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동학농민군의 위상을 찾아서
원광대학교 강사 강효숙
8월 말경 태풍 볼라벤과 덴빈이 두 차례에 걸쳐 강한 바람과 비를 몰고 한반도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더니 그 후유증이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바다대로 땅은 땅대로 산(山)은 산대로 어업, 농업, 과수원, 산의 작물 등이 쓰러지고 넘어져 썩어 가는데, 그 주인과 소비자의 가슴 속도 함께 타들어 가고 있다. 손해 보아 가슴 쓰리고 물가 올라 정신이 없다.
여기에서 소비자란 대체적으로 서민층을 의미한다. 아마 십여 년 전이라면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좋아진 까닭일까. 어느 사이 민중이란 단어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학계에서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스스로를 민중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론 민중이란 단어를 대신할 마땅한 용어도 찾지 못하고 있다. 서민, 국민, 시민, 인민, …. 그렇다면 민중이란 우리네 역사 속에서 어떠한 존재였던가? 민중으로서의 동학농민군을 예로 들어본다.
민중은 큰 욕심이 없었다. 단지 가족이 하루 두, 세끼 거르지 않고 끼니를 때울 수 있으면 되고 온 가족이 등 붙이고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 방 한 칸 있으면 다행이었다. 가끔 아이들 새 옷가지 챙겨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닭이라도 잡을라치면 집안은 잔치 분위기이고 아이들은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상머리에 달라붙었다.
작은 기쁨에 만족하고 이웃의 작은 슬픔을 더불어 나누며 상호부조하는 삶 속의 민중은 인내에도 강했다. 신분제도라는 틀에 얽매여 그저 윗 신분층에게 덜 당하면서 살면 참으로 다행인 것이 민중의 삶이기도 했기에 웬만하면 참았다. 나라법도 지방 나리님들도 저 논밭의 지주님들은 끼리끼리요, 민중의 편이 드물었기에 민중은 웬만하면 인내했다. 정말이지 웬만해도 참고 참았다.
그러한 민중이 들고 일어섰다! 그러한 민중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것은 인내를 삶의 최고의 경지로 알고 살아 온 민중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한계 상황까지 압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중의 봉기는 전혀 의도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다. 인내의 둑이 터질듯 부풀어 올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민중의 가슴에 불씨를 당겨, 높이 쌓인 장작더미 불처럼 때로는 산봉우리의 봉화처럼 서로의 서러움, 아픔, 고통, 한을 표현하고, 알리면서 피어오르는 것이다.
또 민중 봉기의 이념, 사상, 철학은 절대 상식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상식적이어서 자칫 사상, 이념, 철학이 없는 것이 민중의 봉기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어떠한 계층, 계급을 막론하고 상통하는 삶의 기본적 상식이 있다.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민중봉기는 철저하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민중봉기는 직면한 현 상태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타당성과 당연성을 띠고 있으며, 절대 작위적이지 않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것은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상황과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굳이 어려운 말을 동원하여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밑바닥의 인내의 선에 내몰린 비참한 의식주의 상황은 황토 흙 다듬던 호미 쥔 손을, 개혁을 외치는 주먹으로 바꾸었고 호미는 농민군의 무기로 변하였다. 중심을 잡지 못한 정부는 외세를 등에 업고자 청군을 청하였고 이에 질세라 일본군이 상륙하자 농민군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자연스럽게 외세가 물러나길 바라며 자진 해산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 땅을 병참기지로 삼아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또 다시 너무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운동을 일으키니 바로 일본군 격퇴운동인 배일운동, 항일운동, 반일운동이다. 이 또한 일본군의 도발에 대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들을 누가 감히 반도(叛徒)라 말하는가.
그러나 우리의 슬픈 역사는 동학농민군을 반도, 폭도 등으로 칭하여, 그 명예가 회복된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1894년 직후에 몇몇 외국에 의해 동학농민군 봉기의 시점으로 인식되었던 고부봉기는 명예회복의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고종은 대한제국시기인 1900년과 1903년에 동학농민군을 탄압하였던 중앙군의 장병 및 지방병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을 건립할 것을 명하거나 단호를 하사하여, 그 추모비 등이 현존하고 있다.(이민원 제공, 「대한제국의 현충시설」) 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실로 가족과 나라를 위해 개혁의 단초를 제공하고 외세를 물리치고자 봉기하였던 민중, 동학농민군에 대한 참된 위상을 찾아 추모, 추서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이다.
아시아사뿐 아니라 세계사 가운데 동학농민혁명만큼 장기간에 걸쳐, 거의 전국적으로, 동학이라는 종교와 조직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하면서, 철저한 상식과 현실인식 속에서, 민중이 문제 해결을 위해 들고 일어난 사건은 없다. 또한 기본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이라는 카테고리와 영로(英露)라는 열강의 대립관계 속에서 한국의 민중이 들고 일어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복잡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사라는 일국사적 관점을 뛰어 넘어 당시의 국제 관계 속에서 그 위상을 새로이 정립해야만 한다. 그것은 먼저 지역, 인물, 시기, 갑자, 종교 등을 극복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다.
세계사 속의 위상을 지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발굴에 대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1900년 12월의 모 신문에서 회덕 김만수가 “동학괴수”로, 풍기의 황영욱이 “접주”로, 지역은 확인되지 않지만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가 “동학 죄인”으로 확인된다. 몇 장의 빛바랜 신문기사 속에서 발굴되는, 잊혀지거나 아예 전해지지 않은, 지금은 인내의 끝자락에 숨어버린 수많은 민중, 동학농민군을 찾아내어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추서해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는 ‘의병’을 양반이 주도한 민중의 반일, 항일운동 단체로 개념지어 1894년 9월 중순경 경상도 안동지역 유생들이 주도한 반일운동을 최초의 의병운동이라 칭하기도 하고, 대한제국시기 반일, 항일운동을 전개한 민병을 의병이라 칭하기도 한다. 내 나라 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반일, 항일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주도한 주체가 양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한 제국시기에만 한정한다면 1894년의 안동의병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상의 내용을 총 정리한다면 선말 이후부터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의 민중의 반일, 한일운동을 의병운동이라 할 수 있다. 즉, 동학농민군의 반일, 항일운동도 이 범주 안에 해당되어 의병이라 칭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또 다른 형태의 의병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약력
원광대학교 사학과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 석사 졸업, 일본 치바대학 박사학위 취득
한양대학교 연구 교수, 원광대학교 사학과 강사(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