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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겨울 10호
공주 우금티의 겨울 전투

  공주 우금티의 겨울 전투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의원 

이원구



  어제 폭설이 쏟아지고 밤엔 한파가 도시를 덮쳐 길이 온통 얼어붙었다. 칼날처럼 매서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동서울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을 벗어나자 온 세상이 흰 눈으로 가득 덮여 있다.


  ‘공주 우금티 전투가 이맘때 벌어졌겠구나.’


  1894년 음력 4월 7일 정읍 황토현,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승리하고 26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면서 관군과 화약을 맺고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조정이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 일본도 쥐새끼같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기 때문이다.


  농민군들이 보리를 베고 모내기 하는 동안 농민군 지도부는 급변하는 정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을 세운 뒤에 아산만에서 청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8월에 평양전투에서 청국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봉천, 여순,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청국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6·25때 한반도가 미군과 중공군의 싸움터였듯이 청일전쟁 때 조선의 중북부는 전쟁터였겠구나.’


  6월 25일 민비를 내쫓고 대원군을 내세운 일본은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야전용 전선을 설치해 나갔다. 대신 농민군 지도자들은 전라도를 순회하면서 조정을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군현 단위로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적으로는 사회개혁을 쟁취하였다. 드디어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안을 발표하여 문벌과 반상의 차별 폐지, 노비제도 혁파, 과부의 개가 등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일부 수용했지만, 삼남 일대의 농민군은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에 강력하게 항거하였다. 특히 청일전쟁 주에 강제로 군수물자를 빼앗기고 인부로 끌려 나간 영남과 충청의 농민들은 일본 병참부를 습격하고 일본 상인들을 살해하여 일본군에게 보복했다.


  마침내 남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 김개남이 8월 19일 교룡산성 병기고의 무기로 무장하고, 농민군 8만 명을 5군으로 편성하여 전투준비를 해 나갔다. 전봉준도 대원군의 밀사 이건영을 만난 뒤에 삼례에서 9월 10일 농민군에게 격문을 발송하여 재무장을 촉구하고 관아에 협조를 부탁했다.


  ‘이번 거사에 호응하지 않는 자는 불충무도(不忠無道)한 자다!’


  9월 중순 경 전라도 29개 군현의 무기고를 헐고 무장한 농민군 10여만 명이 삼례의 전봉준과 남원의 김개남 휘하에 모여들었다. 10월 11일에 무력 봉기에 주저하던 북접의 농민군이 참여하겠다고 통보하자 전봉준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끌고 삼례를 출발하여 다음날 논산에 도착했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농민군 5,000여 명도 10월 15일 논산에서 합류했으며, 김개남의 8,000여명의 농민군은 16일전주로 이동하였으며, 최경선은 손화중과 함께 나주로 가서 일본군이 바다로 상륙하여 협공할 것에 대비하였다. 이제 공주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북상하는 일만 남았다.


  ‘비정규군인 농민군이 겨울에 전투를 시작하다니.’


  정안을 지나치는 고속버스 차창 밖으로 눈 덮인 산줄기가 정답게 다가왔다. 산등성이는 부드럽게 가라 앉고 있고, 가까이 밤나무, 참나무, 소나무가지에 달린 눈이 과일처럼 탐스럽다.


  공주는 바람결이 매서웠다. 정읍의 기념재단 두 분과 전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이윤영 관장의 안내로 공주 감영 터로 향했다. 공주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가 예전의 감영 터였다. 국어교사 한 분을 만나 안내를 받았지만 해묵은 회나무 밑에 주춧돌 십여 개가 덩그런 할 뿐이었다. 마침 안내판이 서 있었다. 원래 청주에 있던 충청도 감영을 임진왜란 이후에 전략적 요충지인 공주 공산성으로 옮겼지만 비좁아서 숙종 때에야 비로소 봉황산 기슭인 이곳에 정착하여 그 후 200여 년간 충청도 관찰사의 집무실 터가 되었다.


  학교의 현관에 전시된 감영의 정문이 포정문, 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흑백 사진을 보여준 국어선생이 학교 뒤 봉황산 자락에 신사 터가 있다고 귀띔한다. 그 말에 귀가 번쩍 열렸다. 그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열 댓 개 올랐다. 눈을 털자 자그마한 오석에  새긴 글씨가 드러났다.


