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군의 전주성 점령과 완산전투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의원
이원구
전주성 무혈입성
두 개의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한 놈은 사나운 바람으로 할퀴고, 뒤따라온 놈은 물 폭탄으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흡사 탐관오리가 백성을 착취하고 외세가 짓밟던 조선말 같았다. 전주로 가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구월 초의 들판엔 벼이삭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1894년 음력 4월 7일(양력 5월 11일) 정읍 황토현에서 감영군 1000여명을 몰살시킨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강변에서 최정예 경군까지 물리치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초토사 홍계훈의 진압군을 남쪽으로 유인한 농민군은 전주성이 텅 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였다. 더구나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한 경기전 안에 전주이씨의 시조와 시조비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또 전주사고에 왕조실록이 보존되어 있어서 전주성은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조정과 농민군 모두 전주성의 가치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4월 25일 동학농민군이 금구 원평에 다다라 임금이 파견한 선전관까지 공개처형하자 다급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정에 공문을 띠웠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당대 최고 지식인 황현은 탐욕스럽고 무능한 관리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난의 원인을 제공한 자는 균전사 조필영, 불을 지핀 자는 고부군수 조병갑, 꺼져가는 불길에 부채질한 자는 안핵사 이용태, 시끄러운 국면을 불러 길을 틔워 준 자는 전라감사 김문현이다.’
4월 26일 전주 삼천동에서 하룻밤을 묵은 농민군은 다음날 오전에 전주성 서문 쪽으로 진격하였다. 고부, 무장, 김제, 정읍, 고창, 남원, 순창, 장수, 나주, 장흥, 해남, 강진 등 전라도 각지에서 온 2,3만 명의 농민군은 용머리고개부터 서남쪽 완산, 서쪽 다가산과 황학대 방면까지 일자로 진을 펼치면서 전주천을 건너 전주성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미 파직 당한 김문현은 새 감사 김학진이 도착하지 않아서 서문을 닫아걸고 서문 밖의 민가 수백 채에 불을 질러 농민군이 성을 타고 넘어와 공격할 것에 대비하였다.
‘헌데 청나라의 파병을 요청까지 한 초토사 홍계훈은 성 안팎의 민가에 불을 지른 것이 농민군이라고 조정에 황당한 장계를 올렸다니!’
마침 그날은 전주성 서문 밖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장꾼들에 뒤섞여 농민군 수천 명은 미리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정오에 용머리 고개에서 공격 신호인 대포가 터지고 콩 볶듯이 총소리가 들려오자 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성안의 백성과 아전, 군교, 노비, 사령 들은 살길을 찾아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성가퀴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죽은 자가 셀 수 없었다. 농민군은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이미 농민군 편이 된 관노 사령 등 하층 관속들이 성문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파수병들은 줄행랑을 치고 관원들도 모두 동문 밖으로 달아났다. 감사 김문현은 허름하게 변복을 한 채 피난민을 따라 공주로 도주하였고, 판관 민영승은 도망치는 관리들에게 조경묘의 위패와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빼앗아 위봉산성의 위봉사 대웅전에 모셨다. 무관인 좌 우 중군장까지 판관을 따라 도주하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은 천천히 대군을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서문으로 들어와 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에 좌정하였다.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첫 번째 목표였던 전주성을 무혈점령하였다.
피비린내 진동한 완산전투
열차는 익산을 지나 대장촌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잘 정리된 너른 들판이 마치 거대한 모자이크 같았다. 이 지역도 왜인들이 농장을 차려 악착같이 쌀을 긁어간 곳이다. 군데군데 태풍으로 쓰러진 벼와 갈가리 찢긴 비닐하우스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전주역에 도착하자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서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다.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직원, 문화해설사 두 분과 함께 동학혁명기념관으로 향했다. 정겨운 한옥마을 늙은 은행나무 앞에 기념관이 서 있었다. 기와를 인 황토색 이층 건물 벽에 안내하는 글이 앞을 막아선다.
