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2018년 4월 18일(수) 12:00
장소: 예산기념사업회 사무실
대담: 박성묵|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문) 이번호 『녹두꽃』 지역대담에는 충청남도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님들을 위해 회장님 자기소개와 함께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요즘 저는 참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낡은 적대관계의 틀 벗어버리고 한반도에 훈풍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이제 정말로 전쟁은 가고 평화의 기틀이 정착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 동학농민군이 그토록 염원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문) 예산기념사업회는 2006년 초겨울에 갑오동학혁명군 위령제와 함께 갑오동학농민혁명예산군유족회 창립대회를 개최하였지요? 저도 민간재단이었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무처장 자격으로 창립대회에 참석했었는데, 불모지나 다름없던 충청도 예산에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다는 점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던 기억과 함께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너무나 추웠다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연혁과 함께 창립 배경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을 갖춘 것이 올해로 12년째입니다. 사료를 발굴하고,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조사연구 기간까지 합하면 근 20년째입니다. 무엇보다 갑오년 시린 들녘을 넘어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었던 참여자 후손 몇 분을 찾아뵙고 정신선양사업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자 유족분들이 이제야 소원을 풀 것 같다며 기꺼이 동참의지를 밝혀주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 관작리 전투일인 11월 23일 관작리전투에서 희생된 농민군의 영령을 위무하는 위령제를 시작으로 예산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예산군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출범하였습니다.
문) 회장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지금과는 다르게 아주 부정적인 시선이 강했던 때부터 예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단체를 창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요? 어려움이 많았던 만큼 보람도 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떻습니까?
답) 당시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아산지역 정서는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유족들을 만나도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신자였던 어떤 분은 동학을 귀신따위로 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족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여도 각자 종교적 믿음 차이가 분명하여 추진과정에 여러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기 위해서 회원을 모집하는 것에서도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반란사건으로 인식하던 때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후 유족회나 기념사업회 창립을 위한 준비가 다소 힘을 얻게 되었지요. 그렇게 다른 지역보다 좀 늦게, 특별법이 제정된 지 2년 후인 2006년도에 기념사업회와 유족회를 창립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예산군의회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관련 지원조례를 전국에서 두 번째인가? 제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관작리전투지 기념공원 부지를 마련 등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관작리전투지였던 곳을 기념공원으로 조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작리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 예산군 소유의 공유지 약 4,000평이 있었습니다. 2007년도에 예산군수(최승우)님을 만나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을 제안했었는데 흔쾌이 받아들였습니다. 기쁨도 잠시 특별법을 근거로 국비확보에 집중했으나 거의 확정을 눈앞에 두고 정권이 바뀌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기념공원 조성사업 추진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난항에 빠지는 듯 하였으나 올해 초에 도시계획법상 ‘예산동학농민혁명공원’으로 지정고시되었습니다. 따라서 내년부터는 적은 예산이나마 조금씩 예산을 투입하여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해나갈 계획입니다.
문) 예산기념사업회가 관작리전투지에서 올렸던 위령제의 외연을 넓히고 그 내용도 지역축제 형태로 발전시켜 매년 ‘내포동학문화제’를 추진해오고 있는데, 언제부터 위령제를 지역민과 함께하는 축제형태로 발전시켰는지요?
답) 2013년까지 관작리에서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살아 움직이는 기념사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2014년부터 위령제와 동학농민군 진격로 걷기대회를 병행시켜 행사의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그러고나니 행사가 좀 더 풍성해져서 참가자들의 반응이 좋더군요. 그래서 2015년부터는 폭을 더 넓혀서 동학농민혁명을 예산지역의 역사적 정체성과 연계·발전시키기 위하여 문화공연 등을 접목시켜 ‘내포동학문화제’로 운영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역사문화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일반인 참가자들의 호응을 높이고, 특히 학생들의 참여공간을 확대해나갈 생각입니다.

