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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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황토현의 동학농민군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황토현의 동학농민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의원(시인)

이원구



  조선 조세의 반을 부담한 전라도


  황토현을 답사하는 날이다. 한파주의보가 풀렸지만 찬 새벽바람에 손끝이 시렸다. 용산에서 정읍행 열차에 올랐다. 차창에 스치는 산골짜기에 쌓인 눈이 을씨년스럽고, 시내도 하얗게 얼어붙었다.


  조치원을 지나치자 산의 능선이 점차 부드러워지고, 논산에 이르자 확 트인 벌판이 펼쳐진다. 이 근처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은 5천 군사를 거느리고 나당 연합군을 맞아 최후를 붉은 노을처럼 장식했다. 헌데 묘한 일이다. 계백의 황산벌,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른 황산, 그리고 동학군이 2천여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황토현, 최정예 정부군을 쳐부순 황룡강 전투 모두 누를 황자 돌림이다. 노무현 대통령 추모제 때 하늘을 뒤덮은 노랑 풍선처럼 노란색은 승리를 상징하는 묘한 색인가 보다.


  논산을 지난 열차는 이윽고 광활한 호남평야를 달린다. 산들은 차츰차츰 멀리 사라지고, 젓갈로 유명한 강경의 흐린 강물이 흐른다. 살얼음 낀 강경포구는 예전에 우리나라 4대 시장이 섰던 곳이다. 일제강점 전부터 청인과 왜인 장사꾼들은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올라 여기 강경포구에 내린 뒤 충청 전라 고을마다 누비면서 개화 상품을 팔아 뱃속을 채웠다.


  차는 익산을 지나 드넓은 김제를 달린다. 여기가 그 유명한 김제 만경,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호남평야이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판, 작달막한 솔밭, 정다운 마을, 붉게 드러난 황토, 이미 산들은 멀리 달아나 지평선에 납작하게 앉아 있다.


  ‘얼마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을까!’


  조선말 서울 사람들은 아들을 낳아 이 전라도에서 벼슬아치 시키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만큼 너른 호남의 들판은 나라사람들을 먹여 살린 곳이다. 조세의 반을 여기 호남에서 충당했다니까. 그러나 그토록 물산이 풍부한 이곳 호남의 농민들은 헐벗고 굶주렸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당시 조선말은 야만성과 신무기로 무장한 유럽인들이 세계를 거의 식민지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물론 미국·영국·러시아가 군함을 끌고 조선의 해안을 집적거렸고, 프랑스는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개혁적인 정조가 죽은 뒤 순조부터 철종 때까지 외척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가 30년 동안 세도정치를 하면서 벼슬을 독차지하였다. 그 뒤 고종이 집권하면서 민비를 등에 업은 여흥 민씨들의 탐욕과 횡포로 조정의 재정이 고갈되다시피 했다.


  당시 매관매직은 물론 과거까지 부정으로 얼룩져 조선은 병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고통을 직접 떠맡아 허덕인 이들이 바로 민초들이었다. 민초들은 양반들 대신병역의 의무를 떠맡았고, 세금도 지주 대신 소작농들이 부담했다. 거기에 지방의 탐관오리와 아전들은 갖은 농간을 부려 빈민구제로 써야 할 환곡을 고리채로 돌려 자기들 잇속을 차리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철종 이후부터 민초들은 곳곳에서 수많은 봉기를 일으켰다. 특히 착취가 심했던 삼남 지방 민초들의 분노와 울분이 쌓여 마침내 거대한 물줄기로 터진 것이 바로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한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듯 정읍역에 도착하였다. 정읍역에 내리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장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춘을 지난 봄 날씨처럼 환하게 웃는 그는 차를 끌고 식당을 찾았다. 남도라 목도리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날은 포근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예? 정읍보다 고부가 더 컸다구요?” 

  “조선 때 정읍 현감은 종6품이었지만 고부는 종4품 군수가 관장했죠. 그런데 1914년 일제가 정읍시에 고부면을 편입시키고 호남선 철도가 정읍을 통과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답니다.”


  나의 무식을 개탄하면서 또 한번 현장 답사의 가치를 새삼 느꼈다. 하기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조정은 전봉준 장군의 근거지 고부와 김개남 장군의 태인을 폐읍으로 만들려고 했다. 패륜을 저지른 마을은 한 등급 낮춰 과거시험까지 못 치르게 할 정도였으니, 교활한 일제는 더 탄압했을 것이다.



