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권승영의 증손자 권순정

문) 이번 호의 동학농민혁명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권승영의 증손자 권순정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저는 갑오년에 일어난 농민혁명 때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으려 목숨 바쳐 투쟁하신 휘(諱) 권승영의 증손자 권순정입니다. 저는 증조부님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높이 받드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조부님과 제 부모님께 들은 얘기에 의하면 저의 증조부님은 배를 곯으면서도 많은 재산을 동학농민혁명 동지들에게 식량과 군자금으로 선뜻 내주는 등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셨다고 합니다. 증조부께서는 기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정의의 깃발을 들었는데 죄 없는 죄인이 되어 도망을 다니다가 가족도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어디에서 어떻게 순국하신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어쨌거나 증조부님의 애국심은 조부모님께 그대로 내림으로 이어져 제 아버님을 일본사람이 가르치는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고, 제 아버지께서도 저를 일본인 학교에 보내지 않아 저는 서당에 다니며 글을 배웠습니다. 해방 후 저는 대한민국 군대에 몸담았다가 6·10전쟁으로 대위로 예편한 뒤 행정고시를 준비하여 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앙선관위 창설 업무에 관계한 연고로 충북선관위 사무처장을 역임하였고, 충북 청주에 있는 우암산 기슭의 3·1운동 33인 중 충북출신 6인의 동상건립을 추진하는 사업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밖에도 통일국민당 충북사무처장을 역임하는 등 40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유족회 선배님들과 힘을 모아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후손의 명예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어 참 잘되었다 싶습니다. 이점에 대해 선생님의 감회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증조부께서는 나라와 민족으로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일본군의 불법적인 침략에 국권수호라는 기치를 들고 일본군과 결연히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총칼 앞에 무참히 스러지고 난 후 우리나라는 왜놈들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사건으로 왜곡되어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란군으로 몰렸고, 그 후손들은 반란군의 자손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채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했습니다. 다행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역사학계와 여러 지역의 뜻 있는 인사들이 단체를 설립하여 동학농민혁명사를 바로세우기 시작했고 그런 노력들이 특별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지요. 반란군, 반란군 자손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특별법 제정을 가능하게 했던 역사학계 연구자들과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념사업단체 임원과 회원님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문)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언제,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나요?
답) 일곱 살 쯤 되었을 때 조부모님, 아버님을 따라 고조부님과 증조모님 성묘를 갔었습니다. 그때 증조부님의 산소는 어디에 있는지 여쭤보면서 증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조부님께서 제게 증조부님은 동학(東學)을 신념으로 삼아 부패한 관리들과 불법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동하셨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거의 집에는 안 계셨다고 합니다. 부패한 정부가 자기 권력을 지키는 것에만 몰두한 채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은 탓이지요. 그래서 증조부님께서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하여 의를 들었다고 조부님께서 제게 직접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문) 특별법이 제정된 후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자료 등을 통해 확인하여 참여자로 등록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자료 등을 직접 조사하였는지요? 그리고 자료조사 등을 통해 증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한 후 심정은 어떠하셨는지요?
답)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은 집안어른들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었고, 제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안동권씨 세보 전15권) 중 제11권 29쪽 기록을 통해 증조부께서 갑오년 당시 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증조부님의 참여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증조부님의 유골을 찾지 못해 산소가 없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서럽게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게 패한 후 조부님께서 제천방면으로 떠나셨답니다. 당시 처지를 알 만한 사람들이 왜놈 앞잡이가 되어 증조부 댁을 밤낮으로 감시했다고 합니다. 도저히 살 수 없어 집을 버리고 소수면 애재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도 또다시 감시자가 따라붙어 다시금 하도로 이사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증조부께서 혁명에 참여하신 바람에 집안은 한순간에 풍비박산 났습니다. 제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시면서 겨우겨우 가솔들과 연명하였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께 그대로 대물림된 삶의 역경 때문에 조부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잠깐이었고, 근본적으로는 차별 없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 바친 증조부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답) 증조부님의 조부이신 휘 권재유께서는 1845년 무과제 1인자로 급제하여 질충장군 용호위 부호군의 관직에 올랐으나 나라의 앞날이 암담하여 사임하시고 민심을 읽어 올바른 여론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5촌 당숙 휘 권동진께서도 19세에 조선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초관과 함안군수, 거문도 검사를 지내셨는데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사임하시고는 3·1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셋째 집 형님 휘 권승열께서는 18세에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 민권 변호사로 활동하셨습니다. 해방 후에는 법무부 차장 헌법기초위원으로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부장을 역임하셨고, 초대 검찰총장 2대 10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셨습니다. 그 당시 친일파 관료들과 경찰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무장해제 당하여 그분의 대쪽 같은 성격대로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반민특위’무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청렴결백했는지 ‘도시락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해요. 증조부님은 안동권씨 7대 종손으로 할아버님과 5촌 당숙, 셋째 집 형님의 기풍을 이어 받으며 교류하였기에 기본적으로 서민들을 위하고 베푸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공감하였습니다. 가풍(家風)을 생각해보면 사상적인 면에서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게 된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문) 참여자로 등록하실 때 제출한 서류 등을 보면 증조부께서 1895년 제천방면으로 떠난 후 행방불명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답) 평소 증조부께서는 증조모님께 바깥일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셨다고 해요. 