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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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12호
부안, 김제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부안, 김제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동학정 


  지난 2010년 준공된 새만금 방조제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새만금의 내부공사가 완공되는 2020년 이후에는 이와 맞닿은 부안과 김제에 더욱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는 지금의 상황과 반대였다. 부안의 농민군들은 1894년 봉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부안관아를 점령하였으며 황토현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부안을 빠져나와 고부에 주둔하였다. 김제의 농민군도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에 금구 관아를 점령하고 전주로 나섰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동시에 봉기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보였던 부안, 그리고 우금치의 처절한 패배 이후에도 전열을 가다듬어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였던 김제에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119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부안과 김제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되짚어보자.



  부안관아 터



▶부안관아 터-문루


  어머니 손길 같던 봄볕의 따사로움이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가고, 긴 겨울에 자신의 힘을 온전히 펴지 못한 것이 한이라도 됐다는 듯 5월 말이 채 되기 전부터 햇살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아름다운 것은 길지 못해 안타깝다지만 역시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봄이 갈수록 빠르게 지나간다는 게 가장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이어 내린 비를 맞고 기운차게 우거진 녹음을 바라보며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아침부터 날이 흐리다. 예보로는 일주일간 흐린 날씨가 이어질 것이라 했지만, 오늘 오후에는 구름이 물러나길 빌어본다. 답사의 시작이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 부안을 방문했던 어사 박문수가 ‘어염시초(물고기, 소금, 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모시기에 좋으니 생거부안이로다’ 라고 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던 부안이었기에 더욱 부정부패의 질곡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발발직후, 금구로 진격하였던 농민군들 중 일부가 부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500여명의 농민군과 합세해 부안관아를 점령하였다. 또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금구까지 진격하였다가 감영 포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태인까지 후퇴하였을 때도 그 중 일부가 부안의 동헌을 공격해 현감을 구금하였으며 공형들에게 장(杖)을 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재판하는 듯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부안관아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멋들어지게 지어진 부안군청의 뒤편에 부안관아로 드나들던 문루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갑오년의 농민군들은 이곳에 세워져있던 문루를 지나쳐 자신들의 개혁의지를 알릴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관아의 건물이 있던 곳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현재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나 문루의 방향과 비교해보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9년이라는 세월이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의 모습을 지워버렸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느껴진다.



  백산



▶ 부안백산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있다. 백산대회 당시 수많은 농민군들이 백의에 죽창을 들고 백산으로 모여들어 이들이 앉아있으면 죽창이 무수하여 대나무로 이뤄진 산처럼 보였고, 일어나 있으면 백의에 뒤덮여 하얀 산처럼 보였다는 의미다.


  백산은 배들평야에 솟아난 해발 47미터의 조그마한 야산으로 부안 동쪽 끝의 백산면에 위치해있다. 이런 조그만 산을 면의 이름으로 쓸 이유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백산에 오르고 난 후에는 모두가 그 이유를 납득한다. 백산의 주위로는 배들평야와 김제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지평선이 보일정도로 탁 트인 시야에 절로 감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마한시대부터 토성이 쌓여져 있던 곳으로, 축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의 왕자 부여 풍이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일본의 구원군을 맞이한 곳이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전열을 정비하고 격문으로서 이들의 포부를 밝혔던 백산대회가 열렸던 장소이다. 백산은 이처럼 예로부터 역사의 현장이었기에 1976년에 전라북도 지정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국가 사적 제409호로 승격되었다.


  고부봉기 이후 전봉준 장군은 인근지역에 격문을 전파하여 전국적인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큰 호응이 없었으며, 신임군수 박원명이 유화적인 태도로 민심을 다스리자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박원명을 질타하고 고부봉기 참여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자 전봉준 장군은 소수의 측근만을 거느리고 고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후 다시 고부로 들어가 농민군의 진영을 정비하기 위하여 백산에서 대회를 가진 것이다.


  주위를 감상하며 천천히 산을 오르는 데도 5분도 채 되지 않아 정상을 밟았다. 막히는 곳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선선하다.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감탄한다. 한두 번 방문한 것도 아닌데 오를 때 마다 감탄사가 나오는 절경이다.


  정면을 바라보니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보인다. 1989년 동학혁명백산기념사업회가 건립한 비로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던 박영석이 비문을 지었다. 동학농민혁명백산봉기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4월 26일 열리는 백산봉기 기념대회 중 탑에 헌화하고 있다. 창의비 뒤편에는 동학정이 세워져있어 이곳에서 주변의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금구 장터, 금구 관아터



