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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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 42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2020년 11월 09일 11시

장소  변호사김정호법률사무소


문) 안녕하세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통권 42호) 2021년 신년호 지역대담에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하 완주기념사업회) 김정호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회장님 먼저 『녹두꽃』 독자님들께 본인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반갑습니다. 2014년부터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정호입니다. 제 직업이 변호사라서 그동안 전라북도의회 교육위원회 전담 고문변호사를 역임하였고, 현재 완주군 장애인연합회 고문변호사, 전북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법문화교육진흥원 원장, 국제와이즈멘 한국지역 재무총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서는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문)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네요. 회장님 고향이 삼례이지요? 어렸을 적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잘 알고 계셨는지요?


답) 네, 제가 태어난 곳이 완주군 삼례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완주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은 2014년 이전까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삼례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그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인가? 우리 지역 선배이시기도 하고, 완주기념사업회 창립 회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신 고(故) 이민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분은 생전에 완주군 고위공직자로 근무하다 퇴직하신 후 고향 삼례에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분입니다. 이분이 저에게 완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여 제가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념사업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문) 네, 이민교 선생님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완주기념사업회가 창립을 준비하던 1996년 후반기부터 이민교 선생님을 자주 만났습니다. 당시 전주시 금암동 원광신용금고 2층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던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왜곡·축소되면서 그 위상과 의미가 사라져버린 동학농민군 기병(再起兵), 그러니까 삼례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단에서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1996년 10월 26일 삼례입구 한내 둑 위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민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완주지역 여론이 무르익어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1996년 11월엔가? 완주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지요. 창립 때 이민교 선생님이 회장을 맡으셨고, 당시 삼례수협에 근무하시던 이원영 선생님이 사무국장을 맡으셨지요.


답) 네, 얘기 들었습니다. 초창기 때 이민교, 이원영 두 분이 삼례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당시 이사장 한승헌)에서 마련해준 사업기금 5천만 원을 종자돈으로 하여 추진된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을 조성하는데 이분들이 가교역할을 수행하는 등 힘을 보탰다고 알고 있습니다.



문) 맞습니다. 완주군 신금리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은 완주군과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완주군이 동학농민혁명 109주년이던 2003년 10월 10일 역사광장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역사광장은 쇠스랑을 움켜쥔 농민군의 팔둑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설치물을 비롯하여 대동의 장, 추념의 장, 동학농민군 출진상 등으로 구성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 역사광장에서 매년 10월 삼례봉기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있지요?


답) 네, 1997년부터 매년 10월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를 기념하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대회’를 추진하였습니다. 대체로 풍물패 길놀이를 시작으로 기념식, 범 군민 걷기대회, 청소년 역사탐방 등으로 진행됩니다.



문) 삼례는 동학농민혁명 이태 전인 임진년(1892) 11월 초에 동학농민혁명 전사(前史)인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이 열린 곳이고, 1894년 9월(음력) 2차 기병이 단행된 곳입니다. 나아가 우금티전투 이후 잔여세력이 피신하여 1895년 2월까지 항전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농민혁명과 삼례는 이렇듯 아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맞습니다. 전라도 삼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관련 굵직한 사건들이 많지요. 동학교단이 주도하여 임진년(1892) 11월 1일부터 한 달 가까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이 열렸습니다. 동학(東學)을 사교(邪敎)로 몰아 창도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을 처형한 것은 억울하니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 동학교도에 대한 관의 탄압을 중지하라고 요구한 삼례집회는 조선정부에게 동학의 공인을 요구한 집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94년보다 2년이나 앞서 삼례에서 이런 집회가 열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네, 회장님 말씀처럼 역사학계는 1892년 11월에 전개된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을 동학농민혁명 전사(前史)로 인식하면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특히 이때 전라감사에게 집회의 요구사항을 전하는 역할을 전라좌도 남원의 류태홍, 전라우도 고부의 전봉준이 자원하여 나섰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삼례집회의 맥락이 이듬해인 계사년(1893) 2월 광화문 복합상소, 3월 충청도 보은집회와 전라도 금구·원평집회, 11월 고부의 사발통문거사계획으로 이어졌고, 1894년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 무장기포, 백산대회 등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892년 11월 삼례집회가 열린 것과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는 폭거를 자행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 삼례에서 재기병을 단행한 것이 우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삼례가 역참이 있었던 곳으로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이 재기병 장소로 선택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이전에 삼례집회를 통해 기반이 다져진 곳이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삼례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상당이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2000년대로 들어선 후 완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게 전까지 동학농민혁명과 삼례가 이렇게 깊이 관련된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완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난 이후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 삼례와 동학농민혁명 관련성에 대해 2000년대 이전에 깊이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회장님께서 면목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는데... 면목 없어 할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웃음) 갑오년 겨울 공주 우금티에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에게 크게 패한 후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으로 빠져들었고, 해방이후에도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부침의 연속이었잖습니까? 다행스럽게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크게 전환되었지요. 사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참다못해 일어난 민란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답) 맞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사학자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일제의 국권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이고 전 민족적으로 일어난 2차 동학농민혁명,다르게 말하면 반일의병전쟁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철저하게 거세되었지요.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반일 민족항쟁으로서의 의미는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진 채 그저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의한 전라도 서남해안지역의 사건으로 축소하고 왜곡되어왔지요. 이런 왜곡과 축소는 해방이후에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시기에 민족내부의 극심한 좌우대립과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지면서 바로잡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뿐만이 아니라 대체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의 깊이와 그 폭이 열악했었습니다. 어쨌거나 1996년 삼례 들머리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가 새워졌고, 그런 흐름 속에서 완주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현재 제가 회장직을 맡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조금 덜 염치없기는 합니다.(웃음)