‘동학(천도교)은 1860년에 우리나라 경주 용담에서 창명된 새 종교이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종지로 널리 알려진 동학의 교시 사상이 1894년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기치 아래 동학혁명의 횃불로 타올랐다.......’
연녹색 생활한복 차림의 이윤영 관장이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근 한 시간 동안이나 정성껏 안내해 준다. 기념관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자료가 주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동학의 창도와 수난 과정, 동학농민혁명 이후의 동학교단의 발전과 문명개화운동 모습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 관장이 참 인상깊은 말을 던졌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두 명의 여종을 해방하여 한 분은 수양딸로 삼고 또 한 분은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해월 최시형 신사는 자연을 한울님으로 섬기라고 하셨는데, 땅이 아프다고 나막신을 못 신게 했답니다.”
그렇다면 풀과 나무, 새까지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리 반문하면서 거대한 액자 앞에 다다랐다. 유족으로 등록된 천여 명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에 30만 명 이상이나 희생된 조선 백성들을 기억하면서 기념관을 나와 풍남문으로 차를 돌렸다.
풍남문(豐南門)은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의 정문답게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마침 기와 보수작업 중인 인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화해설사 김수웅 선생을 따라 풍남문 성곽 위로 올라갔다. 높고 폭이 넓은 옹벽이 장관이었다. 원래 전주부성은 높이가 2.4m, 둘레가 3,2km, 반경 500m인 원형의 성곽인데,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었다. 풍남문 서쪽 종루에 종을 달았고, 동쪽 포루에 대포를 놓았다. 그런데 바퀴가 달린 그 야포가 지금도 남쪽으로 포구를 향하고 있었다. 총구 10cm, 포신 225cm, 사거리 300~500m의 야전용 대포였다.
“아, 관군이, 아니 농민군이 저 야포로 관군에게 포탄을 쏘았겠구나.”
눈을 지그시 감으니 환영처럼 당시 전투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농민군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성이 점령당한지 하루 뒤인 4월 27일 완산의 용머리고개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자기가 거느린 경군, 증파된 강화영병, 전라 감영병 등 1500명을 북쪽의 건지산, 동쪽의 기린봉과 오목대, 남쪽의 완산, 서쪽의 다가산과 황학대에 배치하여 전주성을 넓게 포위하였다. 결국 농민군은 전략적인 고지를 다 내주고 꼼짝없이 전주성에 갇히고 말았다. 농민군의 큰 실수였다. 완산전투는 음력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벌어졌는데, 홍계훈이 조정에 올린 ‘양호초토등록’에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홍계훈)은 전주부의 남쪽에 있는 완산 위에 집결하고 대포 3발을 시험 삼아 성내에 쏘았는데 적도들이 서쪽과 남쪽 두 문을 열고 수천 명이 일시에 뛰쳐나와 달려왔습니다. 남문으로 나온 적들은 하얀 장막으로 앞을 가리고 남쪽 산으로 올라오고, 서문으로 나온 적은 산의 서쪽으로 올라오고, 성 안에 있는 적은 성루 위에 한 줄로 서서 일제히 아군을 향해 끊임없이 포를 쏘아 나르는 탄환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동쪽 능선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병사도 포를 발사하니 적도중에 갑옷 입고 투구 쓰고 환도를 차고 천보총(千步銃)을 가지고 앞장서서 온 30여 명은 총탄에 맞아 곧바로 죽었습니다........”
완산의 첫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패배였다. 수백 명의 농민군이 부상당하고 죽었는데, 경군은 서문 밖의 민가 800여 채까지 불태웠다. 또한 경군의 포격으로 경기전과 관청, 성곽의 일부가 파괴되고 성 안팎의 민가 수천 채가 불타 버렸다.
