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前 문화관광부장관 인터뷰
일 시: 2018년 5월 17일(목) 13:00
장 소: 전북 무주군 안성면 관내 찻집
대 담: 김명곤 |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前 문화관광부장관
이번 호 [명사대담]에는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한 김명곤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을 모셨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독어교육학을 전공하였고,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한 김 이사장은 현재 동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91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개벽」에서 전봉준 장군으로, 「서편제」에서는 판소리선생으로 출연했던 이사장은 2006년 제8대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재임 중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 : 국무총리) 정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경력> 제8대 문화관광부 장관, 세계대백제전 총감독,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국립중앙극장 극장장 등.
<수상>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1993),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1993), 자랑스런 서울시민상(1994), 제1회 현대연극상 연출상(1995) 등.
<저술> 『우리소리 우리음악』(상수리, 2009), 『꿈꾸는 광대』(유리창, 2012), 『격정만리』(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아침이슬, 2000), 『문화의 블루오션을 꿈꾸다』(북큐브, 2006) 등
문) 이사장님 반갑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녹두꽃』 명사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이사장님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현재 공식적으로 맡고 있는 일은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입니다. 상근을 하는 게 아니고 이사회를 통해 세종문화회관 여러 가지 업무를 자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하는데, 요즘에는 주로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 「명량」과 드라마 「명불허전」에 출연하였고, 최근엔 「신과 함께·2」 등에 출연했습니다. 현장에서 배우, 연출가, 작가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 이사장님, 대학에서 독어교육학을 전공하셨지요? 대학을 졸업하신 후에는 줄곧 배우나 연극연출가 등으로 활동하셨는데...
답) 제가 전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문학 지망생이었어요. 그때부터 독일의 문학과 서구의 예술, 음악에 심취했었지요. 이후 대학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에 입학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독문학, 영문학, 국문학 등을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러던 차에 대학 2학년 때 우연히 연극반에 들어갔고, 이후로 연극에 완전히 빠져서 진로가 많이 바뀌게 되었지요. 연극에 빠져든 후 독일 문학과 연극이 아주 깊이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독일문학의 주류가 희곡이잖아요? 괴테(1749~1832, Johann Wolfgang von Goethe)나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von Schiller)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은 거의 다 희곡이에요. 괴테의 『파우스트』는 독일의 민족 설화인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창작한 것인데 알고 보니 괴테가 평생을 바쳤더라구요. 괴테가 이 작품을 20대 때 초고를 쓴 후 80세 때 완성했으니까요. 그 작품을 쓰면서 괴테가 자기 조국의 전통, 음악, 설화, 신화 등을 깊이 공부했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우리 민족전통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어요. 대학 3학년 때 판소리를 접하고 흠뻑 빠져들었어요. 이런 과정에서 제도권 밖에서 광대, 명인, 명창 이런 분들을 만나 우리 전통예술을 접하면서 우리 전통예술의 가치와 미학에 깊이 빠져들었지요.
문) 판소리를 명인이신 박초월 명창께 배우셨지요? 판소리를 배우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답) 박초월 선생님은 제게는 정말 잊지 못할 스승이시죠. 대학 3학년 때 친구 따라 김제국악원엘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판소리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아주 충격을 받았어요. 그날 이후 레코드를 사서 혼자 판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빠져들었어요. 그 때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어느 날 종로를 걸어가는데 눈앞에 ‘박초월국악전습소’라는 간판이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올라가서 판소리 학원에 등록하고는 학원을 다녔어요.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박초월 선생님께서 제게 아드님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하시면서 그 대신 판소리 학원비는 안 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시작된 선생님과의 인연이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이상 이어졌어요. 저는 판소리를 공부하면서도 늘 명창이 되거나 국악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판소리를 연극이나 영화로 어떻게 접목시킬까? 줄곧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래서 실험적으로 연극과 판소리를 접목시키려고 마당극에다가 민요나 판소리, 풍물 등을 담아냈지요. 이런 저의 관심이 결국 임권택 감독님 권유로 영화 「서편제」의 시나리오를 제가 직접 쓰게 되었고, 주인공까지 맡게 되었지요.
문) 1990년대 초 동학농민혁명을 모티브로,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의 일대기를 다룬 「개벽」이라는 영화가 제작·상영되었는데, 이사장님께서 그 영화에서 전봉준 역을 맡으셨지요?
