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낙철의 손자 김영웅

문) 이번 호의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김 낙자 철자(1858~1918) 님의 손자 김영웅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를 위해 본인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도 부안에서 대접주로 활동하신 김 낙자 철자의 손자 김영웅입니다. 저는 1994년 유족회가 창립되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몸담고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 일에 나름대로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유족회 창립을 준비하던 초창기 때부터 벌써 30년 가까이 활동을 해온 것 같은데, 현재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를 맡아 조부님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문) 선생님,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반란사건으로 평가 절하되었다가 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을 전후하여 역사학계 전공연구자는 물론이고 전국 각 지역에서 뜻있는 분들이 기념사업단체를 창립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분들을 모아 유족회를 만드는 등 여러 활동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범국민적인 재인식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동학농민혁명 110년 만인 지난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125년 만인 지난해 2월에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5월 11일로 제정·공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해 정부 주최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개최되었고, 올해는 정부 주최 두 번째로 지난 5월 11일 정읍 황토현전적지에서 제126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코로나19 전염병 확산이라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하여 올해는 기념식이 대폭 축소되어 진행되었지요. 어쨌거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기념식 개최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제가 작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된 기념식에도 참석했고, 올해 행사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할아버지도 떠오르고 하여 행사장에서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치기도 했습니다. 전에는 동학란이라고 해서 대놓고 말도 못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혁명으로 불리면서 국가기념일까지 제정되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많이 지나도 진실은 반드시 빛을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가기념일이 제정되기까지 참 많은 분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력해주셨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3월 서울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출발하였는데 그 창립식은 역사학자 고(故) 이이화 선생님이나 고(故) 우윤 박사님 그리고 우리 유족회 정남기, 김성황, 손주갑 등 많은 분들이 애를 쓰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학계의 큰 보배이신 고(故) 이이화 선생님이 동학농민혁명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정말 헌신적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얼마 전에 타계하셔서 개인적으로 참 가슴 아프고 안타깝고 그랬습니다. 우리 유족회 창립 초창기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고(故) 이이화 선생님이 유족회 창립의 산파역할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돌아가셔서 안타깝습니다.

김낙철 대접주와 부인
문) 선생님께서는 언제 유족등록을 하셨고, 어떤 계기로 등록을 하게 되셨나요?
답) 제가 유족으로 등록한 때는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된 후 참여자와 유족 등록을 위한 신청서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하여 2006년도 등록은 마무리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집안에 누님들 세 분은 이미 돌아가셔서 살아있는 형제자매만 유족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문) 선생님은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에 대하여 어떤 경로로 통해 알게 되었고,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답) 그 계기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되던 해였어요. 그 무렵 언론과 역사학계,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한다고 활기가 대단했잖아요? 그때 전북일보사가 동학농민혁명 특별취재진을 구성해서 매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연재했어요. 그때 전북일보에 우리 조부님 기사가 나온 것을 보고 제가 신문사에 전화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전북일보사 동학농민혁명 특별취재팀과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님이 우리 집이 있던 유성(대전광역시)으로 찾아왔어요. 그때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문) 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3년부터 2년간 전북일보사에서 특별취재팀을 구성하여 동학농민혁명사를 취재하여 보도하였지요. 서울대 박명규 교수, 원광대 박맹수 교수, 정부기록보존소 이진영 박사 등 연구자들과 전북일보 기자 세 명인가? 특별취재팀을 꾸려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되돌아보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이끌어낸 도화선 역할을 그 특별취재팀이 수행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취재한 내용이 1995년에 『동학농민혁명 100년』(나남출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해에 전북일보 동학농민혁명 특별취재팀이 한국기자상을 받았지요. 그때 선생님께서 조부님의 역사,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군요. 그렇게 사회적 분위기가 고양되는 속에서 서울의 역사문제연구소 등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족 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 유족회 창립을 논의했었습니다. 1993년 가을에 경북 예천군 성당에서 고(故) 이이화 선생님이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역사특강이 있었는데, 그 성당의 신부님과 예천지역에서 활동하셨던 참여자 전기항 님의 손자 전장홍 선생님이 자리를 함께했었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그 역사적 의미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흩어져 있던 유족 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서 마침내 199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되었지요. 초창기에 이현도, 고(故) 김환옥, 고(故) 김상기, 정남기, 전장홍, 김성황, 함기영, 문영식, 손주갑, 전성준 그리고 선생님 이런 분들이 함께하셨지요.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얘기네요.