다음날 4월 29일 농민군은 북문으로 나와 다가산 서북방의 황학대를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창과 극, 화승총을 들고 탄환을 피하려고 등에는 붉은 주문을 붙이고 시천주 주문을 외우며 빗발치는 탄환 속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하였으나 경군의 회선포 공격으로 백여 명이 쓰러졌다. 4월 30일에 농민군은 성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5월 1일 오전엔 농민군이 남문을 열고 싸전다리를 건너 완산 주봉의 경군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5월 2일에도 경군이 전주성에 대포를 쏘아대자 농민군은 서문을 열고 용머리고개의 경군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여 성문을 굳게 닫았다.
완산전투의 최대 격전은 5월 3일에 터졌다. 오전 10시경 농민군은 서문, 남문을 열고 나와 지금의 다가교인 사마교를 건너 신흥학교 근처의 유연대를 공격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경군의 본영인 용머리고개까지 쳐들어갔으나 관군의 포격으로 무려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저물 무렵에 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농민군의 용장 김순명, 선봉장이며 14살 아기장수인 이복룡이 전사했고, 전봉준 대장군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대장기까지 빼앗긴 농민군은 사기가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더구나 홍계훈의 회유와 교란 작전에 말려든 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을 체포하여 바치자는 모의까지 벌렸다. 왜냐하면 경기, 충청지방에서 관군의 지원병이 오는데, 포위된 농민군들은 고립되었고 군량미와 말먹이까지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한참 보리를 베고 모를 내야 할 농사철이었다. 비록 총과 칼을 들었지만 농사는 농민들에게 생계 이상의 크나큰 기쁨이었다. 무엇보다 조정이 갑론을박 끝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군대를 파병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이 외세를 불러들인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폐정개혁안과 전주성 철수
안팎으로 큰 위기에 몰린 농민군은 27개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성에서 철수하겠다는 서신을 초토사 홍계훈에게 보냈다. 개혁안은 크게 탐관오리의 처벌, 삼정의 개선과 부당한 세금 철폐, 외국 상인의 불법 상거래 금지 등이었다. 드디어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홍계훈은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며 임금에게 폐정개혁안을 올린다.’ 는 조건으로 타협이 성사되었다. 바로 전주 화약(和約)이다. 5월 8일 저녁 무렵 농민군은 전주성의 동문과 서문, 북문을 열고 나와 총과 칼을 지닌 채 황방산과 검암리 부근에 머물다가 밤을 틈타 김제 부안 고부 무장, 그리고 금구 태인 쪽으로 물러갔다.
‘비록 전라도에 국한되었고 3개월 동안이지만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동학농민군들이 집강소에서 민권행정을 실시하였으니, 가슴 벅찬 일이구나!’
치열한 완산전투 그 무렵처럼 날이 무척 무더웠다. 다시 비가 쏟아질 조짐이다. 풍남문을 뒤로 하고 서둘러 완산으로 차를 몰았다. 홍계훈이 진을 친 완산은 186미터밖에 안되는 산이지만 직선거리로 1Km 떨어져 전주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완산은 조정에서 벌채까지 금지한 봉산(封山)이었다. 일행은 울창한 숲 사이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완산칠봉 정상 바로 못미처에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가 우뚝 서 있다. 입성비 건너편엔 정자가 호젓한데 선돌에 새겨진 글귀에 가슴이 싸하다.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비록 좌절됐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외세에 맞서 민족을 지키려고 했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의 여명이었다.’
전주에서 대학을 다닌 김수웅 선생은 완산의 지리에 훤했다. 그의 안내로 완산을 내려와 남부시장 근처 싸전다리를 건너 초록바위에 도착했다. 단정한 문희경 선생이 간략하게 해설해 준다.