답) 그랬지요. 「서편제」 영화 이전이니까 아마 1991년일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 작품인데 제가 전봉준 장군 역할을 맡았지요. 이 작품 중간에 전봉준 장군이 검가(劍歌)를 부르는 장면이 있어요. 이 장면을 촬영할 때 다른 가수가 부른 검가를 틀어놓고 노래하는 척 입을 뻥긋뻥긋 거리면서 칼춤을 추는 장면을 연기했어요. 촬영 후 감독님께 그 노래를 제가 직접 부르면 안 되겠습니까? 했지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놀라면서 그럴 수 있느냐? 그러셨어요. 그래서 제가 판소리 공부를 좀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한번 해보자고 해서 제가 직접 노래와 함께 연기를 하게 되었지요. 그때 임 감독님이 제가 판소리를 10여 년 공부했다는 사실과 직접 시나리오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곧이어 감독님이 「서편제」라는 영화를 기획하시면서 저를 만났고, 제가 그 영화의 시나리오와 주인공 역할까지 맡게 되었던 거예요. 「서편제」를 만들 때 그 작품이 흥행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좋은 예술영화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반응을 얻어 국민영화 반열에 올랐지요.(웃음)
문) 영화 「개벽」에 대해 좀 더 얘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 1980년대 후반기 민주화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문화예술 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었지요.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벽」이라는 영화가 기획·제작되어 1991년에 상영된 거예요. 도올 김용옥 선생이 대본을 썼지요. 「개벽」은 민족민주운동의 관점보다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일종의 종교운동 차원의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사회개혁 즉 농민혁명이나 농민전쟁 부분이 소홀히 다루어졌지요. 당시 시대상황의 한계이기도 했어요. 어쨌거나 그 영화에서 제가 전봉준 역할을 맡았는데, 그 영화에서는 전봉준 장군은 조연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영화나 방송 드라마, 연극 등을 제작하여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에는 시대적 상황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시대상황과 제반 여건이 좋은 이때 방송사나 영화사 등과 동학농민혁명 주제 드라마나 영화 제작·방영을 위한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네, 이사장님, 참여정부 때인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전국의 기념사업단체가 문화관광부 법인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설립하였고,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될 때까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로 동학농민혁명 주제 방송드라마 제작을 위해 KBS한국방송공사 편성제작국과 업무협의를 추진했습니다. 제가 기념재단의 사무처장으로 일하던 때 논의를 진행했으니까 그때가 2006년과 2007년이었어요. 2007년 여름과 초가을에 기념재단과 KBS한국방송공사 측의 논의가 상당히 무르익었는데, 2007년 겨울에 대통령선거가 있었잖아요? 대선이 끝난 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 논의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장님 말씀처럼 방송드라마 제작은 시대상황 특히 정치적 상황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그때 절감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과 그 유족의 명예회복사업은 무엇보다도 갑오년의 역사가 반란사건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 바친 의로운 항쟁으로 범국민적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방송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미디어 활용의 필요성을 절실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정치적 상황이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방송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영할 수 있는 좋은 때가 아닌가 생각되어 나름대로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답) 방송드라마 혹은 영화 등 각종 미디어를 활용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범국민적 선양에 나서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 적극 공감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념재단에서는 방송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등 각종 미디어 활용의 기반이 될 콘텐츠 확보를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소설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상대로 큰 전쟁을 치룬 19세기 초 러시아의 상황과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영화나 뮤지컬 등 대작(大作)들이 나올 수 있었어요. 이런 측면에서 기념재단에서는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성공적인 예술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술가들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실패도 하고, 성공적인 경험을 쌓기도 하고 이런 과정의 상황들이 쌓이고 쌓여서 대작이 탄생되는 법이거든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사극이나 영화, 뮤지컬 등 대형작품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은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1980년대 봇물을 이루었던 마당극과 1990년대 「개벽」(영화), 「천명」(창극, 음악극) 등의 축적된 경험이 있으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좋은 콘텐츠가 개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작년에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주제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추진했지요? 응모작품을 심사하기 위해 저도 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응모작품들이 참 많이 아쉬웠어요. 대상 수상작의 상금이 1천만원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전문적인 작가들은 아예 응모에 나서지 않았으니까요. 예술작품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좀 뭣하지만 공모전을 하려면 그래도 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격이라는 게 꼭 상금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금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잖아요? 근래에 출판된 작품집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문학상이나 창작물을 대상으로 열리는 문화콘텐츠 공모전의 상금이 일반적으로 5천만원, 1억원이예요. 방송드라마의 경우 10부작 내외 분량이면 2~3억원 단위예요. 좋은 시나리오, 대본이 창작되려면 몇 년 혹은 몇 십 년씩 자료 모으고 공부해야 나오는 거잖아요? 앞에서도 얘기했습니다만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작품에 평생을 바쳤잖아요? 5천만원, 1억원이라고 하면 굉장히 큰 금액으로 여길 수 있는데, 작가들이 몇 년, 몇 십 년을 붙잡고서 혼신의 힘을 기울인 후에야 좋은 창작물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큰 액수가 아니지요.