답) 그랬지요. 그때만 해도 제가 참 젊었어요. 백주년이 되던 그 해에 박맹수 교수님을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할아버지께서 쓰신 책이 있는데 그 친필 원본을 찾아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원본을 찾으려면 전북 부안에 가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전북 부안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호암수도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전북일보 취재팀 기자님들이랑 박 교수님이랑 찾아갔어요. 거기에 박기종씨라고 천도교 선도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그때 나이가 아흔이 넘으셨어요. 그분한테 제가 용암 김낙철 대접주의 친손자입니다라고 얘기하니까 칠팔 명을 급히 불러 모이게 하더니 저한테 합동으로 큰절을 하더라고요. 어리둥절했지요. 그러면서 그분들이 제게 하시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예수를 그때는 야수라고 불렀는데 야수가 잡혀갈 때 열두 제자가 모두 도망갔었답니다. 심지어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할까? 그러면서 가만히 그분들 얘기를 들었지요. 그분들의 얘기의 결론은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조부이신 용암 선생님이 그렇게 최시형 선생님을 목숨으로 보좌하였고, 종국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절세의 충신이라는 얘기였어요. 동학농민혁명군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크게 패한 후 최시형 선생님과 용암 우리 조부님 등이 강원도 원주인가? 홍천인가 피신을 갔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날 피신해 있던 집으로 관군이 들이닥쳤대요. 그때 제 조부님께서 “내가 해월이다!” 그렇게 외치고 잡혀갔다고 해요. 제자로서 스승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잡혀가서 갖은 고초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진짜 최시형 선생님이 체포되어 순국되었고, 최시형 선생 행세를 한 우리 조부님은 가짜임이 밝혀져 방면이 되었다고 합니다. 방면이 되긴 했지만 그때 당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에는 돌아가시고 말았다고 합니다.
문) 전북 부안의 호암수도원에 가셨을 때 일들에 대한 기억이 있으시면 더듬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그때 호암수도원에 갔더니 학산 정갑수라는 분을 신격화하고, 그분에 대한 책도 펴냈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정갑수라는 분이 우리 큰 고모부님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제자를 사위로 삼았던 모양이에요. 학산 정갑수 선생은 우리 조부님의 동학 제자이자 사위였던 셈이지요. 그분은 저를 만나자마자 우리 할아버지 얘기부터 하더라고요. 저는 큰 고모부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이분에 대해 그때까지 면식도 없었고 잘 몰랐습니다.

『학산정갑수선생전기』|1994년, 천도교호암수도원
문) 동학농민혁명 이후 충북 보은 등으로 전전하시다가 이곳 여산(전북 익산시)에 정착한 후 선생님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하는데, 어머니로부터 할아버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없는지요?
답) 어머니(김문강)께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자세히는 못 들었습니다. 아버지(김영식)와 아버지 형제간들도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에 관련된 얘기는 잘 못 들었습니다. 또 할아버지가활동하셨던 부안군(전북)에 거의 왕래를 하고 살지 않았거든요. 박 교수와 같이 호암수도원에 찾아가서 만났던 박기종 선도사님과 정읍시 문화원장 고(故) 최현식 선생한테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에 관련된 내용을 좀 더 알고 싶어 유족회 활동을 초장기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남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지 실제로 우리 집안에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역사학자 고(故) 이이화 선생하고도 많이 접촉했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현식 선생님도 제가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 나름대로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네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조부님, 용암 김낙철 선생님에 대하여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할아버지 관련해서 제가 들은 얘기나 책을 보면 할아버지는 동학에 참여했어도 싸우고 창을 들고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삶을 보면 관과 민과 교량역할을 잘하셨던 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관과 민에서 할아버지 뜻을 많이 반영해서 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문헌에 보면 1894년 2월 28일(음력) 전봉준 장군과 손화중 선생이 4천여 명을 이끌고 전북 부안에 와서 당시 부안 현감이던 이철화를 처형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손화중 선생한테 가서 동학사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청을 해서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할아버지가 체포되어 서울서 수감생활을 할 때 그 부안 현감이 중앙 요직에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서울서 처형이 안 되고 살아나셨던 것 같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분들을 보면 한 집안에서 여러 형제가 같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선생님 조부님 형제분도 함께 참여하셨지요?
답) 저희 할아버지(김낙철)의 동생분이 김자 낙자 봉자이신데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자세하게는 잘 알지 못합니다. 종조부님(김낙봉)의 증손자 김문철이라고 있는데, 제가 할아버지의 손자니까 항렬로는 제가 높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아요. 그런데 별로 왕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참여자 조사하고 유족등록하고 그럴 때 제가 그쪽 집안에도 연락을 해서 그쪽 집안 분들도 참여자와 유족 등록을 했습니다.