  감동적인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 번화가에서 황토현 전적지는 지척이다. 치운 눈이 듬성듬성 쌓인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에 동학농민군의 각 접주들 표지나 되는 듯 여러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2004년에 개관한 이 기념관을 지금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기념관 현관문을 열자 말목장터의 죽은 감나무가 우뚝 서 있다. 2003년 태풍으로 쓰러진 감나무를 보존처리하여 보관 중이었다. 150살이 넘은 늙은 감나무의 파인 골이 농민들의 깊은 주름살처럼 안쓰럽고, 그 잘린 뿌리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전시관 1층의 ‘무명 농민군의 진혼곡’ 조형물 앞에 서니 숨이 탁 막힌다. 갑자기 무녀의 살풀이 가락 속에 농민군의 함성과 피어린 신음 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듯하여 가슴이 싸하니 저려온다.


  전시관 왼편 벽에 가득 채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사진이 시선을 잡아끈다. 지휘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총관령 김개남, 영솔장 최경선, 2대 교주 최시형, 북접 대장 손병희 장군이다. 전봉준 장군의 쏘아보는 눈매, 김개남 장군의 거의 산발한 머리칼이 소름끼칠 정도로 참혹하다.


  오른쪽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주의와 세계사의 혁명들’이란 강열한 사진들을 눈으로 훑으면서 읽어 보았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도처에 무역시장과 식민지를 세웠다. 그 선두주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16세기 초 중남미 여러 나라를 강점했고, 1565년에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7세기에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에 뛰어들어 스페인 포르투갈과 경쟁하며 무역이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는 많은 나라들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아프리카는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는 유럽 열강 외에 미국과 일본이 가세하였다.’


  문득 추악한 아편전쟁이 기억났다. 북미와 인도를 차지한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몰래 팔다가 전쟁을 벌인 것이다. 패전한 중국은 상해를 영국에 넘겼지만 중국인들은 아편 중독으로 얼마나 폐인이 되었을지 몹시 궁금하다.


  ‘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전쟁에 우리는 미국의 용병이 되었구나. 헌데 라틴 아메리카에선 이미 19세기 초부터 독립운동을 벌였다니!’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신음할 무렵 영웅 볼리바르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파나마, 에콰도르, 볼리비아의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아르헨티나를 해방시킨 마르틴은 칠레, 페루 독립전쟁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은 혁명에 실패하고 조선은 일제에 강점당했으니, 참으로 괴롭고 슬픈 일이다.


  쓰디쓰게 한숨을 쉬면서 이층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아, 온통 감격적인 그림이 사람을 압도한다. 청동 기둥과 벽은 온통 동학농민혁명 장면으로 뒤덮여 있어 가슴 벅차면서도 비참한 전투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나는 관군과 일본군, 동학농민군의 무기에 관심이 더 쏠렸다.


  전시관에는 중소형 대포, 무라다 소총, 그리고 화승총, 창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 저 캐틀링 기관포!’


  저 기관포가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수없는 동학농민군을 죽여 혁명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186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한 미국제 캐틀링은 10개의 총신을 한 원통에 넣고 회전시켜 연속 발사가 가능했다. 일 분에 600발의 발사 속도, 사거리는 800미터였다. 지금의 발칸 포와 비슷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무기를 파는 귀신이군.’


  동학농민군의 주력무기인 화승총은 15초에 겨우 한 발을 쏠 수 있었다. 왜군의 조총을 개량했지만 화약을 쑤셔넣은 뒤 심지에 불을 붙여야만 단발 발사가 가능했다. 사거리는 200미터도 안 되었다.


  ‘무라다 13 소총이 일본인의 주력무기였구나!’


  명치유신 때부터 군비확장에 열을 올린 일본은 1880년 영국에서 제철기계를 도입해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을 일본인 체형에 맞게 개량하여 11인치 무라다 소총을 만들었다. 사거리는 437미터였다.


  그러나 고부, 무장, 부안, 태인 관아의 무기를 접수한 동학농민군은 주로 화승총, 창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백산에 집결하였다. 이런 무기로 이곳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 관람을 마치자 문화해설가인 유태길 선생이 악수를 청한다. 백발이 성성하고 일흔이 넘은 노인이지만 동학농민군의 후손인 그는 체격이 당당하다. 그의 조부는 김개남 장군의 화포장이었고, 유 선생은 해군 함정에서 함포사격을 한 해군 출신이라니, 피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찡했다.


  “여기 포장된 광장이 예전엔 큰 방죽이었어요. 감영군은 방죽위 황토현에 배수진을 쳤고요.”

  “황토현은 고개인데 여긴 산이 없잖아요?”