▶ 금구 장터, 금구 관아터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수월히 백산을 내려와 김제로 향한다. 다행히 예보만큼은 날이 흐리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이 걷혀갔다. 김제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금구 관아터로 향한다. 금구면은 조선시대에 금구현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김제시로 통합되었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가운데 김덕명 장군과 김인배 장군이 배출되었고 전봉준 장군의 주요 활동무대 중 한 곳으로 동학농민혁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농민군들이 전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일부의 농민군들이 원평에서 금구로 이동하여 금구 관아를 점령했다고 한다. 이때 전투 없이 무혈입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농민군들은 곧장 관아로 향한 것이 아니라 금구면에 위치한 함성재에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아를 향해 고함을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관원들이 모두 도망가 버려 손쉽게 관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함성재라는 명칭도 이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금구 관아터에는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판이 세워져 오고가는 이들이 이곳에 금구 관아가 있었다는 것과 동학농민군의 지혜로운 일화에 대해 알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금구 관아터 바로 앞은 금구장터가 들어서던 곳이다. 양호초토사로 임명된 홍계훈은 전주감영의 군사책임자들을 농민군들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하나씩 처형하기 시작했다. 금구 장터에서는 전라감영의 수교 정석희와 체포된 농민군들을 참수하여 가로수에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당시 가로수들은 대부분 베어지고 한 그루만 남아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 때의 참상을 상상해 보기에는 충분하다.



  금구⋅원평도소



▶ 금구·원평도소


  금구 원평 지역에서는 김덕명 장군이 중심이 되어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금구⋅원평도소는 원평의 등록개라는 사람이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농민군에게 무상으로 헌납한 곳이다. 농민군은 이곳을 도소로 이용하였으며 전봉준 장군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현재 건물이 노후화되어 보수가 필요한 상황으로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범시민모금운동을 통한 건물 구입을 추진 중이며 전라북도에서는 문화재청에 각 시군별 문화재 긴급매입비를 요청하여 부지를 매입해 관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원평 구미란 전적지



▶ 원평 구미란 전적지


  공주 우금치에서 농민군은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논산 황화대를 거쳐 금구로 들어왔다. 전봉준 장군은 원평에 진을 치고 추격해온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또 다시 패배해 태인으로 후퇴한다.


  구미란 전적지를 찾았을 때 날이 완전히 개어 따뜻한 햇볕에 마음까지 풀어졌다. 지금의 전적지는 당시의 모습을 전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로운 시골마을이다.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시는 어른들의 말씀을 엿들어보니 ‘우리 구미란이…….’라는 말로 화두를 꺼내고 계신다. 주변을 몇 컷 찍고 병풍처럼 펼쳐진 야산을 바라보며 전봉준 장군이 이곳에서 어떤 식으로 진을 치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비했는지 상상해본다. 반복되는 전투와 패배 중에도 다시 한 번 심기일전하여 농민군들을 북돋고 진열을 정비하는 데에는 얼마나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것일까?


  구미란 전적지에서 멀지않은 곳에는 무명농민군 묘역이 있다. 소나무 숲속에 약간 볼록하게 솟아있는 30여개의 무덤으로,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구미란 전투 당시 전사한 농민군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무명농민군의 묘지조성사업을 진행 중이며 사적지 지정을 신청해 둔 상태이다.



  위령각, 김덕명 장군 추모비



▶ 위령각, 김덕명 장군 추모비


  구미란전적지를 뒤로하고 김덕명 장군 추모비를 찾아 차를 돌린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해 준 대로 찾아가니 좁은 언덕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언덕 위에는 커다란 대문이 활짝 열어놓은 주택이 서있어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대문을 약간 지나치니 좌측에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오른쪽의 비는 원평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희 장군 추모비이고 왼쪽의 비가 김덕명 장군의 추모비다.


  김덕명 장군은 일찍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원평의 대접주로 활약하였으며 원평 구미란 전투와 태인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그 후 1895년 1월에 태인에서 피체되어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51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사진을 몇 컷 찍고 있으려니 인기척을 느끼고 나오신 주인어르신이 인사를 건네신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늦게나마 촬영허락을 구해보니 흔쾌히 허락하시고 바로 옆에 있는 위령각이 무명동학농민군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덧붙이신다. 마치 정자 같은 생김새의 위령각에는 전봉준 장군, 김덕명 장군, 무명 동학농민군, 독립운동가 이종희, 기미독립만세운동 항일투사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원평전투가 일어난 11월 25일에 맞춰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촬영을 마치고 이동하려는 차에 주인어르신께서 위령각과 마주보고 있는 최순식 선생 공적비를 소개해 주신다. 최순식 선생은 김제지역의 향토사학자로 지역발전협의회와 향토문화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향토사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사료조사위원으로 위촉받아 종신토록 김제지역의 사료발굴에 몸 바쳤다. 또한 구미란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매년 주관하여 개최하였으며, 현재는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이를 이어오고 있다. 최순식 선생은 2008년 1월에 타계하셨고 그분의 공적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8년 10월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1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벌써 11번이 바뀌고 한 번 더 바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동학농민혁명정신이 잊혀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올 수 있기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했을까? 그 노력이라는 벽돌이 하나하나 쌓여 마침내 집을 이루었을 때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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