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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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 3호
동학은 나의 예술의 모태(母胎)

  동학은 나의 예술의 모태(母胎)


임진택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 예술총감독)



  1. 내가 태어난 탯줄 - 동학농민혁명


  나는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이 많다. 내가 태어난 곳이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동네사람들 스스로는 접주리라고 불렀다)인데, 금산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어렸을 때 사람들이 우리 어머니를 “봉수동댁”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어머니 친정이 봉수동이 분명한데, 봉수동은 금산사와 접주리 사이에 있는 동네이니 금산사와는 아주 가까운 동네였다. 어렸을 때야 금산사가 어떤 절인지 잘 몰랐지만, 커서 금산사가 증산선생과 관련이 깊은 절인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분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좌절의 아픔과 슬픔을 천지개벽의 원대한 꿈으로 승화시켜 설계하려 했음을 더 커서야 알게 되었다. 나의 동학에 대한 교감은 내가 태어난 탯줄, 고향과의 숙명적인 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2. 동학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들을 창작하다


  1) 교성곡(交聲曲) [동학]

  그 후 나는 70년대초 대학 시절 우연히 동학을 소재로 한 공연작품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작곡가 이종구 선생(현 한양대 음대 교수)의 교성곡 [동학]에서였다. 이종구 선생은 고향이 충남 공주인데, 우금치가 거기 있어서인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많았고, 교성곡은 그의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연주회 작품이었다. 나는 당시 동숭동에 위치한 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으로 판소리를 배우기도 전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졸업작품 발표에 나더러 구음(口音)을 맡아 출연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초보도 못되는 소리 실력에 냅다 악만 써댔으니 젊은 시절의 무모한, 그러나 유쾌한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마당극 [녹두꽃]

  그리고 1980년, 나는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최초의 마당극을 창작하게 된다. 소위 ‘민주화의 봄’이라 불리었던 1980년 4월, 관악산으로 옮겨간 서울대 총연극회 후배들을 모아 대학본관 앞마당에서 공연한 이 작품의 제목은 [녹두꽃]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김지하 시인이 남겨놓은 [장일담 이야기]라는 당시 메모에 바탕하여 마당극을 짠 것이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교리를 내세워 포교하던 장일담이라는 자가 정부의 포고령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억울하게 들어온 힘없는 죄수들과 함께 탈옥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황성으로 진격한다는 이야기이다.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 과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현 시대의 절실한 문제로 은유하여 전개함으로써 마당판의 역동성을 살려낸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한달 뒤, 광주에서 처절한 민중항쟁이 일어났으나 군부독재세력의 무자비한 학살로 진압되고 말았다.


  3)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1982년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본격적인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가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에서 공연되었다. 공연 주체는 극단 ‘연우무대’였으며, 민중가요의 상징인 김민기가 쓰고 연출한 작품이었다. 김민기는 익산이 고향으로, 유신정권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낙향하여 농사짓고 살다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김민기의 갑작스런 부탁으로 나는 그 작품에서 판소리 도창(導唱)을 맡게 되었다.

  내가 창작한 대목은 두 군데로, 하나는 고부봉기 후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동학도들을 무조건 잡아들이는 대목인데, 폭압자의 행태를 풍자적으로 그려내어 많은 청중의 호응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황토현 전투의 승리 장면을 그려낸 대목인데 적벽가의 적벽대전 대목을 표절(?)해서 익살스럽게 표현하여 역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작품 주제가 무거워서 관객들이 몹시 부담스러워하던 차에 삽입된 판소리 대목들이 오히려 열띤 호응을 받은 셈이었다.

  나는 그 공연 이후 동학농민혁명이야기를 아예 판소리만으로 창작하는 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3.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그리고는 10년도 더 지난 1994년, 이 해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몇 해 전에 나는 전북지역 사회운동단체들 초청으로 판소리 ‘똥바다’ 공연을 하고나서 다음날 아침 몇몇 선후배들과 모악산을 등반하였는데, 하산길에 전북대 이종민 교수에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몇 해 남지 않았는데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더니 이종민 교수가 눈이 번쩍 뜨이는 듯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1994년이 가까워 오는데 재정이 한 푼도 없는지라 사업 제안 자체가 난망이던 차에, 마침 내가 속해 있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사단법인화 되고, 때마침 우리가 잘 알고 지내던 김도현 선배가 그 해 1월초 문화부 차관으로 취임하시어 상호간에 원활한 논의가 이루어짐으로써 1억5천만 원의 지원금이 확정되었다.


  같은 시기 전주에서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처음 결성되었고 정읍에서도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새롭게 정비되었으므로, 민예총도 동학100주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내가 총기획 책임을 맡기로 하고 두 동학관련 사업회와 협력하여 문화행사를 벌이기로 하였다.


  문제는 행사권역을 관장하고 있는 정읍군이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무슨 행운인가? 전북도청에 재임하시던 나의 장형(長兄)께서 그 해1월말 뜻밖에 정읍군수로 발령을 받으신 것이다.