  전적지 언덕을 가리킨 유 선생은 좀 뒤에 가보면 안다면서 성큼성큼 광장을 질러갔다.


  “여기가 황토현 전적지 정화기념비인데, 누가 전두환을 돌로 마구 쪼았어요.”


  그때 부랴부랴 오석 판을 교체했다는데, 누가 또 쪼아서 다시 새긴 흔적이 역력했다. 글은 국사편찬위원장인 박영석이 썼다.


  ‘제세안민(濟世安民)과 왜이축멸(倭夷逐滅)을 기치로 내걸고 창의한 동학농민봉기... 그 자주정신은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태동시켜 의병전쟁에도 그 명맥이 닿았고 뒷날 3.1운동으로 이어지는 항일구국투쟁의 큰 줄기를 이루었으니... 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로 큰 싸움터였던 이곳을 정화하여 비를 세운다.’

  1987년 10월 1일


  김유신과 이순신 장군을 내세운 박정희처럼 전두환도 전봉준 장군을 앞세워 자기를 변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광주 민중을 피비린내 진동한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을 전봉준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화가 난 어떤 민초가 돌로 쪼았을 것이다.


  씁쓸한 속을 가라앉히며 보국문(輔國門)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건물 안에는 네 장의 그림이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봄은 황토현 전투, 여름은 집강소 시절, 가을은 삼례 2차 봉기, 겨울은 참패한 공주 전투 장면이 모두 펄펄 살아 약동하고 있다. 헌데 유홍준 교수의 지적처럼 전봉준 장군상의 표정이 양반부호처럼 정말 표독스럽다. 유 선생은 웃으면서 해명했다.


  “전봉준 장군이 가마에 실려 법무아문으로 문초를 받으러 갈 때 옥중에서 면회를 했던 일본 사진기자의 요청으로 잠시 상투를 틀고 포즈를 잡았다는데, 그게 바로 저 얼굴입니다. 거기에 양반 정자관을 씌워서 저런 괴상망측한 그림이 된 것 같습니다.”


  또한, 황토현 전투 그림에 진달래꽃이 피어 있다. 음력 4월 7일에 벌어진 전투라면 진달래는 이미 지고 철쭉과 살구꽃이 핀 늦봄이 아닌가.


  씁쓸해 하면서 전붕준 장군 동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상은 왼손에 격문을 들고 오른손은 주먹을 불끈 쳐든 모습이다. 돌 병풍엔 동학농민군들을 조각해 놓았다. 그런데 돌 병풍에 조각된 농민군들은 정말 산보 가는 농민들 같다. 유홍준 교수가 그리 꼬집었다.


  “살찐 농민들처럼 보이지만, 당시에 시간이 없어 급조되었답니다.”


  영락없이 통통한 농민들이 죽창과 쇠스랑을 메고 한가하게 봄나들이 가는 모습이고, 전투장면도 아이들 놀이 같다. 더구나 조각가가 친일의 발자취를 남겼다니, 그냥 놔둘 수도 철거할 수도 없이 난처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 역사의 흔적이니 그냥 남겨 둬야 한다는 유 선생의 말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구민사(救民祠)에서 분향 대신 목례만 하고 말았다. 시간에 쫓겼던 것이다. 구민사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세 장군과 함께 이름이 밝혀진 동학농민군 150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죽은 농민군이 30만을 넘어 40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어요.”


  넌지시 귀띔하는 유 선생을 따라 쪽문을 빠져 나오자 꽤 키가 큰 솔밭이다. 질펀한 황토가 등산화에 마구 달라붙었다. 웬 젊은이가 개를 끌고 뒷동산에 산책을 나왔다. 솔길을 따라 올라가 이윽고 황토재에 다다랐다.



  황토현 전투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마자 찬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 닥쳤다. 고개 아랜 화창한데, 썰렁한 갑오동학혁명기념탑만 소나무 몇 그루를 거느린 채 매서운 칼바람을 맞고 서 있다.


  ‘아, 고개는 바람이 세차지!’


  앞이 탁 트인 황토재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멀리 앞산 천태산 자락에 군데군데 마을 집들이 포근하게 앉아있고, 오른 쪽까지 천태산 줄기가 뻗어있다. 그리고 서남쪽은 500미터 가까운 두승산이다.


