(儒佛仙)을 이념적 자원으로 삼았다. 태평천국처럼 퇴영적(退嬰的)이고 부패한 국가권력 구성의 역사도 남기지 않았고, 필리핀 독립전쟁 지도부처럼 사회적 특권세력과 타협하지 않은 채 봉건 국가와 제국주의 외세의 결탁으로 소멸했다. 그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은 훗날 숱하게 전개되는 불행 가운데서도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저항과 반외세 실천의 정신적·역사적 동력의 중요한 원천으로 남을 수 있었다. 불행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적절하지 않지만,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은 그 장렬한 ‘전사’(戰死)를 통해서 오염되지 않고 영원히 탈색되지 않을 미래 지향의 사상적 자원이라는 크고 귀중한 유산을 후세에 물려주었다.




이삼성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1988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현대미국외교와 국제정치』,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민족주의』, 『세계와 미국』,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제국』 등이 있다. 제11회 단재상, 제38회 백상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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