문) 얘기를 조금 되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1980년대 후반기부터 1990년대 중반기까지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문화예술공연 작품들이 제작·공연되기 시작했습니다. 전남·광주의 ‘신명’, 충남 공주의 ‘우금티’ 등 민족극 단체가 주축이었는데, 이 무렵 이사장님께서 민족극운동의 중심에 계셨지요? 이사장님께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신 ‘갑오세 가보세’, 임진택 선생님의 ‘밥이 하늘이다’, 그리고 극단 우금티에서 만든 ‘우리 동네 갑오년’ 등이 생각납니다. 이 무렵의 얘기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그랬지요. 그때가 1989년이었어요. 「갑오세 가보세」라는 마당극 작품을 제가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했지요. 100년 가까이 반란의 역사, 민란의 역사로 취급되어왔던 동학농민혁명이 80년대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진보적인 문화운동 쪽에서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요.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결성하고 그 이듬해에 민족극운동협의회에서 제1회 민족극 한마당을 열었어요. 그때 전국에서 활동하는 문화패들이 함께했지요. 그렇게 시작된 활동이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강화되었지요. 1980년대 후반기에 저와 박인배, 유인택씨 이렇게 세 사람이 전국에서 마당극 운동을 하는 단체들을 모아 일종의 축제를 열었죠. 1회를 개최한 후 2회는 부산 그리고 3, 4회.... 이렇게 지역을 순회하면서 개최했어요. 그러면서 해마다 다른 작품을 창작하여 선보였지요.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죠. 당시 시대상황이 동학농민혁명 주제 마당극을 선호하는 관객층이 많았고, 대학가에서도 초청을 많이 했어요. 그런 분위기가 민중문화운동의 활기를 불어넣었지요.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 대부분이 우리의 전통적인 멋을 살리는 것에 기여를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90년대 후반기에 관객들의 취향과 성향이 굉장히 크게 바뀌면서 침체를 겪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 제가 1990년대 초반부터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 그리고 전북지역 문화예술계에 몸담아왔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제작·공연된 마당극이나 연극, 창극 등은 거의 다 본 것 같아요. 어떤 작품들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초청하여 공연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단체 운영비가 턱없이 모자라 초청비용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다들 기꺼이 응해주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급격히 낮아졌고, 문화예술 공연작품들도 침체기로 접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답) 그랬어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거의 작품이 제작되지 못했지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문화예술계의 창작활동이 활성화되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는데 이때는 100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치룬 뒤인데 도리어 침체가 되었어요. 언뜻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다행인 것은 100주년 전후하여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한 세기기 넘도록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오던 이 사건을 혁명으로 격상시키는 특별법이 참여정부 때인 2004년 3월에 제정되면서 다시 분위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에요.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갑오년의 역사를 작품화했다면 이제는 특별법 제정으로 정부가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니 여건이 크게 좋아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현재적 의미를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중단기적인 전략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여 예산을 반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동학농민혁명 주제 문화콘텐츠 확보를 위한 사업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화예술가들이 콘텐츠 창작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 성과가 상당히 축적되어 그 전체상은 거의 규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연구된 내용을 책이나 강의가 아니라 콘텐츠 개발을 통해 대중적인 문화예술작품으로 제작하여 대중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감동적인 문화예술작품은 동학농민혁명을 머리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다 새기는, 체화(體化)시키는 힘이 있거든요. 이점을 깊이 인식해야 정신선양사업 추진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을 겁니다.
문) 앞으로 정신 선양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이사장님의 좋은 말씀이 깊이 염두에 두겠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뉴스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4월 24일 전봉준 장군 순국 123주기 기일에 서울 종로구 서울 지하철 종각역 5~6번 출구 앞 인도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건립하여 그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갑오년의 역사가 전라도의 지역적 사건이 아니고, 더욱이 반란사건이 아니라 반봉건 민주항쟁이자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반일 민족항쟁이었음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점에 대한 이사장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답) 제막식을 뉴스를 통해 봤습니다. 그 이전에 동상 건립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속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건립한 것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더욱이나 국민모금으로 동상이 건립되어 그 의미가 한층 높아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장군께서 가신 때로부터 120년이 넘게 걸려 동상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후손으로서 송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개벽」이라는 영화에서 전봉준 장군 역을 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 영화에도 압송되는 장면이 있어요. 현재 종로에 세워진 동상이 손을 높이 든 입상(立像)이 아니라 들것에 들린 부상당한 전봉준 장군의 좌상(坐像)이라는 점에서 더욱이나 가슴이 뭉클합니다. 동상을 건립하는데 문선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몇 분에게 들었어요. 큰일 하셨습니다. 제가 조금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동상 제막식 때 차원 높은 인간의 품격을 보여준 녹두장군 전봉준 마지막 모습을 담은 작은 마당극으로라도 만들어 올렸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내내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문) 동상건립에 대한 인터넷 기사와 그에 붙여진 댓글들을 보니까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에 이어 드디어 민중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 종로에 들어섰다,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이렇게 환영하는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사장님, 끝으로 빠뜨린 얘기나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서울 종로에 세워진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은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 사건이 아니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이자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구국애민 정신의 표상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매우 상징적인 기념시설물입니다. 특별법 입법취지를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잘 형상화된 예술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거든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방송드라마나 영화 제작 등으로 이어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