“여기 곤지산의 깎아지른 절벽이 바로 초록바위예요. 바위가 푸르스름하기도 하지만 으스스한 바람이 흘러나왔다대요. 그것은 좁은목, 숲정이와 함께 초록바위가 전주의 3대 바람통이기 때문이었어요. 초록바위에서 죄인을 효수했거든요.”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여기서 처형당하고,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장군이 바로 이 초록바위 아래에서 참형을 당했다. 5월이면 하얀 이팝나무 꽃이 꽃구름처럼 피고, 초록바위 위쪽 흡월대(吸月臺)에서 달맞이 행사가 벌어져 전주 10경에 들어간 곳에서 그런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차는 용머리고개로 향했다. 차 안에서 문희경 선생이 용머리고개에 얽힌 전설을 풀어주었다. 전주천에서 천년 묵은 용 한 마리가 승천하려다가 힘이 달려 떨어졌는데, 그 몸이 완산칠봉으로 변하고 머리는 용머리고개가 되었다. 그래서 완산칠봉은 날으는 용이 머리를 용머리고개 쪽으로 돌린 모습이라는 것이다.
“고개에 용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어요. 완산이 전주를 지켜준다는 풍수지리학적인 전설이지요.”
김수웅 선생이 거드는 사이에 어느덧 용머리고개에 도착했다. 이 고개는 김제, 정읍, 부안, 고창으로 통하는 전주의 관문이었고, 초토사 홍계훈이 지휘 본부를 차린 곳이다. 일제 때 도로가 나면서 훼손되어 흔적이 희미한 용머리고개를 내려와 경기전으로 향했다. 뙤약볕 사나운 오후였다. 기념재단 조 선생과 함께 경기전에서 이성계의 어진, 전주사고, 그리고 그윽한 조경묘를 답사하고 나오니 시간이 너무 흘러가 버렸다. 전주부성의 동문이었던 동문네거리를 지나 서문 근처에서 기념재단 팀은 아쉬움을 남긴 채 정읍으로 돌아갔다.
주민들에게 수소문하여 옛 서문 터를 찾아냈다. 바로 옛 다가동 파출소 자리였다. 그 건물 위에 성곽과 문루가 상징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발치에 전주부성 서문지의 표지석이 너무 허름하다.
“……1907년 신작로를 뚫으려고 남문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의 성곽은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이제 옛 4대문 터에 댓돌을 세워 선인들의 덕을 기리고자 한다.”
갑자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듯했다. 5월 10일 홍계훈은 전주성으로 들어갔는데, 그 당시의 참혹한 형편을 황현이 ‘오하기문’에 기록하였다.
“전주는 원래 물산이 풍부하기가 남쪽 세도에서 으뜸이었다. 특히 서문 밖의 상점과 부잣집들은 재물과 돈이 가득하여 ‘금구덩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때 한 번 불이 붙자 모두 잿더미로 변하였고, 타고 남은 거적들과 돌부스러기들이 뼈조각과 뒤엉켜 거리풍경이 더욱 처참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 초토사 홍계훈은 이 서문 밖의 민가 천 오백여 채를 불태웠고, 경군이 대포를 쏘아 헤아릴 수 없는 민초들이 죽었을 것이다. 서문네거리는 예전처럼 동서남북이 온통 가게들이다. 서문터를 지나 수양버들이 잔바람에 나긋나긋 흔들리는 전주천변으로 걸어갔다. 다리 아래 억새 길을 따라 많은 이들이 걷고 있다. 호남읍지에 따르면 당시 전주천에 무려 14개의 다리가 있었다. 다리 근처엔 싸전, 우시장, 담뱃대, 종이, 나무, 소금 장들이 늘어서 중국, 일본, 조선의 장사꾼들과 거래하는 민초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어두워지는 전주천 너머로 다가산이 보였다. 하얀 이팝나무 꽃 핀 다가산에 왜인이 세운 신사(神社)에서 절하는 조선인들이 떠올랐다. 가슴 아프고 슬픈 역사다. 저 전주천에 갑오년 겨울에도 동족인 관군과 일본군에게 살육당한 농민군들의 피가 살얼음을 타고 한없이 흘렀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