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집회와 변혁지향 세력의 등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에서도 집회를 열다
공주집회가 열리자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동학은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나 동학을 금단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는 단지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지방관들로부터 공공연히 수탈당했던 동학교단에게는 큰 성과였다. 공주집회의 결과에 최시형 등 동학교단 지도부는 상당히 힘을 얻었다. 이에 최시형은 전라감영에도 의송(議送: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찰사에게 올리는 진정서)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전라도 삼례에서 교도들의 집회를 갖기로 하였다. 1892년 10월 27일 전라도 삼례역에 도회소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동학접주들에게 경통(敬通:동학교단내의 공문)을 보내어 교도들을 거느리고 삼례역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들은 대선생(최제우)의 제자로서 누가 원통함을 풀고 분함을 설욕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지금까지 39년 동안 지목을 받으면서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엎드려 왔던 것은 천운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충청감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전라감사에게 의송단자를 내는 일도 또한 천명이다. 각 포의 여러 접장들은 일제히 와서 모일 일이다. 만일 알고도 와서 모이지 않는다면 어찌 가히 수도하고 오륜을 강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최시형이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삼례에 모일 것을 지시하고 있는 이 내용의 어조는 공주집회에서 나온 내용과 비교할 때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공주집회에서는 교조신원의 방법을 강구했지만 삼례집회에서는 삼례에 교도들이 모여 세력을 과시하면서 전라감영에 의송을 제출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를 따르지 않는 교도들에게는 뒤에 마땅히 별도의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까지 하고 있었다.
이후 1892년 11월 2일 전라도 전주 인근의 삼례에서 동학 교도 수천 명이 집결하여 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바로 삼례집회이다. 삼례집회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충청감영에 냈던 방식으로 전라감영에 의송을 제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李耕稙)은 이에 대해 제음(題音:백성이 관청에 제출한 진정서 등에 대해 관청에서 써 주는 처분)을 내려 ‘너희들의 학(學)은 바로 나라에서 금하고 있다. 사람의 본성을 갖추었으면 어찌 정학(正學)을 버리고 이단에 쏠려 스스로 금법을 불러들였는가. 곧 물러가서 모두 새사람이 되어 감히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면서 즉시 퇴거할 것을 명하여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에 삼례에 모여 있던 동학교도들은 11월 7일 다시 의송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뜻하는 바는 교조 최제우의 원(寃)을 푸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최제우로부터 배운 것은 오직 유불선의 도를 합하여 충군효친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도는 결코 이단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또 각읍의 수령, 서리, 군교, 향곡 토호들의 동학교도들의 대한 침학을 지적하고 이를 금단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은 11월 9일 내린 제음을 통해 ‘이미 제음을 내린 바 있다’고 일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11월 11일 감결(甘結:조선시대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보내는 공문)을 각 읍에 내려 동학교도들에 대한 관속배의 토색을 일체 금단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감결이 나오자 동학교단 지도부는 통문을 통하여 동학교도들의 해산을 지시하고 앞으로 일체의 행동은 최시형의 지휘를 받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당시 모인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의 힘을 활용하여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동학교단 지도부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 삼례집회가 개최되었던 삼례 일원
전라도 동학지도부 변혁지향 세력으로 결집하다
그러나 삼례에 모였던 동학교도 일부는 교단의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해산하지 않았다. 이는 11월 21일자 전라도 관찰사가 내린 공문에서 ‘동학교도들이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 안접(安接)하지 않고 있다’고 한데서 확인된다. 그런데 이보다 이틀 전인 11월 19일에 동학교단에서 ‘복합상소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바야흐로 다시 논의할 터이니 마땅히 하회를 기다려 지시에 따르라’는 통문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이들은 관은 물론이고 교단의 해산명령도 따르지 않는 가운데 복합상소와 같은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강경한 움직임은 동학 집회운동의 획기적인 성격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서 이를 이끈 것은 바로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의 변혁지향세력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11월 2일 전라도 관찰사에게 소지문을 제출할 때 ‘대선생 신원하기 위해 각도의 교인이 전주 삼례역에 모였을 때 …… (전라) 좌도의 유태홍, (전라) 우도의 전봉준씨가 자원 출두하여 관찰사에게 소장을 제출하였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전봉준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전라도의 변혁지향세력들은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는‘삼례 집회에 모인 군중이 흩어질 때 전라도 교인 김개남, 전봉준, 김덕명, 손화중 외 수백 명이 무장현감에게 빼앗긴 돈 천냥을 되찾기 위해 금구 원평에 도착하니 무장 좌수와 이방이 천냥을 가져왔기로 이를 되찾아 물러났더니’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삼례와 인근지역에 사는 촌로들은‘삼례 뒤에 위치한 화산이라는 곳에서 동학 때 동학교도들이 한동안 모여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삼례집회 후에 전봉준 등 전라도 변혁지향세력들이 해산 후에도 계속 활동을 하였던 것을 설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1892년 11월 삼례집회에 참여한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두 차례에 걸쳐 의송을 제출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답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자 이에 항의하여 해산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는 특히 전라도지역 동학교도들 사이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전라도 변혁지향세력들이 등장하여 동학교단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이러한 삼례집회를 통해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전개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박찬승,「1892·1893년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과‘척왜양’운동」
『1894년 농민전쟁연구 3』, 역사비평사, 1997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