  형님의 배려로 민과 관이 서로 협력하여 행사를 치르기로 합의가 되어, 정읍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100주년 기념행사로 이른바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이라는 큰 판을 펼치게 되었다.


  그 당시 전북일보에 “동생은 농민군 총대장, 형은 관군 총대장” 이었던가 아니면 “동생은 전봉준, 형은 조병갑”이었던가, 뭐 그런 기사가 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 해에 나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또 다른 계획을 병행하고 있었던 바, 동학농민혁명사를 판소리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당시 역사비평사의 대표였던 장두환 선배가 특별히 배려하여 창작판소리 기금을 조성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해 1년이 다 가도록 나는 판소리 작품을 끝내 완성치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역량 부족이겠으나, 작품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때의 나의 고민을 한번 털어놓아보면 이렇다.


■ 판소리 ‘동학농민혁명사’인가,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인가?

■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만 다룰 것인가, 수운의 득도와 해월의 포교까지 다룰 것인가?

■ 농민전쟁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동학사상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나는 당시 이 문제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두기는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세계관에 바탕하여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힘으로 실천한 반봉건 역성혁명이자 민족자주전쟁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만인평등의 새 세상을 지향한 개벽운동이었다.



  4. [황토현 동학축제]를 제안하고 시도하다


  정읍에는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하고자 하는 사업회가 오랫동안 존속해 왔고 또 그들이 추진해 왔던 기념제가 있어 왔다. 사업회 자체도 역경을 헤치고 존속해온 것이거니와 기념제의 지속 역시 숱한 난관을 겪어온 것이었다. 그들의 노력과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2007년 초 정읍의 계승사업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유지해왔던 동학농민혁명 기념제가 한계에 부딪쳤으니 새로운 방향으로 개선하고자 하는데, 직접 나서서 추진해주기를 부탁한다는 전화였다. 나는 흔쾌히 응락하고 바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제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기본 계획을 구상한 바, 그 결과물이 바로 [황토현 동학축제]이다. 매우 획기적인 제안임에도 정읍시와 계승사업회가 나의 구상에 동의해 주었으므로, 나는 한 해 동안 [황토현 동학축제]의 총감독을 직접 맡아 나의 구상을 실행해 보았다.


  이 구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기념제가 아닌 축제로……

이 말은 곧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닌 시민 모두의 행사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 정읍천변이 아니라 황토현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상징공간은 현재의 정읍 중심가나 천변이 아니라 전봉준 생가나 황토현, 백산 등이다. 그 상징공간 중 여러 조건을 따져 가장 합당한 장소로 황토현을 택하였다.

■ 정읍만의 행사가 아닌 전북의 행사로, 나아가 전국적인 행사로……

이를 위해 동학농민혁명 주제 외에 또다른 문화관광 소재들을 결합하는 방안. 예를 들면 황토의 특화, 정읍사의 명품예술화, 농업과 한우·소싸움 등 특산물을 결합한다.

■ 보는 것만이 아니라 체험하는 축제로……

군병들의 야영 체험, 황토방 체험, 전투 체험, 대나무 체험, 침술·한방체험 등


  특히 내가 시도해보고 싶었던 행사는 ‘황토현 전투 재현’이었다. 영국의 에딘버러축제에 가보면 거기에는 몇가지 축제들이 독자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바, 인터내셔널 공식 예술제와 더불어 자유분방한 프린지 예술축제가 있고, 에딘버러성(城) 입구 광장에서 펼쳐지는 타투(군악대 행진과 연주)가 매일 밤 펼쳐진다. 타투는 축제기간 내내 빈 자리가 하나도 없는 만석으로 넘쳐난다.


  그렇다면 우리도 택견, 24반 무예(창·봉·검술·마상재) 등 우리의 전통무예와 군악대 및 풍물굿 농악대를 결합한 명품 타투를 만들어 황토현 대표 관광상품으로 키울 수는 없을까 하는 발상이었다. 한정된 조건에서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5. 동학농민혁명은 ‘오래된 미래사상’이며 나의 예술의 모태(母胎)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이 있은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갑자(甲子)가 되는 해인 것이다. 2014년에 대비하여 전라북도와 전주시, 정읍시, 또 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들이 어떠한 발상을 갖고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에 관한 나의 관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동학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우리 민족의 오래된 미래사상’이라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2014년에 대비하여 판소리 [동학농민혁명사]를 창작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과제라 여기고 있다. 늦어도 내년에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로서는 필생의 창작 과업이다. 왜냐하면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은 나의 예술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

  1950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서울대 외교학과를(69학번) 졸업했다. 자칭 판소리꾼으로 광대(廣大)로 불리기를 바라는 임진택은 1980년 ‘바람불어 좋은날’을 비롯 ‘천년학’ 등에 열연한 배우로서, 전주 세계소리축제 예술 총감독 등 굵직굵직한 예술 공연 축제를 총지휘하며, 종횡무진하고 있다. 1985년 ‘연희광대패‘를 설립하여 국내 공연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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