그러다가 아주 오랫동안 밖에 나가 생활하시면서 집에 들어오시지도 않던 증조부께서 1895년 1월 17일 밤 여러 사람들과 같이 집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증조부께서는 이미 1860년대 후반기부터 동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71년 경상북도 산간지역인 문경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접주 이필(이필제)의 영해농민항쟁 때에도 무기를 사들이고 쌀과 부식을 모아서 문경에 있는 이필제 접주에게 전한 일을 이야기 하셨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관군과 싸운 일, 증조부께서 괴산연풍 동학농민군들과 천마산성에 군량을 조달한 일, 조령전투에서 패전하고 손병희 선생님 이끄는 부대를 따라 공주 우금치 전쟁에 참전한 후 화양동을 거쳐 후퇴하던 중 충주에서 관군과 싸운 일 등을 할머님께 얘기해주셨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해준 후 제천방향 아니면 다른 어디론가 갈지도 모르겠다며 집안일을 잘 부탁한다고 증조모님께 말씀하시고는 나가셨는데 그게 마지막 작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증조부님께서 떠나신 후 증조모님께서 작은 보자기 하나를 주시면서 내가 떠나거든 모두 불태우라고 하셨답니다. 그렇지만 증조모님께서는 이 보자기 안에 있는 것을 태우지 않고 가지고 계셨는데, 그 보자기 속에는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서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증조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할머님이 부엌 아궁이에 넣고 모두 태우셨다고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중심의 낡은 봉건체제를 개혁하여 만민이 평등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고자 일어선 반봉건 민주항쟁입니다. 나아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우리나라를 불법적으로 침략한 일본근대를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반일 민족항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 참여자들은 ‘역적’으로, 그 후손들은 ‘반란군의 후손’이라는 멍에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참여자 후손으로 살아오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으셨습니까?
답) 동학농민혁명 후손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반역자 집안으로 50년이라는 세월동안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겠지요. 증조모님, 조부모님, 부모님은 죄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신분을 숨겨야 했고, 재산을 일굴 수도 없었습니다. 따뜻하게 발 녹일 곳 없는 초라한 집에서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배움의 기회도 갖지를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는데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현저히 뒤떨어졌습니다. 그러니 높은 관직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못 꿨지요. 정신적으로 많이 외로웠습니다.
문) 선생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권승용 증조부님은 물론이고, 이후 일제강점기 때 3·1운동의 주역의 한 분이셨던 권동진 선생님이 집안의 어른이시던데... 이런 가풍으로 인하여 선생님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나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의지를 보이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옛말에 ‘씨 도둑질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타고난 유전자는 못 속인다는 것을 비유하는 속담입니다. 저는 학업을 중단하고 10년간 군인으로 생활했습니다. 군대 생활하면서 항상 약자 편에 서서 일했기 때문에 제가 근무하는 부대는 보다 원활한 소통으로 다른 부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후 행정관으로 일할 때에도 저는 뚜렷한 국가관을 가지고 소신 있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사적으로 채용과 승진 등에 관여했던 일을 확실하게 경계하여 그런 일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마는 정의와 성실, 근면과 실천을 생활신조로 살아온 덕분에 군에서 복무할 때 훈장과 표창장 25종을 받았고, 행정관 때에도 훈장과 상장 13개를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사회생활하면서 많은 상장과 표창장, 위촉장 등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받은 훈장·표창장·상장·상패 등은 어렵고 힘들어도 정의롭게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북돋우는 힘이자 등불이 되어주곤 합니다.
문)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후 14년째 접어들었습니다. 특별법 제정과 그 이후 이어지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 추진에 대하여 생각이 많으실 텐데 이점에 대해 허심하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특별법에 따라 문체부 특수법인으로 기념재단이 설립되어 참여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가예산으로 정신선양사업을 펼치게 된 것이 참으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들은 기념재단이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성토하고 그런다고 들었는데, 그건 뭘 잘 모르고 하는 말이지요. 혁명에 참여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참여자와 그 유족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것은 지난 100년 동안 반란사건으로 왜곡된 갑오년의 역사를 자손만대가 계승해야할 애국애족 정신의 표상으로 제자리를 되찾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혁명에 참여했던 조상님들과 우리 유족들의 회복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기념재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여러 정신선양사업에 대해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부에게 바라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우선적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서둘러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기념일을 제정하는데 많은 지자체와 기념사업단체들이 얽혀있어서 쉽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기념일을 정부가 원하는 날로 서둘러 정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기념일이 제정되어 정부에서 기념식을 주관하면 아무래도 유족들의 명예를 대중적으로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에야 독립유공자로 유족들을 대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과 그 유족들을 제대로 대우할 줄 아는 성숙한 대한민국이었으면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에 걸맞게 유족들에 대한 복지나 처우 등을 개선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은 참여자 유족 중에서 몇몇은 왜곡된 가치관으로 자기주장을 지나치게 강하게 피력하기도 하는데, 우리 유족들도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모나게만 행동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촛불집회 등이 우리 갑오선열님의 정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렇게 알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언행에 좀 더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의를 들었던 조상님의 훌륭한 정신에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 유족들도 이제는 이 지나치게 자기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경건한 마음으로 보다 정당한 언행을 통해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선생님,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