문) 조부님은 지금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할아버지 산소는 현재 논산(충남) 은진에 있습니다. 원래는 할아버지 묘소가 서울 이태원에 있었다고 합니다. 왜 서울에 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제 나이 10살 무렵 쯤 논산 은진으로 이장한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41년생이니까 해방 이후가 되겠네요. 창호지에 유골을 싸서 땅에 매장한 것을 봤으니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을 합장했고 성묘는 하는 게 좋지 않다고 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라서 그러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묘가 있던 그곳은 원래 우리 집안 산이었는데 장형이 형편이 좋지 못해 팔아서 지금은 아닙니다. 나중에 그 땅을 다시 사려고 했지만 산 주인이 팔지 않아 아직까지 되찾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묘소도 조부모님 묘소 근처에 모셨습니다. 남의 땅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한 7, 8년이나 되었나? 전에 부안군에서 문화원장하고 몇 분이 와서 호암수도원이 위치한 부안 상서면 감교리 쪽에 학산 정갑수 큰 고모부님 묘가 잘 되어 있는데 할아버지가 학산 장갑수 선생의 장인이고, 스승이고 하니까 할아버지 묘를 그쪽으로 이장을 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서울 계신 형님과 상의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형님이 얘기하기를 정읍 황토현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되고 있으니 여러 모양새로 보더라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모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얘기하셔서 부안으로 모시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지금의 할아버지 묘소로 각지에서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느 해인가는 광주에 사는 분이 할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매번 산소에 와서 벌초합니다. 그분은 천도교 분인데 저의 할아버지 묘소뿐 아니라 최시형 선생님 묘소도 그분이 벌초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부님의 사정에 대해 알고 계시는 내용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할아버지 나이는 30대 중반이었고 집안은 꽤 윤택했던 것 같습니다. 전해들은 일화가 하나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1893년에 전라도 및 제주지역에서 심한 흉년이 들어서 전라도 부안, 김제가 곡창지대니까 이쪽으로 쌀을 사러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집안 창고에서 쌀을 줬다고 들었고, 제주도 사람들이 쌀을 사가는 것을 동학농민군이 못 가지고 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쌀 한 톨도 못 건들게 해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다 줘서 보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관련된 글을 보면 할아버지 집안은 만석지기는 못돼도 7천석 지기는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부안에서 상당한 부자였다는 것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집안에 일꾼들이 수십 명으로 부자였는데 동학농민군들에게 식량을 지원해서 가산이 많이 기울었다는 기록을 봤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 동학농민군을 돕기 위해 가세가 많이 기울어서 그랬지 않나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체포되어 나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50여 명이 그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꼭 풀어줘야 된다며 나주 형무소 앞에서 연좌데모를 했다고 합니다. 나주 목사가 이런 모습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용암 김낙철 묘소와 손 김영웅 선생님|충남 논산시 은진면 남산리 37-10
문)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중심의 봉건체제를 개혁하여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열고자 했던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주의 시원(始原)입니다. 뿐만 아니라 1894년 6월 21일(음력)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는 폭거를 자행하자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일어난 반일의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 그 후손들은 오히려 숨죽여 모진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집안은 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로 인해 힘든 세월을 보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답) 할아버지께서 전북 부안군에 계시면서 활동하셨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후 부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충청도 계룡산, 보은으로 거주지를 옮기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해 다니시다가 나중에는 논산 은진에 정착하셨는데, 그때는 이미 가세가 크게 기운 건 말할 나위 없지요.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거기다가 제 장형까지 일찍 돌아가셔서 형편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형제자매가 누님이 7명, 남자 형제가 명 이렇게 해서 총 13명인데 저는 아들로는 다섯 번째이고 순서로는 열 두 번째입니다. 장형은 복막염으로 돌아가셨고, 둘째 형은 6.25로 전사하셨고, 셋째 형은 3년 전에 병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위로 형님과 동생만 현재까지 살아있습니다. 셋째 형님은 청량리에서 잘 사셨는데 사실은 이복형제입니다. 제게는 어머니가 3분이 계십니다. 저를 낳아준 어머니께서 삼형제를 낳으셨는데, 다른 형제들은 타지로 떠나고 저만 끝까지 논산 은진에 남아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일을 했습니다. 저는 형편이 어려워서 사실은 중학교도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제 2살 위로 형님이 계시는데 호적상으론 1살 차이입니다. 형님은 중학교 진학을 했지만 저까지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되어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학교는 얼마 못 다녔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이 남아있어 그때 중앙통신강의라고 해서 1년에 중학교 3년을 마치는 특별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저는 어렵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문) 바쁘신 가운데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거나 놓친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할아버지께서 살아온 삶에 대해서 제가 많이는 몰라도 아무래도 할아버지 유전자가 다 저한테 집중되어 내려진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간혹 해봅니다. 할아버지께서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모른척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도 배운 건 많지 않지만 지역사회와 주변 사람들을 힘닿는 한 많이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남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몸 기꺼이 내놓으셨던 할아버지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이름에 욕되지 않도록 똑바로 잘 살아야겠다 늘 마음 다잡고 하루하루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우리 대에는 물론이고 우리 후대에도 계승되고 더욱 발전될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기념재단에서 추진하는 사업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돕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