  ‘신사터(神祠址),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의 상징이던 신사가 있던 곳’


  씁쓰름하게 입맛을 다시면서 뒤돌아 내려오는데, 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공주 시내의 설경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북접 대장 손병희가 봉황산을 공격하여 공주감영을 점령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이 관장이 들려주었다. 하지만 충청감사 박제순은 아전들을 끌고 이미 공산성으로 도피한 뒤였다. 북쪽엔 금강이 흐르고 삼면이 절벽이 공산성은 후기 백제의 수도였을 만큼 견고한 요새였다. 오늘은 눈이 쌓이고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저물어 공산성 답사를 포기한 일행은 서둘러 우금티로 출발했다. 공주는 새둥주리 같이 산으로 둘러싼 좁은 구릉지대다. 십 여분 찰 달리자 곧 우금티였다.


  ‘아! 마치 처녀지 같네요.’


  탄성을 지르면서 정읍의 답사팀 황 선생과 조 선생이 앞서가면 나와 이 관장은 그 발자국에 발을 디뎌야 할 만큼 눈이 깊었다. 동학혁명위령탑 주변은 신천지, 아니 천지개벽처럼 신선하였다.


  ‘동학군이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꿈꾸었었지.’


  그러나 낡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던 동학농민군의 꿈은 이곳 우금티에서 비참하게 좌절되고 말았다. 위령탑 앞에서 이 관장이 천도교식으로 심고(心告)를 올리고, 가락에 맞추어 시천주(侍天主)를 선창하여 모두들 크게 따라했다.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이 주문을 낭송하면서 동학군들은 신들린 듯 돌진했을 것이다. 그 동학군들이 어젯밤 흰 눈으로 여기 우금티에 내려왔을 지도 모른다. 이선근 박사가 썼다는 위령탑의 비문에 얼어붙은 눈을 털고 읽어 보았다. 헌데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게 된 만큼’이라는 구절을 누군가 군데군데 돌로 쪼아놓았다. 모욕감을 느낀 민초들이 분노를 터트린 듯 보였다.


  ‘우금티에 기념관 하나 없다니!’


  우금티 입구에 원효사가 보였다. 동학군의 원혼을 달래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금티 터널을 빠져나와 주유소에서 차를 내려 고개를 되돌아보았다. 우금티는 동쪽의 주미산과 서쪽의 견준산 자락이 마주치는 아주 나지막한 고개다. 저 고개에서 농민군과 관군들이 처절하게 싸웠다. 대포소리와 총소리 속에 함성과 절규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11월 23일부터 3일간 이인, 효포, 웅치 등지에서 전초전을 치른 2만여 농민군은 공주를 점령할 최적지를 우금티로 정하고 정예부대를 집중 배치했다. 관군의 우선봉장 이두황은 망원경으로 ‘선봉진 일기’에 기록을 남겼다.


  ‘초 9일 새벽에 적진의 형세를 정탐하니 각 진이 바라보이는 곳에 깃발을 두루 꽂았는데, 동쪽으로 판치 뒤 봉우리부터 서쪽으로 봉황산의 뒤 봉우리까지 3,4십리를 이어 뻗쳐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고 매우 커서 우리 군대의 미약함을 염려하였습니다.’


  당시 관군은 공주의 금학동, 능치, 효포의 봉수대 등 요새마다 이미 병력을 배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우금티에는 서산군수 성하영, 견준봉에는 경리청영장 백낙완, 주봉에는 영장 이기동 등이 미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 지휘관 일본군 육군대 모리오는 그 사이사이에 일본군을 배치시켰다. 6.25때 한국군의 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겼던 것처럼 김홍집 친일 내각은 농민군 토벌의 총 지휘권을 일본 장교의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11월 9일, 양력으로 12월 5일 오전 10시 경부터 오후 8시까지 벌어져 하루 종일 치열하게 공방전을 펼쳤다. 농민군은 이인을 출발하여 우금티와 서쪽의 오실 뒷산 두 방향으로 4,50 차례나 필사적으로 맹공격을 감행하였다. 선봉장 이규태는 그 당시 정경을 묘사했다.


  ‘아아. 저들 비류(匪類) 수만의 무리가 4,5 십리에 걸쳐 두루 둘러싸 길이 있으면 싸워서 빼앗고 고봉을 점거하여 동에서 소리치면 서에서 따르고 왼쪽에서 번뜻하면 오른쪽에서 나타났다.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기어오르니 저들은 무슨 의리(義理)이고 무슨 담략(膽略)인가. 정상을 생각함에 뼈가 절리고 마음이 서늘하다.’


  ‘갑오년 관보(官報)’에는, ‘관군과 일본군이 산등성이에 둘러서서 일시에 일제히 총탄을 퍼붓고 다시 산 안으로 몸을 숨기고, 적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또 산등성이에 올라 총탄을 퍼붓고, 이같이 하기를 4,50 차례나 되니 시체 쌓인 것이 산에 가득하다’고 그 치열함과 참혹함을 기록하였다.


