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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12호
사발통문 봉기계획

  사발통문 봉기계획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잉태 단계에서 당사자들이 직접 남긴 유일한 자료이다. 따라서 가치의 중요성만 따진다면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육성증언에 비견된다. 그러나 이 사발통문은 형태나 내용이 완전하지 못하고, 진위에 대한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 인정받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발통문|이 사발통문에는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이전의 ‘민란’에서는 상상 할 수 없었던 ‘군수살해, 감영 점령과 서울 진격’등을 계획하였다는 것이다. 즉 전봉준 등 전라도의 변혁지향세력은 이 단계에서 기존의 농민봉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확대된 무력봉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사발통문 봉기계획을 세우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의 변혁지향세력들은 삼례집회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서울의 괘서사건, 그리고 금구집회에서 조선사회의 변혁을 위한 일관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893년 5월 이후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계사년(1893년) 11월 ‘사발통문 봉기계획’을 통해 그들의 지향과 목표가 확인된다. 사발통문의 내용을 통해 전봉준 등 전라도의 변혁지향세력들이 강력한 무력봉기 계획을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리 리집강 좌하


우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전하니 여론이 물끊듯 하였다.

매일같이 난망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어 있겠냐’

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같이 모여 차례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목베어 죽일 것

-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우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군략에 능하고 세사에 민활한

  영도자될 장 …… 이하 판독불능


  사발통문 서명자 :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렬,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



  동학농민군의 기록, 사발통문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잉태 단계에서 당사자들이 직접 남긴 유일한 자료이다. 따라서 가치의 중요성만 따진다면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육성증언에 비견된다. 그러나 이 사발통문은 형태나 내용이 완전하지 못하고, 진위에 대한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 인정받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발통문은 본래 ‘주동자가 누구임을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관계자의 성명을 둥글게 돌려 적은 통문’이란 의미의 보통명사임에도, 이제는 특정하게‘고부모의’만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져 버렸다. 사발을 엎어놓고 돌아가며 서명해 주동자를 구분할 수 없도록 한다는 이러한 형태의 문건은 계조직의 문서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지만 이처럼 실제 모습을 직접 보여준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1968년말 모습을 처음 드러낸 사발통문은 당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연구자들이 귀중한 자료의 출현에 크게 고무됐으며 한편으로는 고부농민봉기의 성격 규정 등 1894년 사건전반이 일시적 혼란 속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외솔회는 사발통문 발견 이후 진척된 연구들을 모아 1974년 나라사랑 15집을 ‘녹두장군 전봉준 특집호’로 제작, 사발통문의 사료적 가치를 공식화하기도 했다.


  이후 사발통문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서명자 20명과 결의 4개항, 그리고 발견시기와 경위 등이 논란이 되었다. 또한 「고부민란의 사발통문」(1985)이라는 논문을 통해 사발통문을 재검토한 신용하 교수는 ‘사발통문이 당시 원본도 아니고 고부민란에 대한 회고록의 일부를 필사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장영민 교수는 「1894년 고부민요연구」에서 ‘사발통문의 본 내용이 1893년 11월 또는 12월에 있었던 정소(呈訴)와 관련된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사발통문에 대한 논란은 오랜 기간 동안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사발통문이 전적으로 신뢰하기엔 일부 결함을 안고 있는 비교적 허술한 자료지만 동학농민혁명 전반을 이해하는 데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핵심적 요소임을 부정하기도 어려운 사료이다. 사발통문의 일정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라면 ‘사발통문이 가짜라거나 조작됐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내용 자체가 명백해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면 문제를 위한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는 어느 향토사학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동학혁명모의탑|사발통문이 실제 만들어지고 발견된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입구에는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져 있다.  1969년 4월 15일 완공된 이 모의탑은 서명자 중 한 사람인 송국섭의 아들 송기태 씨 등이 주축돼 서명자 20인의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동학의 혁명정신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김은정·문경민·김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출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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