  바로 이 근처에서 황토현 전투가 벌어져 동학농민군이 대승하였다.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전라 감영군 700명, 지방에서 차출한 향병 560명, 그리고 보부상 1000여명의 관군을 맞아 그중 천여 명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저 두승산 앞 사시봉에 동학농민군 제1부대가 진을 쳤고, 앞산 천태산에 제2부대, 우측 산자락에 제3부대가 진을 쳤을 겁니다. 관군은 여기 황토현을 사령부로 삼고 전진부대가 각각 동학농민군과 대치했을 거고요.”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동학농민군이 세 봉우리에 진을 쳤는데, 깊은 밤에 가운데 봉우리만 남고 두 곳은 불이 꺼졌다고 했는데요?”

  “황현은 주로 관보와 얻어들은 것에 의지했을 뿐입니다. 저기 사시봉(射矢峰)을 사시봉(死屍峰)이라고도 부르는데, 거기서 총알과 인골이 많이 발견되었어요.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깔보고 밤에 기습공격을 했을 겁니다. 불을 끄고 잠을 자는 줄 알고. 근데 동학군의 유인전술에 당하고 말았어요. 동학농민군은 위와 좌우 삼면에서 공격을 감행했는데, 바로 황토재 아래가 너른 방죽이라 퇴로를 끊은 셈이죠.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 지리와 기후까지 속속 알고 있었거든요.”


  1894년 갑오년 음력 4월 6일 밤, 두승산 미륵사와 천태산 백운암에선 연등이 환히 켜졌을 것이다. 근동의 눌제지와 동진강에서 일어난 안개가 유난히 자욱하게 몰려온 밤이었다. 전투경험이 없는 전라 감영병, 마구잡이로 지방에서 차출되거나 지원한 향병, 그리고 자기 이윤을 위해 참여한 보부상들은 연합부대라 기율이 없고, 너무 피곤하고, 굶주렸다. 대신 무장에서 봉기하여 백산에 진을 쳤던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의욕이 넘쳤고, 태인, 부안, 고부의 도교산 등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추격하는 관군을 따돌리며 혼란시켰다.


  음력 4월 6일 오후에 고부의 도교산에서 잠시 접전이 있었지만 동학농민군은 짐짓 패한 것처럼 위장하여 마침내 황토현까지 유인했다. 관군은 지쳤고 무엇보다 공에 눈이 팔려 야습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남 구례 밖을 거의 떠나지 않았던 황현은 동학농민군이 먼저 공격하였다고 기록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군호를 알리는 포성 소리도 그쳤다. 관군은 소나무를 잘라 횃불을 만들고 진중 가득 쌓은 장작에 불을 붙이자 대낮같이 밝았다. 막사 밖으로 연기가 자옥하였고 때마침 안개가 끼어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데, 갑자기 콩 볶듯이 포성이 들리면서 포탄이 발밑에 떨어지자 관군은 마치 삼이 쓰러지듯 엎어지고 쓰러졌다. 동학농민군은 삼면을 포위하고 서쪽 한 쪽만 열어 놓고 함성을 지르며 압박하자 관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날이 밝고 안개도 걷혔다. 봄갈이를 끝낸 논에 물이 가득했다. 쫓기다 무논에 뛰어든 패잔병은 깊은 진흙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내리치는 동학농민군의 창칼에 맞아 피가 땅을 적시고 논물을 붉게 물들였다. 동학농민군은 흰 옷 입은 향병은 뒤쫓지 않고, 검은 옷을 입은 감영군, 붉은 도장 찍은 표지를 등에 단 보부상만 끝까지 따라잡아 마치 사적인 원수를 갚듯이 했다.... 관군이 버린 군수물자가 도로에 가득하였다. 영관 이곤양, 태인 보부상의 우두머리 유병직, 서기 이돈승 등이 모두 죽었고, 영관 이재섭, 유수근, 정창권, 백낙유 등이 모두 도망쳤다.’


  파란 하늘엔 몇 점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피해 황토현을 내려가면서 흥분한 듯 유 선생이 말을 던졌다. 말투가 열정적이다.


  “동학농민군이 2~3천 명 연대병력의 관군을 물리쳤고, 관군의 사령관 이곤양, 보부상 우두머리 유병직도 전사했으니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그것도 첫 전투에서요.”


  관군을 물리치면서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드높아졌다. 19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 300여 명은 고부관아를 점령, 3월 25일 백산성에 꽂았던 호남창의대장소 동도대장기는 이날 황토현에서 다시 휘날렸다. 깃발에 쓴 제폭구민 (除暴救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힘찬 글씨들이 용처럼 꿈틀거렸을 것이다.


  이날 황토재 전투의 승리는 지휘관들의 전략과 농민군들의 불같은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총지휘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김덕명 오시영, 비서 송희옥 정백현, 그리고 들불처럼 활활 타오른 수많은 농민군들은 마침내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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