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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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겨울 38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승문의 고손자 최이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승문의 고손자 최이기



 

주요 이력 : 최이기

미국 에모리대학 정치연수 수료, 중국북경대학 지방자치연수 수료, 서울대 해양정책과정 대학원 졸업, 이화여자대 평생교육원 노인복지과정 이수, 평택대학 범죄예방 교육과정 이수, 평택대학 홍보대사,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동학농민혁명유족특별위원회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회장 겸 서울 서초을구 연청회장, 민주화 추진협의회 임원 역임 등.



문) 이번 호 유족 인터뷰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승문(1833~1895)의 고손자 최이기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먼저, 녹두꽃 독자를 위해 선생님 본인 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 승자 문자의 고손자 최이기입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동학농민혁명 유족으로서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현재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 2017년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 때는 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아래 동학농민혁명유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동학혁명유족특별위원회 위원장 임명장


문)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추구한 우리나라 최초 근대 민주주주의 운동임과 동시에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했던 최초 근대 민족주의 운동이며, 최초 근대 개혁운동입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축소ㆍ 왜곡된 채 평가절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 100주년이던 지난 1994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기념사업단체가 창립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고,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도 창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2004년 3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지난 2월에는 마침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125년만인 지난 5월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주관으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참여자 후손으로서 그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떠했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제정되어 정부가 주관하여 개최된 첫 번째 기념식인 만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기념일이 제정되어 정부에서 직접 기념식을 개최해주니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날 기념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께서 참석하셔서 뜻깊은 기념사를 해주셨는데, 다음 기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참석해주시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어디 지역이나 체육관 그런 곳에서 기념식을 개최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 가운데인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앞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는 것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에서 시작된 근대 최초 민주주의 운동이면서도 왜놈들의 국권침탈에 맞서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일어난 전국적인 반일 민족운동이었잖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상에 제대로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기념식이지만 실무적으로 힘든 일을 묵묵히 수행해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께 이 자리를 통해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문) 고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요? 또 고조부님의 참여 사실을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 같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제 당숙께서 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셨는데, 그분께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2004년에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면서 고조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분이라는 것을 알고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국무총리)에 참여자와 그 유족 등록신청서를 제출하셨더라고요. 그래서 고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 선생님은 현재 경기도 안산시에 거주하고 계시는데, 원래 고향은 어디신지요?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봉기한 전 민족적인 사건인데 선생님의 고조부께서는 어느 지역에서 활동하셨는지요?


답) 네, 원래 제 아버지 고향은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예요. 장흥이 고향인데 이후에 나주 등지로 이사를 다니셨어요. 저는 중·고등학교까지 고향인 장흥에서 살았고요. 그 이후로 광주, 지금 광주광역시죠? 광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저희 집안의 고향이 장흥이어서 고조부님도 장흥에 살면서 장흥지역에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조부님의 연세나 집안 형편 등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없으신지요? 선생님의 고조부께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에 대해 전해들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길 바랍니다.


답) 고조부께서 상당히 중요한 활동을 했다고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전해들은 내용은 없습니다. 제 아버지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은 엄청나게 어려웠어요. 농토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농사로 업을 삼으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자식들인 우리가 나주로 광주로 전전했던 거지요.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조부님은 연세가 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고조부님 연세가 62세였고 함께 참여했던 고조부님의 형님(종고조부)도 70세 정도 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 60세가 넘으면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조부님 뿐 만 아니라 고조부님의 형님도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은 참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 했던 모든 분들이 그러했겠지만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으로서 정말 자랑스럽고 그분들의 애국애족 정신은 꼭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따라 2004년 9월 설치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추진한 참여자 유족등록에 서류를 제출하여 2008년에 유족등록이 결정되었지요? 어떤 부분들이 인정되어 유족으로 등록되었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고조부님(최승문)과 종고조부님(최진문)이 함께 장흥지역에 이사경 접주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894년 12월에 있었던 전남장흥석대들 전투에 참여하신 이후 관군에게 체포되어 두 분이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두 분 다 연세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동학농민군을 지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당시 고조부님이 살았던 장흥 부산면 용반리에서는 일본놈들의 토벌이 있었고 마을 전체가 불탔다고 합니다. 정말 몹쓸짓을 했죠. 그때 저희 집안 어르신 분들 뿐 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죠.



유족 등록통지서


문) 네, 맞습니다. 갑오년에 장흥에서도 1894년 12월 15일(음력) 석대들전투 이후 대대적인 토벌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토벌군에 끌려가 처형됐죠. 고조부(최승문)께서 처형된 이후 시신은 거두셨는지요?


답) 고조부(최승문)과 종고조부(최진문)은 장흥 벽사역에서 처형되었다는데, 처형된 후에 부인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시신을 찾아서 머리에 이고 돌아와서 남성동에 안치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묘소는 선산인 장흥면 부산면 용반리 남산골에 있는데, 얼마 전까지 우리 집안에서 고조부님 제사를 모셔오다가 몇 년 전부터 문중에서 시향제로 전환하여 제를 모시고 있어요.



 

문) 대부분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들은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면서 오랜 동안 힘들게 사셨는데, 고조부님(최승문)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후손들이 힘든 삶을 살지는 않으셨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후손들이 다 힘들게 살았더라고요. 저희 집안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2004년도 특별법에 의해 명예회복이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몇 세대가 지난 세월이지 않습니까? 그동안 ‘동학농민혁명’하면 ‘반란사건이다’이란 말을 참 많이 들었고 어디 가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이라는 말도 제대로 못했지요. 그래서인지 집안 어르신들도 힘들게 사셨고 저희 아버지도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는 옛날에 남의집살이도 하고 의정부 미군 부대에서도 일했습니다. 어릴 때 기억으로 밤중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큰 궤짝을 등에 지고 오시더라고요. 궤짝 안에는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가져온 미제 건빵, 구둣솔 이런저런 물건이 많이 있었는데 그 물건들을 아버지께서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주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고생이 참 많으셨죠.



문)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제정되어 정부주관으로 첫 번째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드라마 ‘녹두꽃’이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어 갑오년 역사에 대해 많은 분들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드라마 녹두꽃을 시청하셨겠지요? 시청하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답) 물론 봤지요.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기념식이 거행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5월 11일을 전후하여 텔레비젼에서 드라마 ‘녹두꽃’이 방영되어 아주 좋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범국민적으로 알리는데 아주 기폭제가 되었잖아요? 중앙방송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방영된 장편의 드라마는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방송 드라마 뿐 아니라 영화나 연극 등 다양한 문화예술공연 작품들이 제작되어 공연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 다른 바람으로는 프랑스대혁명 그러면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 동학농민혁명도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문) 선생님 말씀처럼 동학농민혁명이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 될 수 있도록 재단에서도 더욱더 힘쓰겠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력하나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우리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일에 힘닿는 데까지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나니 우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그 역사에 참여하셨던 집안 어르신들, 그리고 고생을 많이 하신 아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애잔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아울러 나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한 집사람한테도 이 자리를 통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아무쪼록 먼길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우리 집까지 찾아와줘서 감사합니다.



최이기님과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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