문) 네, 회장님. 회장님께서는 완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후에 매년 지속적으로 삼례봉기 기념대회는 물론이고 완주군 대둔산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전지에서 희생된 분들에 대한 추모사업도 꾸준히 추진해오고 계시죠? 이점에 대해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1895년 2월까지 대둔산에서 항전하다가 희생된 농민군을 위령하는 추모제례를 매년 11월과 12월 사이에 모시고 있습니다. 1999년 원광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대둔산 항전지 ‘형제바위’는 아주 높고 험준한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지 못하고 대둔산 등산로 길목에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기념비를 건립한 이후 매면 기념비 앞에서 추모제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항전 일자에 맞춰 매년 2월에 모셨는데 너무 추워서 5년 전부터는 11월 중 주말을 기해 등산객 등도 함께 참여하는 열린 형태로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일본군과 관군에게 저항한 분들의 높은 정신을 후손들이 마땅히 기리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돌아보면 동학농민군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오늘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극심한 부침의 연속이었던 한국 근대사 초입에 동학농민군의 고결한 희생이 없었다면 정말로 우리나라 근대 초입의 풍경은 얼마나 적막하고 황폐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문) 네,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가슴이 찡해집니다. 삼례를 비롯하여 완주지역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가 많지요? 완주지역 유적지를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앞서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우선 완주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로는 제일 먼저 1892년 삼례집회와 1894년 삼례봉기가 열렸던 삼례역참 일대를 들 수 있습니다.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이 모인 집회의 장소를 특정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삼례 전 지역이 해당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 범위를 좁혀본다면 현재 삼례동부교회가 세워진 곳이 당시 삼례역참이 있던 곳이라서 그 일대를 중심으로 집회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밖에 완주지역 유적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대둔산 동학농민군 항전지가 있고,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기를 보관한 장소이기도 했던 완주군 소양면의 위봉사 등이 있습니다. 유적지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마는 현재 삼례봉기 역사광장 앞에 있는 완주군립도서관 마당에 당시 지방 수령들의 공적비나 영세불망비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 <이도재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이도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에 뒤를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이도재가 갑오년 12월 1일 태인현 종송리에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을 서울 압송 후 재판을 거치는 절차를 무시하고 전주에서 참수형(斬首刑)을 집행한 사람이지요.



문) 완주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꾸준히 추진해오면서 느낀 점이 참 많으실 텐데, 기념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현재화와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앞으로 어떤 점들에 힘을 기울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재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너무 극심하게 왜곡되고 축소된 탓에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가기념일까지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반란사건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근현대사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에서 발원한 우리나라 근대 최초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고, 삼례봉기를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대·전개된 전국적이고 전민족적인 반일의병전쟁으로 우리나라 최초 근대 민족주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범국민적으로 확신시키기 위한 대중적인 정신선양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인터뷰 시간이 상당히 길어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빠트린 얘기 혹은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갑오년의 역사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재정립하여 전국화를 이루고, 나아가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현재화를 추구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 서남해안의 지역의 역사로 인식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일본군에 대항하여 일어난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념사업이 소외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특별법 제1조 목적에 명시되어 있듯이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념사업에도 보다 힘을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문) 네, 회장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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