문) 동학농민군이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려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홍주목사였던 이승우가 4~5천여 명의 진압군을 투입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관작리전투가 바로 그것인데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하였죠? 이 전투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이 목시예포대도소에서 관군에게 습격을 당하고 패퇴한 후 가야산 속에서 혹독한 탄압과 시련을 겪으면서 운산 여미벌에서 죽기살기로 재집결합니다. 이때부터 농민군은 명령지휘체계를 다시 세우고 체계적인 방어전술을 펴면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면천 승전목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 여세를 몰아 한양진격을 위해 관작리로 집결한 동학농민군이 3만을 넘었습니다. 당시 동학농민군이 기록한 일기를 보면 그 수를 셀 수 없어 ‘백만대군’으로 표현했을 정도였습니다. 관작리 전투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9.18 총기포령이 내려진 이후 내포동학농민군은 사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관작리전투는 승리의 바탕이 충분했던 것이지요. 음력 10월 26일 오전에 시작되어 한나절가량 진압군인 관군, 유회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관군의 대장 김덕경이 농민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문) 내포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면천의 승전곡전투(10. 23.)가 있습니다. 일본군을 물리친 동학농민군은 연달아 고덕면 구만리와 예산 관작리에서 승리한 후 10월 28일 오후 홍주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동학농민군은 타격을 크게 입었지요? 이들 전투상황에 대해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클라이막스는 운산여미벌 재기포로 시작해 중무장한 일본군을 면천 승전목에서 물리치고, 면천읍성에 무혈입성 한 후 고덕 구만리에서 군량미를 보급 받아 하포리 춘암 박인호 생가 마을을 거쳐 오가 역촌을 지나 관작리로 이동하여 대승을 거둔 때까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포지역 홍주성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 관아가 동학농민군 수중에 떨어졌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승전고를 울리면서 28일부터 이틀간 홍주성 공격을 감행하다 동학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홍주성 전투에서 사망한 동학농민군 시신과 색출되어 처형된 사람의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는데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지역에서 활동했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대표적인 인물은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하신 춘암 박인호 선생입니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내포지역에 동학의 가르침을 포덕하고 조직 기반을 갖춰 보은취회 때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덕의대접주로 임명되어 내포지역 9월 그믐기포를 주도했습니다. 이후 천도교 4대교주로서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분입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으로는 예포대접주 상암 박희인 선생입니다. 서산·태안지역에 동학을 전파하여 동학농민군의 조직적 활동 기반을 제공한 분입니다. 이밖에도 서산의 장세희, 태안의 고정환, 김종희, 덕산의 고운학, 면천의 이창구, 대흥의 유치교, 차경천 예산의 김기태 등 많은 인물들이 접주 또는 수접주로 활동하면서 관군과 유림군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문) 예산지역에 유적지도 많지요? 유적지에 대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현재 성역화로 추진되고 있는 대표적인 관작리 전적지(예산동학공원)와 기포 후 최초로 집결하여 대도소를 설치했던 삽교 성리 옛 장촌면소 터와 유숙지 그리고 기포 전까지 도소역할을 했던 춘암 박인호 생가지가 남아있습니다. 또 대흥관아 점령사건이 일어났던 대흥동헌, 동학농민군 주둔지였던 삽교 송산리 역리, 오가 역촌, 고덕구만리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대흥 금곡리에 차경천 접주 유허지, 응봉 주령리 정인교 접주 생가지,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우물과 관아세곡미를 탈취해 굶주린 농민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준 터 등이 있습니다.
문) 2007년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은 물론이고, 내포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및 활동했던 참여자 후손들을 연구·조사하여 290쪽에 이르는 책자 『예산동학농민혁명사』를 발행하셨지요? 집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서 얘기해주실 것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답) 제가 예산지역 동학관련 발굴 조사연구를 해서 2007년 『예산동학농민혁명사』를 발간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의욕만 앞세워 발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자료와 전체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시간을 가지고 했어야 했는데,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바탕을 마련하고자 너무 급하게 추진하다보니 졸작을 펴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부끄럽습니다. 책을 간행한지도 벌써 10년이 지나서 새롭게 나온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여 증보판을 낼 계획입니다.
문) 끝으로 못다한 이야기라든가, 기념재단 혹은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여러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한참 의욕을 가지고 활동할 때 우리지역 향교 전교를 지내셨던 어른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학식이 꽤 높으신 분으로 지역에서 존경을 받는 분인데 ‘동학농민군’을 ‘동비’라고 부르더군요. 한 세기가 지났어도 동학농민혁명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한 결과죠. 그만큼 예산지역에서 동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역사정의를 실현한다는 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참여 분위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야겠다 마음먹고 있습니다. 점차 분위기가 좋아지겠지요.
문) 여러 일들로 바쁘신 와중에도 긴 시간 내서 대담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힘찬 발전을 기원합니다.
답) 원거리임에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단이 각 지역의 기념사업단체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지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