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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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9호
선양사업의 원활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양사업의 원활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기두



  태안(泰安). 크게 편안하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으로 가는 서해안고속도로는 그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쭉쭉 뚫린 도로를 지나다보면 대천 해수욕장, 안면도 등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지명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러나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가 김기두 사무국장과 문영식 유족회장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눈 후, 태안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태안이 편안했던 곳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이 들려준 태안의 동학농민혁명사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문) 태안의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분들을 중심으로 어떤 활동이 전개되었나요?


답) 1894년 10월 1일에 태안관아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30여명을 처형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에 문장로, 문장준, 문구석, 조석헌 등 태안지역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현재 화력발전소가 들어선 원북면 방갈리에서 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포한 농민군들과 함께 태안관아를 점령하고, 구금되어 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30여명을 구출했습니다. 전국을 통틀어 2차 봉기에 관아를 점령한 곳은 태안과 서산뿐이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닷가 사람들은 드세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 그러한 성품이 제폭구민, 보국안민 정신을 더욱 강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여세를 몰아 진군하여 해미읍성을 점령하였지만, 홍주성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공격에 패배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져 은신하였습니다. 그중 관군과 일본군의 수색대에 붙잡혀 죽임을 당한 농민군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문)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설립과정을 알려주십시오.


답) 태안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원암 문원덕 선생님이 자료조사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료들을 기반으로 예산에서 1964년에 최초의 선양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1969년에 태안극장에서 제1차 갑오동학농민혁명군 위령제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루기 위한 준비기간까지 생각한다면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이전부터 자료조사, 발굴 작업 등이 이루어졌기에 그러한 결과가 있었던 것이죠. 즉 1960년 전후로 이미 설립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태안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자료가 얼마나 보존되어 있습니까?


답) 조선환여승람에 태안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석헌, 문장준 등이 기록한 북접일기가 있는데, 이는 동학농민혁명당시 실행했던 사항들을 일기형식으로 옮겨놓은 기록입니다.


  학자가 아닌 순수한 농민들이 작성하여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경과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북접일기는 작성한 이들의 집 지붕 밑이나 마루 밑 등에 숨겨두었는데, 그 위치는 자손들에게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어 발굴해낼 수 있었습니다.



문)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지원해주는 단체나 개인이 있습니까?


답) 태안 참여자치시민연대와 같이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에서 사업비의 일부를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백화산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추모탑은 1978년에 원암 문원덕 선생이 모금을 통해 건립하였는데, 설립당시 장비 등이 부족하여 제대로 공사하지 못해 비가 오면 토양이 유실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태안군에서 지원해주어 보강사업을 두 차례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업회의 규모가 작아 관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미진한 부분을 개선해 나간다면 앞으로 충분히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문) 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소개해주세요.


답) 대표적인 곳으로는 방갈리의 기포지, 백화산의 교장바위, 근흥면 수룡리의 토성산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교장바위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어 안타까운 곳입니다. 오래전 태안초등학교에 부임하였던 일본인 교장이 학생들을 잘 보살펴주어 그를 기리고자 교장바위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야말로 심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장은 앞에서의 교장(校長)이 아니라 교장(絞杖) 즉, 많은 사람들이 교살당하거나 장살당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교장바위라 명명하기 이전에는 교살바위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홍주성에서 패배하여 은신한 동학농민군들을 관군과 일본군이 수색하여 붙잡아놓고 집단살해한 곳입니다. 토성산성에서도 많은 농민군이 처형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작두형이 많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토성산성 역시 관군과 일본군의 수색대가 농민군을 찾아내어 작두로 목을 치는 형장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작두는 발굴되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는데, 이후 태안에 기념관을 건립하면 이를 찾아와 전시하고 싶습니다.



문) 기념사업회를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무엇입니까?


답) 교장바위에 대한 일화입니다. 교장바위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문영식 유족회장님은 부모님께 전해들은 대로 교살바위라는 명칭에서 변형된 것이라 주장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어 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신 김영규 선생님께서 이를 믿어주시고 인정해 주셔서 그 믿음을 기반으로 백화산과 교장바위라는 책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이 보급된 뒤 일주일 만에 교장바위가 교살바위였다는 기록을 찾게 되었습니다. 유족회장님의 주장에 확실한 근거가 생기게 된 것이지요. 이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문)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지향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답) 태안지역 동학농민혁명선양사업이 원활하게 세대교체를 거쳐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세대를 이끌어 갈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학농민군이 추구했던 것은 평등세상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는 것은 본래 교육의 목적과 상통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학생을 교육시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선양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할 것입니다. 즉 교육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문) 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기념재단이 다른 곳에 영향을 받지 않고 중심을 가지고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서 재단과 기념사업회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악한 관련 단체에 충분히 지원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수준을 균등하게 맞추고 지원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선양보조금 계획의 세분화와 그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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