  겨울저녁 캄캄한 8시까지 계속된 우금티 전투는 농민군의 패배로 판가름 났다. 농민군 만여 명이 일본군 중대병력 200여명과 관군 2,500여명에게 참패당한 것은 무엇보다 무기의 열세 때문이었다. 30초에 한 발을 발사하는 농민군의 화승총과 창, 칼, 활 등 재래식 무기, 그리고 조일(朝日) 연합군의 미국제 스나이더 소총, 무라다 소총, 1분에 1,000발식 발사하는 캐틀링 기관총, 그리고 망원경 등 신무기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인으로 내려가면서 문득 조선 법관과 일본공사가 함께 시문한 정봉준의 ‘공초(倥草)’가 기억났다. ‘2차 접전 후 만 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 자가 불과 3천 명이었고, 그 뒤에 2차 접전하고 점고하니 500여명에 불과했다.


  우금티에서 이인은 4km 남짓하니 농민군이 걸어서 한 시간이면 족한 거리다. 10월 21일 논산을 출발한 농민군 제1군은 공주의 동쪽이며 계룡산 뒤편인 판치, 효포, 웅치로 진격하고, 제2군은 공주 남쪽인 이인으로, 제3군은 서쪽인 봉황산으로 진격했었다. 공주지역의 첫 전투는 10월 23일 이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조일(朝日) 연합군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공주로 후퇴하였다.


  ‘이인 전투는 이인 초등학교에서 벌어졌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흔적이 없다네요.’


  정읍 답사팀이 털어놓은 정보였다. 흰눈이 쌓인 학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교무실로 들어갔다. 임광순 교감이 반기면서 이인이 예전엔 역참이었고, 그 표지석을 면사무소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인면지’의 동학농민전쟁과 이인전투‘부분을 보여준다.


  ‘친일파 박제순 충청감사의 거사비’와 농민군 토벌에 앞장선 ‘유림의병 병난사적비’사진이 유난히 눈에 아프게 파고든다.


  농민군 제1군의 공격로였던 효포로 가는 지름길은 이인에서 10여분 거리지만 폭설로 답사가 불가능했다. 다시 공주로 들어가 옥룡동을 거쳐 효포 쪽으로 차를 달렸다. 편도 2차선 도로가 번듯한 효포는 바람이 사납고 황량한 산줄기가 끝이 없다. 이 효포 서쪽 산줄기에 주미산과 우금티, 그 너머가 견준산, 북서쪽에 봉황산이 공주를 감싸고 있고, 충청감사 박제순이 감영을 차린 공산성 북쪽에는 금강이 흐를 것이다. 이처럼 천혜의 요새여서 농민군이 공주를 공격목표로 삼은 것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벌써 산등성이에서 겨울 햇살이 반짝였다. 서둘러 공주로 향했다. 우금티에서 패한 농민군은, 길을 터주고 함께 왜적을 물리치자고 관군에게 호소문을 보냈으나 거절당한 채 관군에게 쫓겨 논산으로 후퇴했다. 김개남의 5,00여명 농민군도 청주 전투에 패배하여 한양으로의 북상이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11월 14일 논산의 황학대, 25일 원평, 27일 태인에서 각각 전투를 벌였지만 줄곧 패배한 전봉준은 1월 27일 5,000여명의 농민군을 완전히 해산했으며, 일본군과 관군은 장흥 강진 해안까지 동학농민군을 몰고 가서 무자비하게 소탕하고 그들의 야욕을 채웠다.


  후퇴하는 농민군처럼 답사팀은 정읍으로 돌아가고, 혼자서 바람 찬 금강으로 걸어갔다. 공산서이 강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흔들리고, 갈대밭에서 물새들이 끼륵 끼르륵 울고 있었다. 쫓기던 동학군들은 유난히 춥고 눈이 깊게 내린 그해 겨울에 30여만 명이 참살 당했다. 유림과 부호들이 조직한 민보군이 더 잔인하게 동족인 농민군을 학살하고 약탈했지만, 을사조약 이후에 터진 의병의 반은 갑오년에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이었다고 한다. 충청감사 박제순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 되어 역사에 그 오명(汚名)을 남겼다.


  그러나 황해도 동학군 접주였던 김구는 민비를 시해한 일본군 장교를 때려죽인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3·1운동을 일으켜 민족 자주정신을 드높였다.


  ‘이 추위에도 흐르는 강물은 얼지 않는구나. 백제가 당나라에게 멸망당할 때도 금강 물은 저리 푸르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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